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글/해사23기 김현기

해병대의 창설과 발전

머린코341(mc341) 2015. 10. 26. 00:15

해병대의 창설과 발전


               김현기(경기대 교수, 국제정치학 박사)

 
I.  서론

II. 해병대 체제 정립기(1945-1961)

III. 해병대 정책과 추진기(1961-1998)

IV. 해병대 정책과 제도 발전기(1998년이후--)

V. 결론

 
I 서론


한국해병대는 어느 군대와도 비견할 수 없는 특유의 생명력을 가진 군대이다. 이는 생명의 위협에 직면한 전장에서 솟구치는 전투의지를 불사르며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와 싸워 온 해병들의 강인한 인내심과 불굴의 투지로 생성된 숭고한 업적과 빛나는 전통 그리고 해병대에 대한 명예심을 종교와 같이 숭배하는 신앙적 해병대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해병대는 6.25전쟁과 베트남전쟁기간 중에는 가장 험난한 곳에서 전투의 최선봉에 서서 가장 먼저 임무를 달성하였으며 전쟁이 없는 평시에는 젊은이들을 변화시켜 훌륭한 군인, 훌륭한 민주시민으로 거듭 태어나게 하여 국가번영과 생존에 기여토록 함으로써 국민과 국군속에서 사랑과 신뢰를 받아오고 있다.


지나온 반세기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해병대 생명력의 근원이 되는 찬란한 역사와 전통 그리고 영광의 이면에는 오욕의 세월 또한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1972년 월남에서 철수한지 불과 1년 남짓한 1973년 10월 소위 경제적 군 운영이라는 미명하에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고, 그 후 14년이 지난후인 1987년 11월1일 해병대사령부의 재창설을 이루지만, 최고수준의 전투준비태세를 갖춘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해병대의 모습을 갖추기 위한 노력은 앞으로도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실정에 있다.


이 연구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지나온 역사속에서 선배 해병들이 쌓아올린 많은 업적과 자취들을 재점검하고 정리하여, 해병대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II. 해병대 체제 정립기(1945-1961)


1. 해병대 창설 배경


역사 없이 현재란 있을 수 없고 또한 그 장래도 있을 수 없다. 돌이켜 보면 현대전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상륙작전이었다고 하여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듯하다. 이의 대표적인 실례로 제 2차세계대전시 태평양 도서군 상륙작전과 노르망디상륙작전, 그리고 우리 해병이 직접 체험한 인천상륙작전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이러한 상륙작전을 전담하는 부대인 해병대는 그 명칭과 규모에 있어 차이가 있었으나 각국의 역사를 보면 먼 옛적부터 이를 갖고 있었다. 군사전략상 비중이 큰 상륙작전을 전담하는 부대의 창설은 서구에서는 17세기 식민지 시대에 시작하였고, 미국에서는 1775년에 해병대가 창설되어 소규모의 전쟁과 폭동 진압 등에 민첩한 기동성을 발휘하여 그 위력을 보였고, 일본에서도 명치 초기에 육전대가 생겼다.


이와 같이 열강은 모두 해병대를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발전에 주력해 왔다. 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우리나라도 삼면이 바다라는 입지적 조건과 공산집단과의 정치, 군사적 환경 아래 해병대의 창설이 절실히 필요하였지만 이의 실천은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신생국가로 아직 발전하는 도상에 있었으므로 정치, 경제 사회적인 애로 때문에 이를 추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북한은 1946년 하반기부터 남로당을 조직하여 폭동과 파업 및 시위와 선동, 그리고 각계각층에 침투하여 정부를 전복해보려는 흉계를 꾸미면서 1947년부터는 태백산-오대산-덕유산-지리산-한라산의 게릴라 근거지를 확장하여 관공서에 대한 습격과 방화 그리고 양민의 학살과 재산의 약탈 행위에 들어갔다.


1948년 초에는 그들의 투쟁수단이 더욱 조직화되고 활동지구가 확대되면서 각종 폭동 및 반란을 야기하는 가운데 동년 4월 3일부터 시작된 제주도 폭동은 무장 게릴라 500명을 포함한 1,500여명이 살인과 약탈, 방화를 일삼았고, 10월에는 군부대에 침투한 공산 적색분자들에 의하여 여.순 반란 사태가 발생하였다. 10월 19일 여순 반란 사건이 일어나자 해군은 해상봉쇄 임무를 띠고 신현준 중령이 지휘하는 함정을 여수 앞바다로 출전시켰으나 장비나 체제면에서 지상의 적에게 효과적인 타격을 가할 수 없었고 해상으로 도주하는 반란군을 섬멸하였을 뿐이다. 이것을 계기로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을 위시한 해군 수뇌부가 해병대 창설계획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당시 국방부 장관 이범석씨도 이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마침내 승인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49년 2월 1일 당시 해군 통제부 참모장 신현준 중령이 해병대 사령관에 임명되고 통제부 교육부장이던 김성은 중령이 해병대 참모장에 각각 임명되어 창설 준비에 분망한 결과 드디어 동년 4월 15일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병력 380명(해군으로부터 편입한 장교 및 하사관 80명과 해군 신병 제 13기 중에서 선발한 해병 제 1기 300명)으로 해병대 창설식을 거행하였다.


