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 아리랑(6) - 신의와 배신(下)
우리네 파월 용사들을 향한 반국가적이요, 반민족적 독설... 그것은 국가에 대한 반역행위요, 민족에 대한 배신행위였다. 그러나 치밀한 사전적 계획과 비열한 선제공격으로 포문을 열면서 그네들의 가증스러운 주장은, 그 당시 한창 인터넷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던 신세대들을 향하여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특히 아직까지 비판의식이 익숙치 못하던 청소년들에게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대로 파고들었다. 예상치 않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해 하던 파월용사들은 사후 진화에 나서보지만 인터넷상으로 거침없이 타들어가고 있는 거짓의 불길을 끄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왜곡된 역사, 호도된 진실 앞에 파월용사들의 명예는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살고 있다는 게 죄인 것인가, 이제 머나먼 땅 구천을 헤매는 전우들에게는 산 자로서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더 이상 그들을 볼 면목이 없다. 아, 전우여 산 자를 용서하라. 한 순간 파월 용사들의 눈에 이 나라 국민들이 왜 이리 낯선 사람들로 느껴지는가. 지난 날, 우리를 뜨겁게 환영하던, 그리고 칭찬을 아끼지 않던 그 국민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가.
끓어오르는 분노, 밀려오는 자괴감,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배신감... 똑같은 이 나라의 국민이건만, 누구는 국가의 명령으로 전사가 되어 머나먼 땅, 죽음의 땅으로 달려가 목숨을 바쳐 싸워야 했고, 누구는 국가의 풍요로움 속에 공부를 하고 식자가 되어 이렇게 내 나라 내 형제들에게 비난을 가하며 공격하고 있는 것인가. 마음껏 공부하는 분위기, 그 풍요로움을 누가 가져다 준 것인가. 그 풍요로움 속에 파월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이 배어 있음을 생각해 보았는가.
배은망덕도 유분수이며 참으로 파렴치한 작태에 공분을 금할 수 없다. 정작 총부리를 맞대며 싸웠던 지난날 전쟁의 당사자인 베트남조차도 서로가 유감이었던 과거지사를 잊어버리고 오로지 미래를 지향하며 친선우호로 나아가자고 마냥 다짐하거늘, 하물며 한 민족의 피를 나눈 형제가 되어 이렇게 같은 형제에게 적개심을 품고 파월 용사들을 능욕할 수 있는 것인가. 정상적인 인격으로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너무도 후안무치한 그들의 우행에 참으로 치욕스럽기만 하다.
지난날 베트콩이 양민으로 가장하여 파월용사들을 공격하는 것이나, 작금의 이네들이 인권으로 위장하여 파월용사들을 모독하는 양상이 어찌도 이처럼 같은 행태인가. 그나마 다른 점이 있다면 베트콩들은 자민족을 위하여 타민족을 공격하였다면, 이네들은 타민족을 위하여 자민족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그 위선적인 주제넘음이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그네들의 이러한 가공할 작태는 베트남 양민의 인권을 위한다는 것은 단지 수단일 뿐, 그 본래의 목적은 같은 동포인 바로 우리네 파월용사들의 명예를 무참히 짓밟는데 있다 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는 나라의 울타리인 국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며 나아가 이 나라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경거망동의 이적행위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그 시대의 정서를 모르는 젊은 기자를 꼭두각시로 내세워서, 맹인모상하듯 나무를 보고 전체를 결론짓는 무책임한 행위로 진실을 호도하는 모 언론은 과연 그 저의가 무엇인가. 또한 정도의 길을 걸어야 할 학문의 본분을 외면한 채, 모 언론의 억지주장에 곡학아세하여 역사를 왜곡시키는 모 식자의 태도는 과연 그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지식인의 탈을 쓰고 스스럼없이 저지르는 그네들의 우행에 한심함과 서글픔을 한없이 느낄 뿐이다. 문득 그네들의 정체성에 의구심이 뭉클뭉클 피어오른다.
용병설은 파월용사들을 한없이 초라한 자로 비하하였고, 학살설은 파월용사들을 한없이 잔인한 자로 매도하였다. 나아가 대내적으로는 민족정기를 마냥 흐리게 하였고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위상을 마냥 추락시켰다. 사상의 자유란 것이, 언론의 자유란 것이 이렇게 같은 민족의 가슴을 멍들게 하는 것일 줄은 차마 몰랐다. 그러나 그 자유에는 엄연히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뒤따르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네 젊은이들이 앞시대에 살지 않았음을 기화로 하여, 한사코 감상적인 말로 미혹시켜 가면서 파월용사들의 이미지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도록 부추기는 선동행위는, 기어이 국론의 분열을 획책시켰고 세대 간의 갈등을 조장하였으며 나아가 그만큼 국력을 약화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혹세무민으로 이 나라를 혼돈으로 몰고 가는 자... 정녕 그네들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불순세력의 사주를 받고 행동하는 하수인이 아닌가 도리어 묻고 싶다. 더하여 우리네 파월용사 가슴을 잔인하게 찔러대는 정신적 학살자도 아닌지 도리어 묻고 싶은 것이다.
한편, 혹자가 전개하는 지극히 감상적인 소위 껴안기 운동은 무엇을 전제로 한 것인가. 더 이상, 한 민족이요 한 형제인 파월용사들을 병주고 약주는 식으로 우롱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독선적인 억측과 각색으로 파월용사들의 명예를 한없이 비참하게 만들어 놓고는, 이제 와서 그 알량한 동정심으로 껴안으려는 발상 자체가 더없이 가증스러운 것이다. 진정 파월용사들을 껴안는 것이 진심에서 우러나는 것이라면 먼저 혹자로 인해 짓밟혀진 파월 용사들의 명예부터 원래대로 되살리고, 그런 연후에 비로소 그분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예우를 다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리고 껴안기 운동이라는 제목도 결코 바른 표현이 아니다. 누가 누구를 껴안는다는 말인가. 파월용사들은 우리들이 단순히 이재민 구제하듯 동정심으로 껴안을 대상이 아니다. 그분들은 이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고 민족을 위하여 헌신한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유공자인 것이다. 이 나라가 영원하고 이 민족이 영원한 이상, 파월용사들의 공적 또한 영원불멸하는 것이다. 그분들은 오로지 우리들이 언제나 마음 속 깊이 존경심으로 두 손 모아 받들어 섬겨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껴안기 운동의 취지가 정녕 진실된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라면. 그 밑바탕에 깔린 기본적인 정신자세부터 우선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정작 껴안기 운동이란, 혹자가 지나간 잘못을 반성하고 용서를 빌 때 오히려 파월 용사들이 내 민족 내 형제를 사랑하는 연장선에서 바로 혹자에게 취할 행동이다. 어찌하여 애꿎은 파월 용사들을 용병도 모자라서 학살자로 만들어놓고 혹자는 그렇게도 죄의식 하나 없이 천사의 흉내를 내려고 하는가. 이제 더 이상, 불필요한 논쟁, 부질없는 소모전으로 국력을 낭비할 수 없다. 혹자는 하루속히 소아병적 유치한 사고와 자기모순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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