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將軍들의 전쟁] #28. “청와대 입김에 구애받지 않겠다” 육참총장, 설화로 옷 벗어
MB 정권 시절 황의돈 총장, 권력에 찍혀 불명예 전역
2010년 천안함 사건 여파로 청와대에 신설된 대통령 안보특보는 사실 역할이 불분명했다. 기껏해야 위기관리센터 업무를 관장하며 대통령에게 월 1회 정례보고를 하는 것이 눈에 띄는 전부였다. 정부 외교안보 정책 결정에 개입하거나 발언권을 행사할 여지 자체가 없었다. 6월에 이 자리가 신설돼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인 이희원 예비역 육군대장이 임명된 배경에는 경북 상주 출신인 류우익 전 대통령실장, 김종태 전 기무사령관과 동향이라는 지역 논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청와대에서 외교안보 실세로 알려진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은 이 특보가 부임할 무렵 언론에 “안보특보는 외교안보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자리가 아니다”라며 견제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청와대는 안보특보에게 사무실 운영비도 지원하지 않아 합동참모본부(합참)에서 매월 안보특보실 운영비 100만원을 상납하는 기형적 행태가 빚어졌다. 게다가 합참 장교가 안보특보의 실무를 지원하는 이상한 구조였다. 그런 이 특보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이명박 대통령이 2010년 12월16일 청와대에서 김상기 육군참모총장의 보직신고를 받고 삼정도에 수치를 달아주고 있다. 오른쪽은 이홍기 3군사령관으로 두 사람 모두 TK 출신이다. ⓒ 연합뉴스
예전에 검증된 사안 다시 들춰 총장 옷 벗겨
정권 실세의 후원을 받은 이희원 특보는 경질된 김태영 국방부장관에 이은 국방부장관 ‘0순위’나 다름없었다. 연평도 포격 사건이 벌어진 지 나흘째 되던 11월26일, 이명박 대통령은 전사한 고(故)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의 빈소가 마련된 성남 국군수도병원으로 가고 있었다.
이동 중에 이 대통령은 YTN을 통해 차기 국방부장관으로 “이희원 특보 유력”이라는 뉴스를 접했다. 자신이 아직 재가하지도 않은 국방부장관 인사가 보도되는 데 대해 이 대통령은 적잖이 언짢은 기분을 느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문을 마치고 돌아온 이 대통령은 언론이 온통 이 특보를 거론하는 데 대해 “도대체 내가 모르는 국방부장관 인선을 누가 언론에 발표했느냐”며 참모들을 심하게 질책했다.
이 특보에 대한 자체 예비청문회를 진행하던 정진석 청와대 정무수석은 “연평도 포격 사건 당시 ‘확전 방지’ 논란에 연루된 이 특보는 국방부장관으로서 부적격하다”는 의견을 이 대통령에게 개진했다. 이 말에 이 대통령은 “내가 직접 사람을 검증하겠다”며 이 특보에 이어 2순위로 추천된 김관진 전 합참의장을 “당장 청와대로 부르라”고 지시했다. 이날 이 대통령은 김 전 의장을 불러 장시간 면담했다.
김관진 후보에 대한 청와대의 예비청문회를 대통령이 직접 한 셈이다. 당시 청와대 핵심 관계자에 의하면 “거의 3시간 만에 김 후보자가 대통령을 만나고 나오면서 전적으로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고 이날 분위기를 전했다. 이날 저녁 언론은 김관진 후보자가 장관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속보로 긴급 타전했다. 이튿날 김관진에 대한 국방부장관 인사청문회 요청서가 발송되었다.
남북한 간에 지상포에 의한 교전이라는 전대미문의 안보 위기를 겪은 이명박 정부는 북한에 대해 강경한 군사정책을 표방하는 새로운 국방부장관을 발탁해 위기 당시 조성된 혼란을 일소하고 군사 대비 태세를 재정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호남 출신인 김관진 장관의 등용은 군내에 화합과 통합을 도모하는 파격적 인사로 비치기도 했다.
김 장관은 취임하자마자 “당분간 대장 인사는 없다”며 장관 교체로 인한 군 내부의 동요를 진정시키고 전투 준비에 전념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호남 장관 부임으로 예기치 않게 영남 군맥 형성에 적신호가 켜졌다고 인식한 정권은 후속 장군 인사를 강력히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명분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해 12월 초만 하더라도 강원도 출신으로 부임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은 황의돈 육군참모총장이 전격 경질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12월9일 조선일보가 갑자기 황 총장이 8년 전 용산 삼각지에 있는 한 빌딩을 매입했던 사실을 들춰내며 ‘부동산 투기를 한 총장 재산 형성 과정의 의혹’을 보도했다. 이미 오래전에 검증이 끝난 사안을 새삼스럽게 보도하면서 조선일보 고위 관계자들은 “우리는 대장 하나쯤은 너끈히 날릴 수 있다”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 주변을 놀라게 했다.