창설 당시 해병대는 다 떨어진 격납고 천정위로 밤하늘의 별을 헤아릴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시설과 악조건 하에서도 해병가족이라는 한 덩어리가 되어 대한민국 해병대를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에 불탔었다. 이것이 장차 6.25전쟁 시 전략적 가치의 비중이 큰 상륙부대로서 중책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해병대의 굳건한 초석이 되었던 것이니, 이때 벌써 해병대의 정신적 기초 내지는 해병대 정신인 가족적 단결정신, 애민정신, 인내의 정신, 임전무퇴의 정신이 뚜렷한 구현을 보아 해병대 전통의 효시가 되었으며, 해병대는 1949년 5월 5일 대통령 제 88호에 의하여 해병대령이 공포되어 법적으로 승인을 얻게 되었다.



2. 6.25전쟁과 해병대


제주도 주둔시 6.25전쟁을 맞은 해병대는 지연작전기에 군산.장항.이리 전투를 비롯하여 운봉.함양.진동.통영 지구 전투에 참가했고, 반격작전기에는 인천, 수도탈환, 목포, 원산, 고성, 간성, 함흥, 양덕 지구 전투와 1.4후퇴 후 휴전에 이르기까지 안동. 영덕. 영월. 정선. 평창. 홍천. 화천. 도솔산. 김일성 고지. 김포지구, 도서부대 작전, 장단지구 등 수 많은 전투를 치렀다. 6.25전쟁시 해병대의 주요전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 통영상륙 작전


낙동강 방어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북한군 제7사단이 거제도를 점령하고 전략요충지 마산과 진해를 해상에서 봉쇄하기 위하여 통영에 침입하자, 해병대 김성은부대는 1950년 8월17일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2일만에 전술 요충지 통영을 탈환 한 뒤, 원문고개에서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고 이 지역을 방어하였다.


이 작전에서 해병대는 작전의 승패를 가름하는 매일봉 고지를 적보다 5분 먼저 점령하여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적을 격멸하고, 통영 시내의 잔적을 소탕하면서 적의 유일한 공격로인 원문고개를 조기에 탈취하여, 여러 차례의 공방전에서 적의 대대를 격퇴함으로써 낙동강 교두보선의 서측방 위협을 제거하였고, 유엔군 철수작전중 방어를 위한 유일한 공격작전을 수행하여 “귀신잡는 해병대”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나. 인천상륙 작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 최후의 발악적인 8월, 9월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한 작전으로, 맥아더 사령관은 한반도에서 적을 몰아내고 조기에 전쟁을 종결한다는 계획하에 1950년 9월 15일 유엔 제7합동상륙기동부대가 261척의 함대를 동원하여 미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해병대를 선두로 하여 세계전사에 찬연히 빛나는 상륙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에 제7합동상륙기동부대는 48시간동안 항공모함 함재기 200대의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을 실시하면서, 9월 15일 0630분을 기하여 미해병 제5연대 제3대대가 20척의 상륙주정을 이용하여 녹색해안에 상륙, 월미도를 탈취하였다.


동일 1730분부터 한.미해병대가 400여척의 상륙주정에 분승하여 4회에 걸친 파상공격을 실시, 적색해안과 청색해안에 상륙하여, 인천을 방어하는 북한 인천경비여단과 제18사단 및 제31사단을 격파하고 인천시가지와 해안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수도 서울을 조기에 탈환, 낙동강 전선의 총반격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하였다.


다. 서울탈환 작전


인천상륙 작전에 성공한  미제10군단은 1950년 9월 18일 서울로 진격하여 11일동안 작전을 전개한 끝에, 서울 외곽지역과 시가지에북한군 4개사단을 격퇴하고 서울을 탈환하였다. 이 작전에서 미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해병대는 선봉부대로 서울 서방에서 수도 중심부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미육군 제7사단과 한국 육군 제17연대는 서울 남측방과 동측방에서 우회, 포위기동으로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한국해병대는 9월 20일 한강을 도하, 수색방향으로 진격한 뒤 최후방어선인 104고지와 연희고지군 일대의 적을 격퇴하여 수도 탈환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으며, 시가지 전투를 전개하여  잔적을 소탕하고, 9월 27일 0610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90일 동안 적의 점령하에 있던 서울을 탈환하고 9월 29일 이승만대통령과 맥아더 원수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환도식을 거행하였다.


라. 도솔산지구 작전


국군과 유엔군이 1951년 5월 춘계공세를 격퇴한 뒤 한국해병대는 동년 6월 3일 화천 저수지 일대까지 진출하였는데, 여기서 맡은 해병대의 전투지역은 38선 이북의 양구와 인제 간에 위치하고 있는 태백산맥 가운데서 가장 험악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도솔산(1,148 고지) 지역으로서 일찍이 유엔군이나 한국군이 한번도 진격하지 못한 곳이었고, 적이 또한 난공불락임을 호언하던 천연적 요새이기도 하였다.


한국해병대 제1연대가 양국군 해안면의 분지 남서쪽에 있는 전략요충지 도솔산을 확보하기 위하여, 제1단계 작전(1951.6.4-6.12)시 공격목표 1에서 목표16까지 점령한 뒤 캔사스 선으로 진출하였고, 제2단계 작전( 1951.6.13-6.24)시 공격목표 17에서 목표 24까지 점령하고 버지선까지 진출하여, 도솔산과 대우산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산악지역에 배치된 북한군 제5군단 제12, 32사단의 정예부대를 치열한 공방전과 무수한 희생끝에 격퇴하고 도솔산을 탈환함으로써 무적해병의 신화를 창조한 전투이다.


