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將軍들의 전쟁] #25. 함장이 폭발 충격으로 실신한 그 시간, 합참의장은 술취해 실신했다
천안함 침몰 때 합참 기능 마비…육·해·공 합동성 논란 현실화
봄기운이 완연한 2010년 3월26일. 대전시 유성구 자운대 육군 교육사령부에 모처럼 활기가 돌았다. 교육사 대강당에 별들이 모여든 시각은 오후 1시. 합참이 사상 최초로 개최한다는 전군 ‘합동성 대토론회’가 열리는 시각이다. 대통령 직속의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 이상우 위원장과 이상의 합참의장, 한민구 육군참모총장, 김성찬 해군참모총장, 이계훈 공군참모총장, 미 합동전력사령부(JFCOM)의 케이츠 후버 부사령관, 그 밖에 연합사·합참 관계자 등 150여 명이 모였다.
먼저 각 군의 조직 이기주의를 척결하고 범군 차원에서 전쟁기획과 작전 수행, 국방의 효율화라는 합동성을 증진하자는 육사 18기 출신 권태영 박사의 기조발제가 있었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개혁과 혁신을 외치는 권 박사는 군에서 후배들이 자신을 “진보 사상을 가진 군사 전문가 아니냐”는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괴로웠다. 그러나 이날 그는 작심하고 한국군의 적폐를 척결하자는 주장을 용기 있게 펼쳐나갔다. 한국군은 변혁의 중간 산물에 불과한 미군의 새로운 개념과 제도를 무분별하게 수입했다. 한국 실정에 맞지도 않는 미군 제도를 서둘러 모방하다가 소화불량에 걸리고, 그 결과 군은 자주적 방위 의지와 개혁의 추진 동력이 소진되면서 이제는 개혁 실패를 당연시하고 피곤증이 만연되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천안함 함미 인양 작업이 진행된 2010년 4월15일 백령도 해상에서 함미가 크레인에 의해 올려져 바지선에 실려 있다. ⓒ 연합뉴스
“합동성은 결국 군을 ‘물오리’로 만들 것”
그런데 문제는 권 박사의 그 다음 주장이었다. “합동군의 주인을 확실히 세우기 위해 합참의장이 관리하는 합동직위(JSO)를 각 군 본부와 작전사로 대폭 확대하되, 합참의장에게 진급 선발권과 주요 직위 보직권을 부여하는 방법을 고려하자. 프랑스의 경우 합참이 장군 진급 선발권을 행사한다.” 이에 해군과 공군 총장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권 박사의 주장을 자신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전력 소요 검증도 합참이 하고, 진급과 보직에 대한 권한도 일부 가져간다면 각 군의 최고 지휘관이요, 전문가라는 총장들은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되는 셈이다. 이어지는 시간에 자유토론이 벌어지자 김성찬 해군총장이 이 점을 명확히 했다. “군의 전문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물에서는 상어처럼 싸우고, 땅에서는 호랑이처럼, 공중에서는 독수리처럼 싸우는 군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합참이 모든 걸 다 가져가면 물오리가 된다. 물오리는 물에서 헤엄치며 땅 위에서는 걷고 공중으로 날기도 한다. 그래봤자 오리 아닌가?”
여기서 육군과 해·공군 간의 해묵은 불신과 갈등이 다시 불거진다. 육군은 자신들의 전문성만 전문성이고, 해·공군의 전문성은 전문성이 아니라고 본다. 이상희 전 국방부장관은 각 군 본부에 설치된 전투발전단을 폐지하고, 그 기능을 모두 합쳐 합참의 전력발전본부에서 수행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해·공군의 입장에서는, 결국 말이 국방 개혁이지 합참의장이 사심을 갖고 자신의 파벌이나 만들면서 각 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권력 의지’가 그 본심 아니냐며 불신한다. 1990년 합참이 발족하고 난 이후부터 시작된 육군의 아주 ‘오래된 음모’를 이제껏 해군과 공군은 국민 여론에 호소하며 분쇄해왔다. 그럴수록 육군은 육군대로 더 집요하게 그 의도를 드러내며 지배 의지를 보였다.
