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일기/해병278기 김성동

청룡 아리랑(8) - 구국의 행진(下)

머린코341(mc341) 2015. 10. 24. 01:06

청룡 아리랑(8) - 구국의 행진(下)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종으로 예속되어 있었다. 이에 모세는 자기네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을 감행한다. 그러나 그들의 앞에는 커다란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다. 저 바다를 건너야만 비로소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거늘, 저 바다를 건너야만 비로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갈 수 있거늘... 흉용하는 파도, 추격해 오는 애굽군대, 그 진퇴유곡의 상황에서 모세는 지팡이를 들어 바다를 갈랐다. 그리고는 모두 그 바다를 건너갔다.


지난날의 우리네 대한민국이 걸어온 길, 생각해보면 반만년을 농업 국가로 살아오면서 그나마 일제의 치하에 짓밟히고, 6.25전쟁으로 찢겨진 이 나라의 이 민족은 기나긴 세월 오로지 가난을 숙명적으로 여겨왔다. 도도히 흘러가는 가난의 강물, 저 강물을 건너야만 비로소 희망과 번영의 땅으로 나아갈 수 있거늘, 그리고 실질적인 주권국가가 당당히 될 수 있거늘... 그러나 자본도 자원도 기술도 그 아무것도 없는 이 나라에 대하여 가난의 강은 무정하게도 길을 막는다. 그리고는 이 민족에 대하여 강을 건너가는 조건으로  죽음을 요구하였다. 과연 이대로 주저앉아야만 하는가. 어떻게 해서라도 건너야 할 강이었고, 언젠가는 건너가야만 할 강이었고 누군가는 꼭 건너야할 강이었다.


이러한 절박한 심정에서 마침내 꽃다운 우리네 배달의 아들들이 목숨을 걸었다. 기꺼이 죽음이 도사리는 그 강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인간가교를 쌓기 시작했다. 연인원 32만명, 무려 10여년에 걸쳐 만든 대장정, 그로 인해 우리네 배달의 아들들은 전사 5000여명, 전상 16000여명으로 고귀한 희생을 치루었다. 그 희생의 댓가 속에, 대한민국은 한 많은 가난의 강을 비로소 건너갔던 것이다. 실로 모세의 기적을 대신하여 파월용사들이 온몸을 바친 것이다.


월남 파병 환송식에서 이광재 아나운서는 “국가의 명예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보무도 당당히 행진하는 저 늠름하고 자랑스러운 대한 건아들의 모습을 보라” 며 마침내 주체할 수 없는 감격 속에 흐느끼는 음성으로 중계방송을 하였다. 가난한 나라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죄인 것인가, 그러나 조국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죽음의 땅으로 의연하게 향해 가는 파월의 용사들... 그 비통함, 그 의연함, 그 충성심, 그것은 정녕 민족웅비의 한판 승부사를 건 비장하고도 찬란한 행진이었다. 과연 파월용사들의 충정어린 희생은 지난날 한국 전쟁 때 우방에 대한 빚을 일거에 갚는 것이 되었고, 또한 경제발전과 자주국방의 튼튼한 초석이 되어 주었으니, 어찌 세월이 간다고 그 빛나는 업적을 잊을 수가 있으랴.


