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서사시 대한민국 해병대 -1
1949년 4월 15일
이 날이 대한민국 해병대가 발상(發祥)했던 날.
진해(眞海) 동천에 우뚯솟은 상서로운 전설 깃든
천자봉(天子峰)과 장천(將川),
그 뫼 기슭, 그 천변에 위치한 덕산(德山) 비행장
누추한 격납고 속에서
개천에서 용이 나듯 그렇게
대한민국 해병대가 미천하게 태어났던 날.
해병대의 탄생을 실현시킨 역사적인 게기는
'48년 10월 19일에 발생했던
여순(麗水·順天)지구 사건,
해상에서 그 반란군 진압작전을 지원했던
해군수뇌부에서는
수륙양면작전의 필요성을 절감(切感)했던 나머지
마침내 그 특수임무부대의 창설을 적극 추진하기에
이르렀던 것.
그러나 그 계획은 난관에 봉착,
이윽고는 그 뜻이 좌절될뻔도 했으나
계획 입안자들의 끈질긴 노력과
어려운 산고(産苦)끝에
가까스로 출산(出産)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으니
그 산고, 영원히 축복받을 산고가 아니리오.
광복(光復)된 조국,
그 조국의 영광된 방패로서 태어난
대한민국 해군의 영(令)을 받들어
혼연이 모여든 창설기 요원은 400명.
그들중 100명은 기간요원(基幹要員),
300명은 가입대(假入隊)중인 해군13기 신병(新兵)중에서
선발한 해병 1기 신병들.
해병대의 첫 역사(役事)는 그 1기 신병들을 훈련시켜
해병사(海兵史)의 주춧돌이 될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역군들이 되게 했던 일.
한솥밥 식구가 된 창설기요원들의 한결같은 염원은,
날쌔고 용맹스런 용마(龍馬)가 되어
대한민국 해병대를
삼면환해(三面環海)의 조국강토를 영원토록 지켜 나갈
국방의 최강부대, 무적(無敵)의 강군으로
육성하려 했던 것.
지지리도 가난하고 어려웠던 그 창설기,
손을 못빼기, 주먹을 망치삼아 보수했던
허름한 퀀셋 병사(兵舍)에선
빗물이 새어 잠들을 설쳐야만 했고,
지급이 된 장비는 오직 일본군의 유물인
낡아빠진 99식 소총과 목총(木銃)뿐,
너절한 군복(정복) 또한 그런 유물,
군화만은 미군들의 편상화(編上靴),
발배(足舟)라고들 했으니
그 시절의 자화상(自畵像)이란 스스로가 일컬었듯
천하의 상(上) 거지족.
그러나 그들에겐 남들이 갖지 못한
진실로 위대한 무기가 있었으니
바위덩이 같이 뭉쳐졌던 가족적인 단결심과
칡뿌리 같이 강인한 인내심과 투지가 곧 그것.
그 지상(至上)의 무기를 가지고서 그들은,
초대사령관(신현준 대령)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오로지 강훈(强訓)에 강훈을 거듭함으로써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정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불굴의 감투정신을 길렀다.
강인한 해병정신의 뿌리를 내리게 했던
그 창설기의 강훈,
활주로의 시멘트 바닥은 훈련병들의 팔꿈치와
무르팍에서 흘러내리는 선혈로 얼룩지고,
후줄근한 단벌 국산 훈련복들은
걸레같은 누더기로 변모했었다.
비행장 기지 내의 동네산(△43)은
밤낮없이 오르내린 무수한 발들로 만신창이가 되고,
창공 높이 흘립(屹立)하여 독수리 웅지(雄志)를
나래펴고 있던
그 정복자 연(然)한 천자봉과
푸른 파도 그득 담은 행암만의 넓은 품도
무쇠같은 심신을 단련시켜 준 천혜의 도장이었다.
또한 그 창설기의 강병육성에는
혹독한 기합(氣合)도 한몫을 했으니
구 주종(主宗)은 빳다. 삼복중의 <북해도 곰잡이>와
기합용 <총검술>도 손꼽혔던 메뉴들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장편서사시 대한민국 해병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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