황의돈 육군참모총장이 2010년 7월22일 국제평화지원단에서 열린 동명부대 7진 환송식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3군 총장 모두 영남 출신으로 채워져
12월13일 저녁 8시30분. 시내 모처의 국방부장관 공관에 황의돈 총장이 들어왔다. 무거운 표정의 황 총장은 김 장관을 면담하면서 용퇴할 의사를 밝히고 담담하게 전역지원서를 제출했다. 12월 초 연말 정기인사에서 “대장급 인사는 없다”고 공언했던 김 장관도 체념한 듯 황 총장의 전역지원서를 접수했다. 조선일보의 보도는 바로 ‘청와대의 뜻’이었다.
그로부터 20분이 지난 8시50분. 이번에는 충청도 출신인 한민구 합참의장이 공관으로 들어왔다. 한 의장은 이미 김 장관이 부임할 무렵에 사의를 표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장 인사는 총장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김 장관은 “청와대에서 합참의장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으니 계속 근무하라”며 힘을 실어주었다. 대화를 마치고 한 의장이 공관을 나설 무렵 시각은 저녁 9시30분을 막 넘어서고 있었다. 아무래도 연평도 포격 사건의 책임이라면 한 의장이 경질되는 것이 마땅했으나, 전임 이상의 의장이 천안함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물러난 지 불과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또 합참의장을 교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14일부터 언론은 “황 총장의 사의를 청와대가 수용했다”는 보도를 내보내기 시작한다. 이어 청와대는 이 대통령의 동지상고 후배인 김상기 3군사령관을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시킨다고 발표했다. 역시 이 대통령 고향 후배인 박종헌 공군참모총장과 김해 출신인 김성찬 해군참모총장과 더불어 육·해·공군 참모총장이 모두 영남으로 채워진 셈이다.
이는 문민 정부가 들어선 김영삼 정부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총장 인사는 15일부터 예정된 군 장성 정기 진급 인사에 대한 국방부 제청 심사를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당연히 정권의 의도에 따라 장성 진급자에 파란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 탓에 군 전체가 술렁거렸다.
황의돈 참모총장의 전격 경질은 날조와 음해로 군을 길들이는 후진 독재 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정치권력의 횡포였다. 여기에는 육군총장에 대한 청와대의 불편한 심기가 작용했다. 2010년 6월 총장으로 부임하고 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 황 총장은 육군본부 측근에게 “앞으로 나는 청와대 실세 누구의 입김에 구애받지 않고 인사를 하겠다”는 말을 한 게 화근이 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필자가 접촉한 상당수의 육군 관계자들은 “황 총장이 그런 말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며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이 말은 뒤이어 “황 총장을 한번 손보겠다”는 청와대의 역풍을 불러온 설화(舌禍)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황 총장은 한 가지 군 인사 개혁 방안에 몰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 총장 측에 의하면, 북한군은 봄과 여름에 군인들을 영농에 투입해야 하기 때문에 중요한 군사훈련을 주로 겨울에 한다. ‘동계 훈련’을 주축으로 하는 북한군을 마주하는 우리 군은 특히 겨울에 많은 위협에 직면한다. 그런데 우리 군은 주로 연말에, 즉 겨울에 진급과 보직 이동이 활발하다. 결국 북한으로부터 위협이 가장 농후한 시기가 우리 군에는 취약 시기가 된다는 점에서, 황 총장은 겨울에 진급이 되더라도 실제 보직 이동은 몇 개월 후에 하는 방향으로 조정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관진 국방부장관이 취임 이틀째인 2010년 12월5일 서부전선 초소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 연합뉴스
‘상주 군맥’ 등 TK 출신들이 득세
이러한 진급과 보직의 시기 조정은 많은 장교에게 반발과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빌미로 인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총장을 공격하고, 총장 관련 사실을 상부에 유포시키는 등 육군 내부의 불만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황 총장 경질로 인한 혼란의 아수라장은 그 다음 순간 분노로 바뀌었다. 대다수 군 관계자들은 황 총장의 자격 여부를 떠나, 언론을 통해 명예를 짓밟고 군복을 벗게 만드는 그 방법의 치졸함에 경악했다. 당시 한 장교는 필자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천안함 사건 이후 지난 9개월 동안 집에 들어간 날이 거의 없다.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군이 욕만 바가지로 먹는 데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도 견디기 힘든데, 이제는 이런 식으로 군을 짓밟는 데 대해 허탈감까지 느낀다. 이렇게 총장을 자를 거라면 애초 임명은 왜 했나. 당시에는 이런 문제가 없었나. 대다수 군인들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를 짐작하고 있다. 무언가 사심으로 가득 찬 세력의 불순한 장난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육군참모총장은 임충빈(18개월), 한민구(9개월), 황의돈(6개월) 등 군 인사법에서 정한 2년 임기를 채운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대장 인사가 자주 발생하니까 연쇄적으로 각 군 사령관들도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연이어 교체됐다. 전부가 ‘하다가 말고’ 나가는 사람들뿐이었다. 정권 입장에서 굳이 황 총장이 성에 차지 않는다면, 2011년 정기인사를 통해 교체해도 될 터였다. 그런데 연평도 사건으로 군이 어려운 때에 총장을 교체해야만 하는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인 것은 총장을 교체함으로써 군 장성 진급 인사를 정권의 의도대로 하겠다는 것 외에 다른 해석의 여지를 찾기 어려웠다.
