청룡 아리랑(2)-해병278기 김성동
청룡 아리랑(2)
전쟁, 그것은 이기면 살 수 있고 지면 죽는 인간이 만든 가장 잔인한 게임이었다.
이제 우리네 파월용사들은 악몽같은 전쟁터에서 당당히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품으로 개선가를 부르며 돌아왔다. 싸웠노라 이겼노라 돌아왔노라, 그러나 살아서 함께 이 땅을 다시 밟자던 그 전우는 정녕 어디로 갔는가.
누가 우리들의 약속을 이렇게도 야멸치게 깨트렸는가. 숨져간 전우들의 얼굴들이 한순간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가 무심한 태극기의 물결 속에 저만치 사라져간다.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하지만 항상 가난을 달고 살았던 우리나라, 이제 우리네 파월용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밑거름이 되면서 대한민국은 눈부시게 발전하여갔다.
비약적인 경제성장은 어느덧 이 나라를 세계10위의 경제선진국으로 만들어갔다.
파병당시 100불밖에 안되던 국민소득은 어느새 2만불을 육박하는 기록을 세운다.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에 대해서도 당당히 제목소리를 내는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질투의 신이 심술을 부리는 것인가.
그 고도성장의 이면에서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우리네 파월용사들이 30~40대의 장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그것도 가장으로서 한창 가정을 책임져야 할 그 나이에 원인모를 질병으로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지가 마비되는가 하면, 살이 썩어 들어가기도 했다. 심지어 그들의 2세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기형아를 출산하기까지 이르렀다.
청룡이 그랬고 맹호가 그랬고 백마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월남에서 얻은 특유의 풍토병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치료가 불가능함이 확인되면서 그로인한 비극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파월용사의 육체와 정신은 날로 피폐되어갔고 급기야 경제적 파탄까지 몰고 오면서 끝내는 그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빼앗아가는 것이었다.
무서운 불치의 병. 그의 정체는 바로 고엽제 중독현상이었다. 일명 에이전트 오렌지라 불리는 고엽제는 월남전에서 미군들이 우거진 밀림을 황폐화시키기 위하여 사용한 맹독성 물질로서, 바로 이 고엽제가 무방비상태인 우리네 파월용사들에게 고스란히 피폭되어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나마 이 사실을 안 파월용사들은 미국의 고엽제생산회사와 아울러 미국정부, 그리고 우리 정부에 대하여 그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바위와 계란의 싸움이던가.
아무런 지원군도 없는 파월용사에 비하여 상대는 너무나 강했다. 정부계약자원칙과 소멸시효의 완성, 그리고 고엽제와 질병간의 인과관계 입증 등을 내세우는 역공에 발목이 잡히면서 우리네 파월용사들은 그 모든 소송에서 허무하게 패소하고 만다.
그나마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 피해보상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그들의 꿈은 너무도 무참히 부수어지고 말았다.
망연자실한 파월용사들 앞에는 다시금 고통과 신음과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피해자는 분명히 있건만, 가해자도 분명히 있건만 어찌하여 책임지는 자는 없단 말인가. 만인에 평등한 것이 법이라고 외치지만, 그것도 힘없는 약자들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요, 허무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고엽제의 피폭, 그로 인한 고통,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원인제공은 고엽제생산회사가 하였다지만, 그 실질적인 잘못은 고엽제가 인체에 해로운 것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사용한 미국정부에 있는 것이다.
또한 무책임하게 브라운각서에 쉽게 서명을 하여준 우리 정부는 더욱 큰 잘못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언제나 아군으로만 생각했던 미국이었건만, 언제나 조국으로만 생각했던 대한민국이었건만 그 누구도 고엽제의 피해에 대하여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고 했다. 스스로가 믿어온 신의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이 배신감은 과연 누구를 향한 것인가. 나는 분노어린 마음으로 우리 정부에게 묻는다.
우리네 파병용사들은 정부의 이름으로 파병한 것인가, 아니면 국가의 이름으로 파병한 것인가.
정녕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파병한 것이라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피해는 당연히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라는 이 국가가 엄연히 존재하는 이상, 파병 당시의 정부가 아닌 이후의 정부라도 국가의 책임을 당연히 물려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병 당시의 정부가 아니라고 해서 그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한다면, 이는 국가에 대하여 그리고 국민에 대하여 중대한 직무유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정부들은 하나같이 파월용사의 고엽제 피해배상문제를 소극적으로 다루면서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 것인가. 파월용사는 이 나라 국민이 아니던가.
그러면서 이 나라는 일찍이 그들에게 국방의 의무를 그렇게도 당연히 요구했던 것인가.
나는 통렬한 심정으로 다시 한 번 우리 정부에게 묻는다.
미국과 호주의 파월장병들이 고엽제 생산회사를 상대로 피해보상소송을 할 때 과연 우리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무슨 이유로 우리 국민의 귀와 눈을 막으면서까지 그 사실을 은폐하였던가.
그 결과 우리네 파월용사들은 미국으로부터 쉽게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통하게도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 정부의 이해할 수 없는 미온적인 태도와 수수방관하는 소극적인 자세가 상황을 이토록 어렵게 몰고 간 것이다.
국가의 책임이 무엇인지, 정부의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참으로 한심한 정부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정권은 다시 바뀌었다. 새 정부는 파월용사들의 고엽제 피해문제에 대하여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함을 분명히 인식하고,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비상한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파월용사의 희생과 고통을 외면한 정권치고 정치를 잘 한 정부가 없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진실과 정의를 외면한 정부로서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을 이 정부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파월 용사들, 그들은 누구인가.
스무살 꽃다운 젊음을 월남전에 바치고 그 희생의 댓가로 이 나라를 가난에서 건져낸 그야말로 국가의 유공자가 아니던가.
지난 반세기에 걸쳐서 고엽제로 평생을 신음하다가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병이 되어버린 그들, 더 이상 그들의 가슴에 한을 심어줄 수는 없다. 결자해지의 차원에서도, 국민을 보호하는 차원에서도 이제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 파월용사의 고엽제 피해에 대하여 정부는 일차적으로 모든 책임을 지고 직접 배상하여야 한다.
그 다음에 비로소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이나 협상을 통하여 구상금을 받아냄은 이차적인 문제이며 정부 능력의 문제일 뿐이다.
그 옛날, 파월용사들은 국가의 아들로서 충성과 효도를 다하였다. 지금은 이 정부가 파월용사의 아들이 되어 충성과 효도를 다 해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고엽제피해자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졌으나 후유증과 의증으로 구분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파월용사들의 입지를 더욱 좁히는 결과만을 야기했다.
소위 Slow Bullet(천천히 날아오는 총탄)이라 불리는 고엽제, 그로 인한 피폭증상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었다. 귀국 시에 건강하던 파월용사들이 뒤늦게 병마에 시달림도 바로 이러한 연고에 기인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성질에서 고엽제피해자를 후유증과 의증으로 구분함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후유증이나 의증이나 그 보상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기본적으로는 똑같은 고엽제 피해자로서의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한편 파월용사들은 이미 전쟁터에서 슬로우 불렛이라는 보이지 않는 총탄을 맞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로 인한 결과가 전쟁 후에 비로소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상이인 것이다.
지금까지 파월용사들이 모두 상이용사로서 국가유공자로서의 혜택을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고엽제 법률이 진정 파월용사를 위한 취지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고엽제 피폭에 대한 고도의 개연성 인정을 수용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인과관계의 입증책임도 가해자 측에서 지는 것으로 개정되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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