이날 토론회를 실무적으로 준비한 주체는 합참 전력발전본부장이었던 박정이 중장이었다. 한 번의 토론으로 의견 정리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아는 박 본부장은 토론 이후 예정된 육·해·공군과 한미연합사 3성 장군 이상 직위자들이 참석하는 별도의 만찬과 이튿날 토요일에 각 군 주요 직위자들과의 골프 회동도 준비하고 있었다. 계룡호텔에서의 만찬은 저녁 8시20분에 마무리되었다. 이상의 합참의장은 입구에 서서 나오는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기념품을 나눠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서울에 올라오지 않고 현장에 남아 후버 부사령관을 영접하고 다음 날 골프 회동까지 마무리하고 올라와야 할 박 본부장은 서울로 올라가고, 그 대신 김기수 합참 전략기획본부장이 남기로 임무가 변경되었다. 이날 두 사람의 우연한 임무 교대는 이후 두 사람의 운명을 정반대로 바꿔놓게 된다. 이날 서해에서 한국전쟁 이후 가장 끔찍한 사건이 벌어질 때, 합참에 누가 있었고 없었는가가 이후 인사에서 영전과 좌천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짧은 만찬 이후에 합참과 연합사 장성들이 헬기를 타고 서울로 이동한 데 반해, 어쩐 일인지 이상의 합참의장은 고속철도로 뒤늦게 이동하기로 계획하고 서대전역으로 향했다. KTX를 타기까지 약 50분 정도의 시간 여유가 있었는데, 바로 이 순간이 이 의장에게는 또 한 번 운명을 가르는 시간이 된다. 그는 서대전역 인근의 한 식당에서 지인을 만나 또 한잔을 했다. 이 한잔은 한국군이 가장 긴박했던 순간에 군사 지휘부를 마비시키는 독배가 되고 말았다.
이 시간, 천안함은 경비구역인 백령도 서방에서 최저 속도로 기동하고 있었다. 밤 9시22분. 무언가 수중에서 큰 충격의 파장이 천안함의 정중앙을 예리하게 갈랐다. 그 충격으로 함장실에서 전술지휘통제시스템을 통해 다음 날 작전을 구상하던 최원일 함장은 큰 폭발음과 함께 충격을 받아 몸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천안함이 두 동강 나던 바로 그 시각에 이 의장은 KTX에 몸을 실었다. 최 함장이 충격으로 정신을 잃는 그 순간에 이 의장은 음주로 의식을 잃었다. 이후 이 의장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서해에서 우리 함정이 침몰하고 있다”는 합참 지휘통제실장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전화가 오지 않아서 못 받은 것이 아니고, 전화가 왔지만 받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긴박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던 상황에서 해상과 지상에서는 미묘한 군사적 반응들이 있었다. 적어도 이 순간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은 불가능했다. 오직 동물적인 감각과 직관에 의한 상황 통제라는 긴박한 요구가 우선시되었다. 합참의장은 기차에서 내린 밤 10시11분쯤에야 군함이 침몰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합참이 청와대 위기상황실로 사건을 보고한 지 26분이 지난 시점이고, 청와대가 안보관계장관회의 소집을 결정한 지도 11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청와대가 이렇게 신속히 반응한 것은 합참의 한 해군 중령이 청와대의 해군 대령에게 “지금 지휘계통으로 초계함 침몰에 대한 보고가 되고 있으니 선배님도 확인하십시오”라고 전화로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늦은 저녁을 먹다가 전화를 받은 해군 대령이 숟가락을 놓고 상황실로 달려가 이 사실을 외교안보수석을 비롯한 청와대 주요 직위자들에게 전파했다. 이로 인해 김태영 국방부장관보다도 청와대가 먼저 조치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2010년 5월4일 이명박 대통령이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헤드테이블 왼쪽부터 이계훈 공군참모총장, 한민구 육군참모총장, 김태영 국방부장관, 이 대통령, 이상의 합참의장, 김성찬 해군참모총장, 황의돈 연합사 부사령관. ⓒ 연합뉴스
합참 작전 라인에 육군본부 출신 일색
여기서 이날 오후에 있었던 합동성 대토론회가 제기한 문제의 핵심, 즉 육군과 해군의 서로 다른 전문성이 작동했다. 해군 장교의 경우 “군함이 침몰한다”는 사실은 그 어떤 사태보다도 최고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군함은 해외에 나가서도 치외법권이 통하는 하나의 ‘영토’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영토가 침몰하는 상황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비상사태로 보고되어야 한다. 해군의 시스템은 상하 단계를 불문하고 군사 정보를 전 제대가 동시에 공유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신속한 상황 전파가 그 특징이다. 반면 육군은 어떤 불확실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상급자의 질문에 대비해 더 확인해보고 상부에 보고하는 문화다. 여기에다 군함이 침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이 떨어지는 그들은 과장이 부장에게, 부장이 본부장에게, 본부장이 의장에게 보고하는 단계를 거치면서 지체 현상이 발생한다. 더구나 2함대사령부로부터 합참에 올라온 보고는 ‘50퍼센트 침수되었다’ ‘60퍼센트 침수되었다’라는 상황 보고가 전부였다. 당시 등장한 단어는 ‘파공’과 ‘침수’뿐이었고, 어뢰 공격이라는 말은 없었다. 만약 당시 합참 작전 라인에 해군 장성이 있었다면, 어뢰 공격이라는 말이 없더라도 비상사태로 인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육군 일색인 합참의 조직문화는 어뢰 공격이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비상사태가 아닌 단순한 사고로 봤다. 바로 이런 전문성의 차이는 이날 토론회에서 김성찬 해군총장이 “합참은 물오리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 그대로 현실이 되고 말았다.