미국의 파병요청에 한국의 요구사항을 따른다는 브라운 각서... 그것은 파월 용사들의 피를 대신하는 희생의 댓가였다. 이 각서에 따르면, 미국은 월남 파병에 따른 장비와 각종 경비를 한국군에 제공하고, 파월 장병들의 급여도 지불하며 주월 한국군의 구매하는 물건도 최대한 국내(한국)에서 조달해야 한다. 주월 미군과 월남군은 미국 국제 개발처(AID)가 월남에서 실시하는 농촌건설 등의 사업에 필요한 물품을 한국에서 많이 구매하며, 한국의 수출진흥을 위한 기술원조를 강화한다 등등으로 되어 있다. 이 후로 우리나라는 월남파병으로 인하여 신의를 아는 나라, 빚을 갚는 나라로 각인되면서 국제적인 신인도는 높아만 갔다. 그동안 돈 빌려주기를 외면하던 선진국들이었건만, 이제는 한국에게 서로 돈을 빌려주려고 하였다.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외자도입액만도 33억 달러에 달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월남전 참전 9년 동안 미국으로부터 받는 해외근무 수당 중 5분의 4를 차지하는 2억여달러가 국내로 송금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 국내 총 외화획득에 20%를 차지했다. 월남전 참전대가로 얻은 월남특수로 수출과 군납, 용역 및 건설로 민간 파월 기술자가 국내로 송금한 간접수입액이 무려 7억여 달러로서 국내 총 외화획득의 80%를 차지했다. 이것은 한국군이 월남 8개 항만 가운데 5개 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월남의 주요공사는 주로 한국이 도맡다시피 한 결과였다.


하역과 운수 분야에 진출한 한진상사는 67년 월남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회사라고 뽑혔다. 한진의 이 해 용역실적은 2천5백만 달러로서 다른 모든 회사들의 용역을 합쳐 놓은 것보다도 많았다. 이와 같이 돈을 번 한진은 장차 대한항공을 인수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건설 또한 월남특수를 토대로 베트남에 진출, 세탁업과 준설공사를 벌였다. 그 당시 현대건설은 일본에서 준설선을 한 대 사들이고 부산과 인천에서 기능공들을 모집, 캄란항 미군기지 건설의 준설공사에 투입했다. 외국회사들이 완공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난 위험한 지역을 맡아 공기 이전에 끝냄으로써 미군 측의 신뢰를 얻은 현대는 메콩강 오지의 빈롱항 준설공사, 미토항과 붕타우항만 준설공사도 따내면서 경험과 기술을 축적, 오늘날 세계적인 유수의 기업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한국의 월남파병으로 미국과는 최고수준의 외교관계가 수립되면서 대미수출액도 급증했다. 1964년에 3천6백만 달러이던 것이 1973년도에는 무려 10억2천120달러로 28배나 되었기 때문이다. 외환보유액도 1964년도에는 겨우 1억2천8백만이던 것이 1978년도에는 무려 40배에 해당하는 49억 4천만 달러로 급증했다.

한국의 1인당 GNP는 1964년 103달러로서 북한보다 적었던 것이 1975년에는 북한의 1.4배, 박대통령께서 서거한 1979년에는 무려 12.8배로 북한을 능가하면서 연평균 12%의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경제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월남파병으로 기인한 경제적 이득은 적어도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되며, 이는 그동안 일본과의 14년간의 교섭 끝에 1966년 6월 3일 얻어낸 대일청구권자금, 즉 무상원조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도합 8억 달러에 비교하면 엄청난 금액인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에서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경부고속도로, 발전소, 제철공장 등 대규모 인프라를 구축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학교를 세워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했다. 국제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은 언제나 한국이 독차지했다. 대한민국은 어느새 세계최고 실력의 기능공의 나라가 되어 있었다.


월남전은 엄청난 인명손실도 자아냈지만, 한편으로는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면서 월남파병의 특혜 속에 진출한 한국인들과 한국기업은 국제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했다. 실전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이런 자신감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1970년도의 한국인들은 중동건설 시장 등 세계로 뻗어나가 민족의 활동공간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이다. 정녕 월남체험은 한국남성들에게 최초의 집단적 국제화 경험이었다. 


월남파병은 우리네 과거의 중국, 일본, 미군정의 지배 속에 자신도 모르게 잠재하던 열등의식, 피지배 의식을 박차게 해주었고, 스스로의 자질에 눈뜨고 자부심을 가지게 해준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 현대사에 신기원을 이룩한 정신적으로 획기적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실로 월남파병은 가난에 허덕이는 이 나라를 번영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그 주인공인 파월용사들은 조국을 위해 젊음을 바친 구국의 아들로서 정녕 이 나라의 경제부흥과 조국근대화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계속)


출처 : http://blog.chosun.com/chikookp/4118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