마. 김일성고지 작전


휴전회담이 제기된 직후 미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해병대 제1연대가 양구 북쪽 해안분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지형상 불리한 조건을 무릅쓰고, 3주간 피의 대공방전을 감행하였다. 제1단계 작전(1951.8.21-9.1)시 현재 을지전망대와 가전리일대(924, 1,026, 702, 660 고지군)에 배치된 북한군 제3군단 제1사단을 치열한 접전끝에 격퇴하고 펀치볼을 확보하였으며, 제2단계 작전 ( 1951.9.1-9.20)시 간무봉 일대의 적 은거지를 제압하여, 내금강산을 통제할 수 있는 중요지형을 장악하였고, 좌측방의 한국 육군 제5사단의 가칠봉 점령을 용이하게 하였다.


한국해병대의 김일성(924고지) 및 모택동(1,026 고지) 고지 전투는 펀치볼 작전의 제1단계 작전으로 펀치볼 북쪽 능선 일대에 천문학적 숫자의 지뢰가 매설된 장애를 극복하고, 4일동안 924고지와 1,026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혈전 끝에 이들을 탈환함으로써, 펀치볼을 조기 확보하게 되었고, 한국 해병대의 위용을 국내외에 크게 과시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신이 경탄할 공훈이라고 격찬하였다.


바. 장단(사천강)지구 작전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개최될 당시, 피아간 더 유리한 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초진지 쟁탈전이 계속되자, 수도 서울 방위에 역점을 두고 군사적 보완책의 일환으로 1952년 3월 17일부터 중.동부에서 서부전선 장단지구로 투입된 해병대 제1연대는 1953년 휴전시까지 약 1년 4개월 동안 판문점에서 사천강에 이르는 임진강 하구까지 11Km에 달하는 주저항선 전방의 8개 전초진지에서 중공군 2개사단(제194,195 사단)과 대결한 방어전투이다.


추후 개편된 해병대 제1전투단은 이 전투에서 사천강을 경계선으로 중공군 2개 사단과 4차례에 걸친 대규모 공세를 저지히여 군사분계선을 아군에게 유리하게 확정짓도록 하였고, 수도 서울의 관문인 개성-문산 축선을 지켜 수도권 방어에 기여하였다.


3. 연합작전으로 해병대의 발전과 미해병대의 역할


가. 해병대 창설 초기의 연합해병전력


1) 진동리 지구 전투에서의 연합작전: 초월전진 지원


한미 해병대 간의 공식적인 연합작전이 아니었다 해도 이 양국 간의 해병대가 처음으로 만나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짧은 기간동안 같은 전투지대 내에서 연합작전 형태의 작전을 구사한 것은 1950년 8월 초, 낙동강 전선 서측방인 진동리 지구 전투이므로 이 전투는 한미 해병대 최초의 연합작전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미 해병 5연대장 보러 대령은 한국 해병대와의 만남에서 "한국 해병대와 만난 것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한다"고 피력하였다. 


2)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시의 연합작전


인천상륙작전은 한국동란이 발발한 지 만 82일만에 이루어진 작전이다. 상륙기동부대의 주요 지휘관들이 임명되고, 구체적인 작전을 준비하는 데 가용 한 실질적인 준비시간은 3주정도 밖에 되지 못하였다. 해군, 해병대의 실무자들은 24시간의 강행군으로 작전을 준비하였다. 미 극동군 사령부는 9월3일 한국해병대 1연대를 미 해병1사단에 배속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한 해병대는 1950년 9월5일 진해로부터 부산으로 이동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9월6일은 한미 해병대가 연합전력으로서 공식적인 합류가 처음으로 이루어 진 역사적인 날이다.  


약 1주간의 준비기간을 두고 한국 해병대는 대체로 미 해병대에 준하는 보병부대 장비를 처음으로 지급 받고, 사격훈련도 하게 된다. 무기를 지급한 미 해병 1사단 (주로 5연대)에서 교관 요원을 차출, 작전지역으로 이동하며 한국 해병대를 교육하였고, 한국 해병대 장병들은 언어장벽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숙달되고 적응하였다고 한다.  즉 이 당시의 한 해병대는 연합전력으로서 작전운용뿐 아니라 편제와 장비 및 훈련의 제 분야에서 미 해병대의 지원을 받는 미군 의존적(dependent) 연합전력을 형성하여 작전에 임하였다.


3) 경인지구 전투 이후의 연합작전


가) 원산, 함흥 지구에서의 연합작전


경인지구 전투 이후 한미 해병대는 다시 동해안 묵호, 원산, 함흥 지역으로 그 무대를 옮겨 연합전력을 형성하고, 작전을 하게 된다. 미 해병대가 먼저 원산으로 이동하였고, 한국해병대가 타 임무를 위하여 일부를 제외하고, 합류하는 형태를 취했다. 경인지구 작전이후 인천에 재집결한 해병 1연대는 2대대를 제외하고 (2대대는 목포지역 소탕작전을 위해 출동하였다), 원산지역에 상륙하여 미 해병 1사단과 다시 연합작전을 하게 된다.