사건 당시 합참 작전 라인의 인적 구성을 보면, 이상의 합참의장과 황중선 합동작전본부장(중장), 김학주 작전참모부장(소장), 양철호 작전처장(준장), 박철희 합동작전과장(대령)으로 직위자 전원이 육사 출신 선후배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이 중에서 합참의 업무를 아는 경험자로는 황 본부장이 유일하고, 의장을 포함한 나머지는 합참에 처음 근무하는 순수 육군본부 출신들이었다. 물론 이들이 무능한 군인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군단과 사단 작전에 정통한 지상군 작전 전문가들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합참에는 합참 업무에 맞는 전문가 양성과 보직 관리의 원칙이 있다. 이런 원칙이 무시되고 합동 작전의 전문가들이 해당 직위에 보직되어 있지 못한 것은 결과적으로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노무현 정부 군 인맥에서 이명박 정부 군 인맥으로 대거 바뀐 것도 한 요인이었다. 실제 이 무렵 한민구 육군총장은 “과거 정부에서 작전의 요직에 근무했던 사람들에 대한 출처가 불분명한 인사 참고 자료를 읽어보면, 도저히 진급을 시킬 수 없는 부정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어 어떤 총장이라도 이들을 진급시키려면 상당한 심적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탄한 바 있다. 군 내부의 전문성이 전 정부 사람이냐, 현 정부 사람이냐는 줄 서기 문화, 파벌문화라는 정치논리로 인해 붕괴되고 있었다. 결국 개혁이란 건 없고 권력에 대한 인간의 의지와 탐욕이 공적인 가치와 군인의 책임성을 잠식하는 상황이었다.
경찰은 이날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인천해양경찰청에 갑호 비상령을, 전국 경찰에는 을호 비상령을 하달했다. 더 황당한 것은 당시 해외 출장 중이던 마잉주 타이완 총통이 천안함 사건을 보고받고 밤 11시쯤 화상회의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하고 즉시 전 타이완군에 비상령을 하달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 합참은 이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그 다음 날인 3월27일 새벽 3시30분에야 ‘군 대비 태세 강화’라는 가장 낮은 조치를 하달했다. 이 시간에도 이 의장은 의장실에서 취침을 하다가 새벽 5시가 넘어서야 이미 하달된 대비 태세 강화 지시에 사후 재가를 했다. 이후 천안함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국방부와 합참은 일종의 공황 상태를 겪게 된다. 모든 것이 혼란이었다.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 조사본부장인 윤종성 육군 소장은 “그 당시 국방부와 합참, 민군합조단은 극심한 혼란이었다”며 “그 모든 문제의 근원은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은 부적절한 인사에서 비롯되었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합참이 ‘제2의 육군본부’가 되어버린 데서 오는 재앙을 만난 셈이다. 이 점은 역대 정권 중 오직 이명박 정부에서만 나타난 아주 특이한 현상이었다. 그 전후 어느 정권에서도 이런 행태가 재현된 바 없었다.
국방부·합참·민군합조단 극심한 혼란
김태영 국방부장관 역시 이런 행태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터다. 노무현 정부 당시 합참 작전처장을 지낸 이양구 소장은 육군 개혁실장으로, 작전처장 출신 김종배 소장은 부사관학교장으로, 역시 작전처장 출신인 신원식 소장은 국방부 정책차장으로, 합동작전과장 출신인 김왕경 준장은 교육사령부로, 역시 합동작전과장 출신인 장경석 준장은 3사관학교로, 한결같이 좌천되거나 현행 작전과 무관한 분야의 보직으로 이동했다. 모두 이전 정부의 사람으로 이명박 정부에서 배제의 대상이 된 인물들이다. 이런 인사 관행은 훗날 역시 노무현 정부에서 합참의장을 역임한 김관진 국방부장관이 부임해서야 비로소 정상화된다. 그러나 뒤늦게 소외된 이들을 구제하는 인사를 단행하자 이번에는 그 후배 기수들이 “고참들 구제 인사만 한다”며 김관진 장관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합참이 흔들리자 김태영 국방부장관은 국방부에 있던 신원식 소장을 합참에 보내 업무를 지원하도록 한다. 합참의장 역할을 김태영 장관이 다 떠맡고 나서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런 김 장관마저도 천안함 침몰을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몰아가려는 해군의 행태에 불신을 표시했다. 김 장관이 윤종성 조사본부장에게 “해군 말을 너무 믿지 말라”며 같은 육군 후배를 통해 해군을 견제하는 의도를 내비친 것이다. 이때 원세훈 국정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북한의 특이 동향이 없었다”며 천안함 사건에 북한이 개입했을 개연성이 작다는 요지의 조언을 이미 하고 있던 상황이다. 결국 어뢰 공격을 주장하는 해군이 정부 내에서 점차 고립되는 양상으로 천안함 직후 국면이 전개되었다. 그랬던 김태영 장관이 북한의 어뢰 공격 쪽으로 생각이 기운 것은 4월 초에 수도통합병원에 가서 천안함 생존자를 면담하고 난 이후였다. 무언가 상황이 급반전되려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사저널] 2014.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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