후임 3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이홍기 대장 역시 이명박 정부의 실세 군맥인 경북 상주·김천 출신이다. 여기에다 군 인사정책의 핵심이었던 김용기 인사복지실장, 김명식 청와대 인사비서관도 같은 상주 출신이었다. “야전형을 우대한다”는 이상야릇한 말로 군 인사의 숨겨진 내막을 포장하는 동안 우리 군은 어느새 줄 서기와 특정 지역 편중이라는 암적 병폐에 감염돼가고 있었다.
청와대의 군 인사 개입은 노무현의 유산
청와대의 군 인사 장악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뿌려진 잘못된 씨앗이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맺은 결실이었다. 노 대통령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군 인사의 영호남 할당 비율을 제시하는 등 인사에 직접 개입할 조짐을 보이자 남재준 육군총장이 반발하면서 큰 갈등을 빚은 바 있다. 이후 김장수 총장 시절에는 최초로 ‘복수 추천’으로 청와대가 관심 인물에 대해 직접 검증하는 관행이 최초로 생겼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아예 청와대가 장군 진급 부적격자 명단을 만들어 검증을 시도했다. 이 무렵의 군 인사를 보면, 각 군의 진급심사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한 장성들이 진급이 유력한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네가 진급추천은 되었으나 청와대에서 뒤집힐지 모른다. 청와대에 줄이 있거든 지금부터 잡으라”고 노골적으로 정보를 알려주고 권력에 로비할 것을 권유했다. 이렇게 각 군이 청와대와 진급 예정자 명단을 교류하는 동안 국방부장관은 이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제청 절차를 거치는 과정에서 알게 되지만, 이미 청와대의 보이지 않은 손이 진급에 영향을 미치고 난 다음이었다.
평소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묵묵히 일해온 많은 장교는 좌절감에 젖었다. 특히 호남 장교들에게는 그 피해의식이 더 가중되었다. 이런 가운데 군의 지휘체계 역시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었다. 연평도 포격 사건 당시 전투기로 북한의 도발을 응징하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한 청와대는 각 군의 협조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육·해·공군의 노력을 단일한 군사 목적에 통합하는 능력, 즉 ‘합동성(Jointness)’이 결여돼 있어 이를 보완하는 국방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국방 개혁에 관해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는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위원장 이상우)와 안보총괄점검회의는 김관진 국방부장관에게 군 지휘 구조 개혁을 주문하고, 김 장관은 과거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 가져온, 육·해·공군을 통합하는 ‘통합군의 꿈’으로 한 단계 다가가기 위한 전 단계로 군 지휘 구조를 개편하겠다고 했다.
그 핵심은 합참의장이 각 군 총장을 작전지휘하고, 총장은 자기 군에 대한 군정(인사·군수)뿐만 아니라 군령(정보·작전)까지 행사하는 것으로 군 상부 구조가 개편되는 것이었다. 각 군이 자기 군 조직의 속성에 따라 제각기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 노력을 한반도 전구(戰區) 작전의 목적에 집중시키는 이 개혁은 일견 합리성이 있어 보였다. 군정과 군령이 단일한 지휘 계선으로 통합되고 각 군의 작전지휘가 일관성을 갖추는 한국군 대개혁의 출발점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권력이 군을 정치적으로 길들이면서 사심에 가득 찬 인사를 하는 정치군대를 조장할 수 있는 위험한 개혁이기도 했다. 또한 육군이 해군과 공군을 지배하는 통합군으로 가기 위한 전단계의 개혁이라는 권력의 관점으로 볼 때, 이 개혁은 개악에 가까웠다. 이로 인해 이명박 정부 말기, 군 전체를 극심한 혼란으로 몰고 가는 재앙이 일어날 조짐이 일었다.
[시사저널] 201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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