한국 해병대는 고성, 간성, 마전리, 원산, 함흥 등지에서 미 해병 1사단에 배속되거나 지원을 받으며 연합작전을 수행하였는바, 이들은 '50년 10월27일 원산에 상륙하여 그 해 12월 22일 연포 비행장에서 진해로 항공이동 되기까지 원산방어, 함흥-흥남 교두보의 방어임무를 수행 하였다. 특히 미 해병대의 장진호 철수를 성공적으로 지원하고, 유엔군과 미 육군을 포함한 우군작전을 엄호하였다. 장진호 철수에서 중공군에 의하여 완전 포위되었던 미 해병 1사단은 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냥 철수가 아닌 후방으로의 전투작전을 통하여 성공적인 후퇴작전을 하였는바,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로써 부대를 지휘하고 전의를 북돋았다. 이러한 미 해병대의 전투작전을 지원하면서 한국해병대는 미 해병대로부터 실전에서의 산 교훈을 체득할 수 있었다.


나) 포항-영덕 및 영월 지구에서의 연합작전


'51년 1월21일 한 해병 1연대는 미 해병 1사단에 재배속 되어 미 해병대의 "Pohang Patrol" 작전에 참가하게 된다. 한국 해병대는 2월 중 미 10군단 및 한 육군 3군단으로 빈번한 재 배속이 이루어졌다. 한편 독립5대대는 '51년 2월 김포반도 방어를 위하여 이동, '52년 4월까지 이 지역을 방어하면서 미 1군단의 작전통제를 받게 되고, 1연대는 한 육군 3군단에 의해 영월지역으로 배치된다. 작은 해병대가 분산 운용되면서 지휘/통제권에 문제가 발생하게 됨을 인지하고, 이러한 배속전환이 이루어지기 전인 2월21일 한국 해군 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은 8군 사령관에게 한국 해병대를 미 해병 1사단에 배속 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미 해병대에 의한 지속적인 교육훈련을 가능케 하고, 한국 해병대의 전투작전 간, 포병, 전차 등의 원활한 전투지원을 받게 하는데도 그 목적이 있었다. 
 
다) 동부전선, 펀치볼(Punch bowl) 지역 연합작전


동부전선에서의 한 해병대 작전은 미 해병 1사단에 배속되어 홍천, 화천 등지에서도 이루어 졌으나 도솔산 지구 와 김일성, 모택동 고지 등의 전투에서 실시한 연합작전이 가장 치열한 것이었고 미 해병대를 능가하는 한국 해병대의 용맹성이 더욱 돋보이는 작전이었다.  전쟁 기간 중 한 해병대는 줄곧 미 해병대로부터 무기와 장비, 군수지원은 물론, 작전 간 화력 및 항공지원을 받았고, 작전운용 또한 미 해병대에 배속되거나 작전통제된 상태에서 이루어 졌으나, 이 작전에서는 오히려 미 해병대를 지원하고, 인수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까지 이름으로써 미 해병대에 대한 일방적 의존의 관계에서 상호의존적 (mutual interdependence) 관계의 연합전력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나.미해병대의 역할


한국동란 중 한국 해병 1연대는 미 해병대에 의하여 장비되고, 훈련되고, 상당기간 동안 미 해병 1 사단의 작명에 의하여 작전을 수행하는, 미 해병대 의존적인 연합전력으로 구성되어 운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해병대와 거의 함께 작전을 하면서도, 지휘관들의 탁월한 리더십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미 해병대와는 타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유대와 결속의 전통을 후진들에게 유산으로 남겼다. 그 결과 미 해병대가 한국 해병대 발전에 미친 역할을 6가지 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작전운용: 미 해병대에 작전배속 내지 작전통제 하의 운용


한국해병대의 주요전투부대들은 미해병 1사단의 배속 내지 작전통제를 받는 연합전력의 형태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개전초기 소규모 해병대부대는 육군에 배속되어 전투를 하였으나 인천상륙작전을 기점으로 미 해병대와 배속되어 지속적인 작전을 수행했다.


둘째,미 해병대 주도의 편성, 장비 및 작전운용


한국 해병 1연대의 편제(T/O)와 장비표(T/E)는 미 해병대의  편제와 장비표에 의하여 정립되었고, 정식 인가는 1951년 2월22일 CTG 95.7(한국 해군)에 의하여 EUSK(주한 미8군)에 제출되어, CINCFE(극동군 사령관)에 의하여 최종 승인되었다.


셋째,미 해병대식 교육훈련


교육훈련은 한 해병대 고유의 책임사항 이었으나, 전시 부대확장과 함께 미 해병대의 선발된 교육훈련 전문 요원들이 한 해병대의 교육훈련에 깊이 관여 하였다. 보병전술 장교교육, 포병, 전차,공병, 병기, 상륙수색 등의 교육에 미 해병대 교관들이 투입되어 진행되었다.


