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일기/해병278기 김성동

청룡 아리랑(5) - 신의와 배신(上)

머린코341(mc341) 2015. 10. 24. 00:57

청룡 아리랑(5) - 신의와 배신(上)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월남의 전장을 선구했던 청룡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임전무퇴의 기백은 유감없이 발휘되면서, 오로지 그들의 목표는 승리의 깃발만을 꽂을 뿐이었다. 적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난공불락의 천연요새도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월남 속의 월맹이라는 그 백년아성도 기어이 아군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언제나 승승장구로 치달으며 불굴의 기개를 만방에 떨치던 우리네 청룡들, 그러나 그 승리의 뒤안길에는 죽고 죽이는, 뺏고 빼앗기는 처절한 전투가 있었고, 그만큼 우리네 청룡은 커다란 희생을 함께 하였다.


적과의 사이에 놓여있는 전우의 시신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밤이 새도록 대치 상태로 총격전을 주고받았고, 칠흑같이 캄캄한 밤에 백병전도 치열하게 벌였다. 방금까지도 보이던 전우가 적의 비오듯 퍼붓는 박격포탄에 바로 맞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포로로 잡혀가던 전우를 구하고자 적의 본거지를 탈환했을 때 이미 그 전우는 기름불에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타다 남은 빨간 명찰을 보고 비로소 내 전우임을 알게 되면서 북받치는 눈물, 북받치는 분노... 결코 전쟁을 겪어보지 않고는, 결코 전우를 잃어보지 않고는 아무도 모른다, 청룡의 이 감정을...


먹구름이 잔뜩 전운을 드리우던 날, 바야흐로 월남전 사상 최초ㆍ최대의 상륙작전이 한국 해병대와 미 해병대에 의하여 감행되었다. 모함을 떠나면 배수진이든가, 빗발치는 탄우 속에 적진을 향하여 달려가던 청룡들, 그 돌격전 속에 하나 둘 쓰러져가는 청룡들...그러나 전쟁의 신은 숨져간 전우들을 슬퍼하는 겨를조차 허용치 않았다. 오로지 분노 속의 돌격, 돌격만을 허용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돌격전 속에서 싸워서 이기고 지면은 죽어야 했다. 마침내 쟁취하는 최후의 승리, 그것은 죽은 자의 피와 산 자의 눈물로서 이루어진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녕 고귀한 승리였다. 이제 청룡은 적에게 한없이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청룡은 강자에게는 강할지언정 약자에게는 결코 강하지 못하였다. 울창한 밀림 속, 소대의 주간작전이었다. 첨병으로 제일 앞서가던 청룡의 눈앞에 베트콩이 발견되었다. 청룡은 소대원들에게 적발견을 알림과 동시에 가까이 오면 사살하기로 작정하고 풀 숲으로 몸을 낮추었다. 그런데 저만치서 걸어오던 베트콩은 뜻밖에도 말로만 듣던 무장한 전형적인 여자 베트콩이었다. 어리고 예쁘장한 얼굴에 카빈 총을 어깨에 거꾸로 매고 멋모르고 혼자서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문득 청룡은 고향의 여동생이 생각나면서 한순간 주저하며 망설였다.


아무리 베트콩이라지만 차마 어린 소녀를 사살할 수가 없었다. 그 찰나에 어느덧 눈 앞까지 다가온 여자 베트콩, 청룡은 풀숲에서 그대로 불쑥 일어나 총을 겨누었다. 놀란 여자 베트콩은 오던 길을 돌아서 죽으라고 도망하기 시작했다. 적을 사살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거늘 그러나 달아나는 그 뒷모습에 차마 총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청룡은 오로지 여자 베트콩이 무사하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허공을 향하여 위협사격만 하고 있었다. 과연 평화를 사랑하는 배달의 아들이었고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인지 아는 대한의 청룡이었다.


공략전을 벌이던 어느 날, 공격목표를 점령한 후 청룡들이 대나무 숲에 가려진 동굴을 수색하면서, 베트콩의 가족인듯한 한 여인을 발견한다. 그 여인은 막 아기를 출산하려는 다급한 순간이었다. 우리네 청룡들은 전투 속에서도 판초를 바닥에 깔고 위생병은 아이를 받아내었다. 그리고는 산모를 위하여 시레이션과 쌀을 제공하였다. 마냥 한국군이 무서운줄로만 알았던 그녀였다. 그러나 막상 우리네 청룡들의 따뜻한 호의에 비로소 안심하는 여인, 문득 그녀는 사흘만 아기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베트콩인 그녀의 남편을 귀순시켜 데리고 오겠다는 것이다. 생각지 않은 뜻밖의 그녀의 요청에 청룡은 반신반의, 더욱이 갓난아기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포로 아닌 포로의 요청, 그러나 청룡은 기꺼이 그녀의 말을 믿고 들어주었다. 사흘 후, 마침내 그녀는 베트콩인 남편과 함께 과연 돌아왔다. 청룡의 숭고한 인간애는 이토록 적마저 감동시켰다. 아, 자랑스러운 이름이여, 그대 이름은 정녕 청룡이던가.


