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글/특과 2기 정채호

장편서사시 대한민국 해병대 -1

머린코341(mc341) 2015. 10. 22. 19:22

장편서사시 대한민국 해병대 -1

 

1949년 4월 15일

이 날이 대한민국 해병대가 발상(發祥)했던 날.

 

진해(眞海) 동천에 우뚯솟은 상서로운 전설 깃든

천자봉(天子峰)과 장천(將川),

그 뫼 기슭, 그 천변에 위치한 덕산(德山) 비행장

누추한 격납고 속에서

개천에서 용이 나듯 그렇게

대한민국 해병대가 미천하게 태어났던 날.

 

해병대의 탄생을 실현시킨 역사적인 게기는

'48년 10월 19일에 발생했던

여순(麗水·順天)지구 사건,

해상에서 그 반란군 진압작전을 지원했던

해군수뇌부에서는

수륙양면작전의 필요성을 절감(切感)했던 나머지

마침내 그 특수임무부대의 창설을 적극 추진하기에

이르렀던 것.

 

그러나 그 계획은 난관에 봉착,

이윽고는 그 뜻이 좌절될뻔도 했으나

계획 입안자들의 끈질긴 노력과

어려운 산고(産苦)끝에

가까스로 출산(出産)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으니

그 산고, 영원히 축복받을 산고가 아니리오.

 

광복(光復)된 조국,

그 조국의 영광된 방패로서 태어난

대한민국 해군의 영(令)을 받들어

혼연이 모여든 창설기 요원은 400명.

 

그들중 100명은 기간요원(基幹要員),

300명은 가입대(假入隊)중인 해군13기 신병(新兵)중에서

선발한 해병 1기 신병들.

해병대의 첫 역사(役事)는 그 1기 신병들을 훈련시켜

해병사(海兵史)의 주춧돌이 될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역군들이 되게 했던 일.

 

한솥밥 식구가 된 창설기요원들의 한결같은 염원은,

날쌔고 용맹스런 용마(龍馬)가 되어

대한민국 해병대를

삼면환해(三面環海)의 조국강토를 영원토록 지켜 나갈

국방의 최강부대, 무적(無敵)의 강군으로

육성하려 했던 것.

 

지지리도 가난하고 어려웠던 그 창설기,

손을 못빼기, 주먹을 망치삼아 보수했던

허름한 퀀셋 병사(兵舍)에선

빗물이 새어 잠들을 설쳐야만 했고,

지급이 된 장비는 오직 일본군의 유물인

낡아빠진 99식 소총과 목총(木銃)뿐,

너절한 군복(정복) 또한 그런 유물,

군화만은 미군들의 편상화(編上靴),

발배(足舟)라고들 했으니

그 시절의 자화상(自畵像)이란 스스로가 일컬었듯

천하의 상(上) 거지족.

 

그러나 그들에겐 남들이 갖지 못한

진실로 위대한 무기가 있었으니

바위덩이 같이 뭉쳐졌던 가족적인 단결심과

칡뿌리 같이 강인한 인내심과 투지가 곧 그것.

 

그 지상(至上)의 무기를 가지고서 그들은,

초대사령관(신현준 대령)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오로지 강훈(强訓)에 강훈을 거듭함으로써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정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불굴의 감투정신을 길렀다.

 

강인한 해병정신의 뿌리를 내리게 했던

그 창설기의 강훈,

활주로의 시멘트 바닥은 훈련병들의 팔꿈치와

무르팍에서 흘러내리는 선혈로 얼룩지고,

후줄근한 단벌 국산 훈련복들은

걸레같은 누더기로 변모했었다.

 

비행장 기지 내의 동네산(△43)은

밤낮없이 오르내린 무수한 발들로 만신창이가 되고,

창공 높이 흘립(屹立)하여 독수리 웅지(雄志)를

나래펴고 있던

그 정복자 연(然)한 천자봉과

푸른 파도 그득 담은 행암만의 넓은 품도

무쇠같은 심신을 단련시켜 준 천혜의 도장이었다.

 

또한 그 창설기의 강병육성에는

혹독한 기합(氣合)도 한몫을 했으니

구 주종(主宗)은 빳다. 삼복중의 <북해도 곰잡이>와

기합용 <총검술>도 손꼽혔던 메뉴들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장편서사시 대한민국 해병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