넷째, 각급제대에서의 고문단 및 연락반의 운용


미 해병대는 한국 해병대 주요제대에서 고문단과 연락반을 운용하여, 작전, 군수, 전투력 운용의 제 분야에서 전달과 조언의 역할을 하였다. 해병대 사령부에는 고문단으로, 주요 전투제대에서는 연락반 개념으로 운용되었고 이들은 후일 전후 해병대 건설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다섯째, 의존적인 연합전력(dependent combined forces)


미 해병대에 의존적인 연합전력을 형성하여 작전함으로써, 한쪽으로의 의존이 너무 치우치면 종속되는 부정적 측면을 우려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의 종속은 오히려 한국 해병대가 살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적극적인 몸부림 이었고, 이는 한미 해병 간의 유대를 결속시키는 데 순기능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


여섯째, 해병대 특유의 혈맹적 유대관계 형성


한미 해병대가 연합전력으로서 한국동란을 치룬 것은 양 개 군대 간에 혈맹적 유대관계를 형성하게 하였고, 비록 각자의 국가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군대라는 한계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간에는 해병대라는 동류의식에서 창출된 해병대만의 독특한 군사적 유대 문화를 오늘날까지 잘 유지해 오고 있다. 이는 함께 전쟁을 치루면서 연륜의 때가 묻은 군사적 자산이자 한미동맹의 국가적 자산이기도 하다.


III. 해병대의 정책과 제도 추진기(1961-1998)


1. 전략기동예비군으로서의 해병대.


해병대가  전략 기동예비군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부대편성을 다음과 같이 점진적으로 조직해 갔다.


가. 해병대사령부 서울 용산(후암동) 이전


창설한 지 불과 1년 여 만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도에 주둔한 해병대사령부는 전투부대와 함께 부산->인천->서울->고성->원산->진해로 이동하면서, 귀신잡는 해병대. 무적해병의 위용을 떨치고 1951. 5. 20 부산 용두산 공원으로 이동하였다. 이렇듯 싸우면서 자라온 해병대 사령부는 휴전 뒤 1955. 3. 26 부산에서 서울 용산(후암동)으로 이동하여 해병대 부대 지휘부로서 부대 발전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나. 제1여단/제1상륙사단의 창설


1954. 2. 1. 제1전투단을 기간으로 제1여단을 창설, 파주군 금촌면에 주둔하면서 상륙작전 부대로서 조직을 정비하고 서부전선 및 수도권 방어 임무를 수행하였고, 1954. 3. 17일 미 해병대 제1사단의 본국 철수로  이 작전지역 의 작전권을 인수하였다. 1955. 1. 15 제1여단을 기간으로 제1상륙사단을 창설하여 수도권 방어 임무를 수행하면서 상륙훈련을 실시하였고. 1959. 3. 12 금촌에서 포항으로 이동하여 상륙작전 임무를 본격적으로 수행하였다.  1959. 3. 30 대통령령 제1,468호에 따라 제1상륙사단으로 정식 승인을 얻어, 유일한 국가전략기동부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다. 도서부대 창설


동해안의 여도, 모도, 사도, 황토도, 웅도, 양도부대와 서해안의 초도, 석도부대가 휴전협정에 따라 진해로 철수하여 해병 제2연대의 모체가 되었다. 그러나 백령도와 연평도에 주둔했던 서해부대는 계속 잔류하여 서해안의 5개 전략도서 방어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1954. 3. 1. 미 해병대가 본국으로 철수함에 따라 작전권을 인수하였다. 그 뒤 서해도서부대(‘55. 2 .1), 해병함대부대(’58. 4. 15). 함대해병경비부대(‘59. 4. 1)로 개편되었으며 1960년 1월 1일 해병도서 경비부대로 증, 개편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라. 교육단 /보급정비단 창설


6.25전쟁 직후 1953. 2 .1 해병학교 및 해병훈련소를 기간으로 편성된 해병교육단은 독자적인 해병대의 장교, 하사관, 병을 양성하기 위하여 상륙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해병대식 교육훈련으로 강인한 해병을 창출하는 산실 역할을 수행하였다.


1955. 6. 1창설한 보급정비단은 해병대 전 부대에 대한 독자적인 보급 및 정비지원을 위하여 각종 보급품의 청구, 획득, 저장 및 불출에 관한 전 기능과 해병대 군수 물자의 3, 4단계(LVT(상륙장갑차)는 4, 5단계)정비를 담당하였으며, 전시 작전부대를 위한 전방 전투근무단을 편성하여 전투근무지원 임무를 수행하였다.


마. 지원병 제도 확립


해병대는 6.25전쟁 동안 1951년 9월부터 지원 및 징집을 겸한 전시 병력충원을 하였고, 휴전 뒤 1953년 8월부터 점차 지원병 제도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1958년부터 병무청에 모병관을 파견하는 등 대대적인 모병활동을 전개하여, 해병을 전원 지원병 제도로 충원하였다. 해병대 지원병은 만19세부터 20세까지 제한하였다가, 1960년 8월부터 23세까지 연장하여 모집함으로써 질적 향상을 도모하였고, 이 지원병 제도로 인하여 최강 부대의 전통을 계승할 수 있었다.