상하의 나라, 월남 땅, 그날도 청룡들이 논둑길을 따라 주간정찰을 하는 도중이었다. 맞은편에서 한무리의 피난민이 오고 있었다. 그들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고 한편으론 불안해 보였다. 그 중에서 한 아이가 목이 타는지 계속 칭얼대었고, 엄마인듯한 여인이 논둑 아래로 내려가더니 머리에 쓴 갓을 벗어 흙탕물을 뜨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청룡들은 저마다 달려가서 자기 수통의 물을 아이에게는 물론 피난민들에게도 골고루 마시게 하였다(그 당시 밀림에서의 물 한방울은 피 한방울만큼 소중한 것이었다). 또한 각자 지니고 있던 시레이션을 피난민들에게 조금식이나마 나누어 주었다, 까모옹, 까모옹... 그것은 진정 인간애였고 서로의 마음과 마음의 주고받음이었다.


청룡은 전투에만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라 대민지원 활동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청룡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의료봉사활동을 벌였고,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마을 아이들의 더부룩한 머리를 말쑥하게 깎아주었다. 총 대신 낫을 들고 주민들과 함께 벼베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 오로지 삼강오륜을 제1덕목으로 배우며 자란 우리네의 청룡들이었기에 마을 주민들을 진정 고국의 내 부모처럼, 내 형제처럼, 내 조카처럼 생각하는 그야말로 마음을 다한 봉사활동이었다. 참으로 청룡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자유와 평화를 지켜주는 든든한 아들이었고 오빠이며 삼촌이었다.


그러나 베트콩은 비열하게도 청룡의 대민지원사업을 악용하여 주민 속에 파고들면서 또다시 우리네 청룡들에게 많은 피해를 가한다. 벼베기를 하던 날, 청룡의 등 뒤로 농부로 가장한 베트콩의 무차별 사격이 있었다. 졸지에 숨져가는 우리네 청룡, 청룡, 청룡들... 숨져간 전우의 호주머니에는 고향에서 부쳐온 누이의 편지, 어머니의 편지가 차곡차곡 개어져 있었다. 아마도 청룡들은 그 편지 속에서 누이의 체온을, 어머니의 체온을 느꼈으리라. 그리고 외로움과 그리움을 달래었으리라.


그 하루 유난히도 무덥던 날, 태권도를 가르쳐 달라는 지역주민의 요청에 못 이겨 마을로 들어간 청룡, 그러나 해가 지고 밤이 되어도 그 전우는 본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불길한 예감 속에 청룡 대원들이 총동원되어 밤새도록 찾은 끝에, 동틀 무렵 동네 어귀 높은 곳에 둥그러니 걸려 있는 아, 내 전우의 얼굴... 그 끔찍했던 모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아, 전우여 살아서 같이 돌아가자고 굳게 손잡고 언약하지 않았던가. 왜 그 언약을 지키지 않고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길을 무엇이 좋다고 먼저 가시는가.


우리나라와 같이 구정을 가장 큰 명절로 여기는 이 나라, 그래서 청룡들은 피아간에 전투를 하지 않기로 한 구정 휴전약속을 더욱 굳게 믿었다. 그날 밤, 마을 주민들은 구정의 축제로 인하여 밤이 늦도록 징을 치며 꽹과리를 울렸다. 아, 그러나 그들은 마을 주민이 아니었다. 요란한 징소리도 결코 구정을 즐기는 축제소리가  아니었다. 양민으로 가장한 베트콩들이 마을로 내려와 공격을 앞두고, 청룡들의 죽음을 예고하는 무서운 전주곡이었던 것이다. 구정이라기에, 휴전이라기에, 양민을 믿었기에, 약속을 믿었기에... 아, 그 믿음의 댓가가 이렇게 큰 희생으로 돌아올 줄이야 차마 몰랐다. 통분의 그날, 참으로 청룡들은 많이도 죽어갔다. 한 사람 한 사람 헤아림이 어찌 죄스럽지 않으리요. 낯설고 물설은 이역만리 하늘아래서 그렇게 청룡들은 숨져갔다.


백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무리한 명령 속에서, 청룡의 대민지원활동은 차라리 적을 마주하며 치르는 전투보다 더욱 두렵고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악조건과 희생 속에서도 청룡의 대민지원활동은 중단 없이 성공적으로 마치게 된다. 전쟁에서는 한없이 무서운 청룡, 그러나 주민들에게는 더 없이 순했던 청룡임을 비로소 느끼는 주민이었다. 그것은 우리네 청룡들이 최선을 다했고 마음을 다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정들자 이별이라던가. 전장을 개척하는 청룡의 속성상, 또 다른 전선으로 떠나갈 때가 된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된 주민들은 청룡의 이동을 결사적으로 말리는 이동반대시위를 벌이면서 한사코 계속적인 주둔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에 의하여 떠나야만 하는 청룡들... 주민들은 마지막으로 그들의 아쉬움과 고마운 마음을 한문으로 표현한다. 吾人永不忘靑龍之功, 無敵大韓海兵隊萬歲, 그것은 청룡의 정성어린 대민활동에 대한 주민들의 진정어린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것은 청룡들의 거짓 없는 진실에 대한 그들 또한 가식없는 신뢰로 답한 것이었다. 기억하라 해병들이여, 우리들은 영원히 청룡들의 공을 잊지 않는다고 진정으로 칭송하는 월남양민들이 있었음을... 자랑스러워하라 해병들이여, 무적 대한해병대의 만세를 진정으로 기원하는 월남양민들이 있었음을...


출처 : http://blog.chosun.com/chikookp/4118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