바. 예비사단 전력화


해병대는 1956. 7. 1일 포항기지를 창설하여 미 해병 제1비행단이 귀국함에 따라 오천비행장(K-13)기지를 인수하고, 주둔지경계 및 교육시설을 관리, 유지하면서 포항기지에 예비역 교육대를 설치하여 예비역 해병 입영근무 소집을 실시하다가, 1958. 4 .15일 해병 포항기지로 개편하였다. 1959. 2. 15일 부터 제2상륙훈련단을 발족하여 병무감실 및 병무국을 통합 운영하는 이중 기능을 가지고, 3개의 교육연대(포항, 진해, 목포)를 편성, 전시 및 유사시 해병대 정규군(현역)의 초기 증강에 따른 보충 소요를 위하여 유능한 예비역 하사관 및 병에게 입영 교육을 시켜 1개 예비상륙사단의 전력화를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사. 상륙훈련


1953. 7. 27 휴전협정이 조인된 뒤부터 해병대는 북진 통일의 국가 목표 아래 적 후방 지역에 상륙하여 적을 섬멸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고자 중대급부터 사단급까지 대규모의 상륙훈련을 실시하였다. 제1여단은 1954. 10. 23일 경남 거제도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모시고 최초로 대대급(BLT) 상륙훈련을 실시하였고, 1955. 1. 15일 제1상륙사단 창설 뒤에는 국가전략 기동부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1957, 1, 10일 경북 영일만에서 최초로 연대급(RLT) 상륙훈련을 실시하였다.


1958. 9. 26일 경북 영일만에서 최초로 여단급(MEB)한미연합 상륙훈련을 실시하였고, 1959. 10. 8일 경북 양포리에서 최초의 사단급(MEF)상륙훈련인 쌍룡훈련을 실시하여 국가전략기동부대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아. 상륙전 기지사령부 창설


해병 포항기지를 기간으로 1967. 5. 16일 대통령령 제 3,071호에 의거 창설된 상륙전 기지사령부는 포항기지의 경비(전시 1개 RLT편성)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1971. 7. 1일 예비군 훈련연대(제 21, 22, 23연대)를 예속하여 예비역의 동원과 관리, 교육훈련을 실시하였다. 전략기동 예비대로서 언제든지 출전 가능하도록 준비하며, 상륙전훈련에 필요한 교장시설 및 수용시설을 관리하였다.


자. 해병 교육기지사령부 창설


재진부대 행정 및 근무지원 임무를 위하여 1959. 2. 1. 국본 일명(해) 제 50호에 의거 해병교육단에서 증편된 진해기지는 1967년 5월 16일 대통령령 제 3,070호에 의거, 해병교육기지사령부로 개편되어, 해병대 장병의 각종 특기교육과 사관, 하사관 후보생, 신병에 대한 기초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해병학교, 상륙전학교(1971. 7. 창설), 신병훈련소, 상남보병훈련연대 및 통신교육대(1967. 9. 설치), 사격장 관리대 등을 지휘.관리하였다.


차. 상남 보병훈련연대 창설


1957. 1. 23. 해병교육단의 상남 야외훈련대를 창설하여, 강하고 힘있는 최고의 군인을 양성하는 실전적 야외 교육훈련을 실시하였다. 1964. 1. 1. ‘해병 상남보병훈련대’로 개칭한 뒤 1969. 9. 1. 해병교육기지사령부 상남훈련연대로 증.개편되었으며, 1973. 9. 1. 국방부 훈령 제 157호에 의거, 해병 상남훈련연대가 해체되면서 해군교육단에 인계되었고, 해병 상남 보병훈련대는 1977. 1. 1. 까지 20년간 20여만명의 해병대 장병을 양성하였다.


카. 지휘 참모대학 창설


1964. 1. 1. 창설된 해병 참모지휘학교는 1967. 7. 1. 국본일명(해) 제 9호에 의거, 해병 지휘참모대학으로 개편되어, 대학반, 고등군사반을 운영하였다. 해병대 위관 및 영관 장교에게 사단급 이상 부대의 지휘관 및 참모의 직능 수행에 필요한 지상전 및 상륙전에 관한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타. 항공대 창설


해병대 항공대는 제 1사단 항공대(1958. 3. 1. 창설) 및 제 2여단 항공대(1965. 9. 20. 창설) 그리고 제 5여단 항공관측대(‘63. 3. 18. 창설)를 운영하다가 1971. 5. 5. 해병대 사령부 항공대를 창설하여 휴전선 및 상륙/지상작전 시 첩보획득과 탐색 및 정찰지원을 하였고, 베트남전쟁 시에는 근접 항공지원, 탐색 및 정찰 그리고 사탄유도를 하였다.


파. 제 5여단 창설


해병대는 제 1사단 제 2연대를 기간으로 제 2여단(청룡부대)을 편성하여 파월함으로서 제 1사단이 전략기동 예비대로서 임무수행에 지장을 초래하는 심각한 상태였다. 해병대 임무수행 능력 보강을 위하여 파월인원에 해당하는 5,470명의 병력이 보충되어, 해병대는 건군 사상 최초로 30,430명으로 증강된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해병대는 증강된 병력으로 1966. 11. 14. 제 5연대를 신편하여 이 부대를 기간으로 1966. 11. 23. 새로운 전투여단인 제 5여단을 창설하고 8년 동안 김포반도에서 휴전선을 지킨 제 1임시여단과 1967. 1. 23일 부대 교대함으로서, 서부전선 수도권 방어력을 보강하였다.

 
2. 베트남전쟁과 해병대


베트남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월남 자체의 노력만으로는 사태수습이 어려워지자 미국을 비롯한 자유애호 국가들이 자유수호를 위해 직접, 간접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한국은 1965년 6월 21일자로 접수된 ‘구엔 카오 키’ 월남수상의 한국군 전투부대 파병요청에 따라 7월 2일 정례 국무회의에서 국군 1개 사단과 지원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월남을 공산침략으로부터 돕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한국자체의 안전과 전 세계의 자유진영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며 한편 한국이 북한의 침략으로 인하여 난관에 처했을 때 미국을 위시한 우방제국이 피를 흘려가면서 한국을 도와준데 대한 보답이었다.


이러한 여망에 따라 국군 1개 사단의 파월이 결정되자 국군 중에서도 해병대는 그 특성이 제반 지상전투는 물론 상륙작전 및 특수전의 광범위한 수행능력을 구비하고 있어 한국군 해외파병의 선봉이 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1965년 9월 20일 해병 제 2연대를 기간으로 해병 제 2여단(청룡부대)을 결단하기에 이르렀다. 

 
청룡부대는 1965년 10월 3일 한국군 전투부대의 선봉으로서 온 국민의 기대와 성원 속에 부산항을 출항하여 정글과 흙탕속의 전장 월남으로 향하였다. 65년 10월 9일 ‘캄란’만에 상륙한 청룡부대는 언어와 풍속 및 지리에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해병대의 용맹성과 한국전선에서 얻은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투입된 즉시로 베트콩 소탕전에 혁혁한 전과를 올려 한국 국민은 물론 세계 자유민의 가슴속에  명예로운 한국의 ‘이미지’를 심었을 뿐만 아니라 상승해병의 전통을 세계에 널리 과시하여 자유민의 전우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다음은 청룡부대가 월남에서 수행한 10대 작전의 전투개요이다.


가. 청룡부대의 10대작전


1) 청룡 1호 작전(1965. 12. 16~1966. 1. 16)


한국군이 파월 이래 최초로 전개한 여단급 탐색.섬멸작전으로서 세계의 이목을 끄는 가운데 한국의 국위와 주월 한국군의 전투력을 시험하는 첫 케이스의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1965년 12월 16일부터 여단이 캄란지구에서 투이호아지구로 이동하기 전 1, 2단계를 대대급 작전으로 전개하다가 1966년 1월 1일부터 여단급 섬멸 소탕작전으로 전환하여 16일간 월남중의 월맹이라고 호언하면서 투이호아 일대의 험한 지형과 공산군의 해상보급추진 요람지인 봉로만 일대에서 준동하던 월맹정규군과 지방게릴라 약 1,500명을 완전 소탕하여 봉로만을 거쳐 북쪽 퀴논으로 통하는 1번 도로를 개통시켰다.


뿐만 아니라 월남 3대 곡창의 하나인 투이호아 평야를 월남정부의 장악 하에 넘겨줌으로써 푸엔성 주민들의 식량난을 해결해 주고 적의 식량 확보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불란서군이 철수 이래 처음으로 이 지역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이 작전으로 지역 내에서 준동하던 적을 재기 불능하게 하였는데 당시 ‘뉴욕타임즈’지는 이 전투가 우방군의 지상적전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라고 격찬했다.


2) 해풍작전(1966. 7. 22~8. 17)


청룡 1, 2호 작전과 재건 1, 2호 작전으로 투이호아 일대를 완전 평정한 후 적극적으로 전개한 민사심리전이 주효함에 따라 주민들의 반공의식이 높아지자 많은 귀순자가 속출함으로써 잔적들은 내부 깊숙이 도주하였다. 부대는 귀순자에 의한 정확한 첩보에 의거 헬리콥터로 내부 깊숙이 공수이동 기습작전과 반격부대의 신속한 투입 등 적극적인 탐색 소탕작전을 전개하여 87명을 검거함과 동시에 개인화기 36정을 노획하였다.


특히 작전의 중반기인 8월 10일 제 3대대는 투이호아 서방 14㎞지점에서 생포한 여자 베트콩 2명을 설득하여 미테마을 동굴 속에 베트콩 1개 부대가 무기를 휴대하고 은거하며 활동하고 있다는 첩보를 얻었다.


이 첩보를 평가.분석하여 확증을 얻은 대대정보장교 이인호 대위는 11일 제 9중대에서 제 1소대를 지원받아 현지 동굴 탐색전에 나섰다. 탐색대원들이 동굴을 탐색하였으나 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은 이인호 대위는 확증된 정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동굴에 선두 진입한 이 대위는  적의 수류탄 투척에 대피가 불가능하자 뒤따르는 대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몸으로 덮쳐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렇게 한 몸을 아낌없이 바쳐 부하들의 생명을 구해준 故 이인호 소령의 전우애와 희생정신은 전 국군의 귀감이 되었다.

 

3) 짜빈동 야간방어 전투(1967. 2. 14~2. 15)


이 전투는 월맹정규군 제 2사단 제 1연대와 제 21연대 및 지방게릴라 1개 대대가 짜빈동에 위치한 청룡 제 3대대 제 11중대에 인해전술로 파상적인 기습공격을 가해오므로 중대전술기지를 사수하면서 수류탄, 크레모아, 육박전 및 지원화기의 유효적절한 운영으로 적을 완전 섬멸.격퇴시킨 방어전투로서 중대전술기지 개념의 유효성을 입증하는 전투였다.


중대장 정경진 대위는 특공대를 편성하여 진내의 적을 섬멸함과 동시에 적의 후방 증원부대를 차단하기 위한 곡사포 지원사격을 요청하여 패주하는 적을 섬멸시켰다. 이 작전에서 243명의 적을 사살하고 포로 2명을 생포함과 동시에 대전차 유탄포 6문, 화염방사기 3문, 기관총 2정, 기관단총 6정, 자동소총 17정, 소총 12정, 권총 1정, 전화기 1대, 방망이수류탄 350발, 소화기실탄 6,000발, 각종 포탄 50발 등을 노획하였다.


이와 같이 청룡 제 11중대가 월맹정규군 2개 연대병력의 야간기습을 물리침으로써 한국군 중대전술기지 방어의 성공과 우수성을 입증하고 한국군의 용맹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다. 작전 후 현장에 달려온 미국 해병대 제 3상륙군단장 월드 중장은 “내가 베트남전쟁에서 처음 보는 전과다. 전 장병의 용감성은 우방군의 귀감이다.”라고 격찬했다.


4) 용머리 2호 작전(1967. 7. 14~7. 17)


1967년 7월 4일 20:00시에 미 해군 함정의 추적을 받고 있는 적의 선박이 추라이 남방인 바탄간반도를 향하여 도주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청룡부대는 적의 선박을 나포하기 위하여 미 해군과 긴밀한 협조 하에 신속히 여단장의 진두지휘로 긴급작전을 벌이고 적 선박의 정박 예상지점을 수개 선정하여 4개 중대와 특공소대를 배치하였다. 정박 예상지점에서 잠복작전을 전개하던 중 이튿날 새벽 1시 5분경 괴선박을 발견한 부대는 집중포격을 가하여 괴선박을 안민부락 앞 암석에 좌초시켰다.


이와 같이 적의 무기 수송선을 나포함으로써 베트남전쟁 사상 처음으로 일시에 대량의 무기를 노획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적으로 하여금 전투능력을 상실시키는 큰 역할을 하였다.


5) 테로이 매복작전(1967. 9. 17)


1967년 7월 19일 밤 청룡 제 1대대 2중대 3소대 제 1분대는 쾅나이 북방 10㎞지점인 쾅나이 평야의 중심지이며 1번 도로 동쪽 300m지점에 위치한 테로이 부락 인근에 매복하였다가 동쪽해안에서 서쪽산악으로 이동하는 적을 포착.섬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매복대는 호기를 놓치지 않고 추격하면서 60미리, 81미리, 4.2″중박격포, 105미리 곡사포 등 지원화기의 조명과 차단사격을 요청하여 도주하는 적을 정확히 명중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전과를 확대시켰다. 23:50경 적의 주력부대가 지리멸렬 소탕되자 1시간 50분 만에 매복작전은 끝났다.


이 매복전투에서 32명의 적을 사살하고 포로 4명을 생포함과 동시에 60미리 박격포 1문, M1소총 8정, 기관단총 4정, 자동소총 4정, 칼빈 4정, 방망이수류탄 10발, 기타 장구 및 실탄과 의약품 다수를 노획함으로써 베트남전쟁 사상 소수의 매복대로서는 최초로 피해 없는 전과를 올렸다.


6) 승룡 7-21호 작전(1969. 1. 10~1. 21)


청룡부대는 다낭 외곽에서 준동하는 베트콩의 섬멸작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1969년 1월 5일부터 승룡 7호 작전을 전개하였다. 제 2대대는 1월 10일부터 승룡 7-21호 작전을 전개하던 중 제 6중대가 1월 11일 다낭 서남방 25㎞지점인 ‘머우호아’ 마을 부근을 끼고 흐르는 ‘쿠엠쿠’ 강가에서 적의 식량 창고으로 보이는 대규모의 지하창고를 발견하여 쌀 4,846포(275톤)와 소금 50톤, 통조림, 국수, 땅콩 등 적의 식량과 용도품, 적문서등 다수의 적 보급품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7) 승룡 12-1호 (고노이 섬)작전 (1969. 6. 3. ~ 6. 19.)


다낭 남방 20㎞지점에 있는 고노이 섬은 청룡부대의 전술책임구역 내에 있는 적의 불굴의 요새지이며 각종 지상 및 지하시설로 된 수상보급의 중간기지로서 월맹군과 지방 게릴라 및 적의 하부조직이 자유롭게 활동해 온 공산군 활동의 요새지로 일컬어 왔다.


월맹군 제 36연대의 요새지인 고노이섬의 적을 소탕하고 라오스 국경에 이르는 4번 도로를 위협하는 적을 완전 섬멸하기 위하여 1969년 6월 3일 미명을 기해 여단급 탐색.소탕작전을 전개한 청룡부대는 미.월 연합군의 지원을 받으며 수륙양면과 공수투입 등 입체적인 기습공격 작전을 감행하여 지역 내의 적을 소탕하였다.


이 고노이 섬은 월남군과 연합군이 수차례의 대규모 작전을 시도했지만 적은 해상통로와 요새를 잘 이용하여 우군에게 여러 차례 타격을 주었던 까닭에 작전의 성공을 거두지 못한 난공불락의 섬이었으나 청룡부대가 처음으로 이  지역을 완전 소탕하여 261명의 적을 사살하고 포로 8명과 용의자 11명을 검거함과 동시에 개인화기 123정과 공용화기 6문을 노획함으로써 ‘디엔반’군과 ‘호이안’시는 외곽으로부터 적의 위협을 받지 않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8) 승룡 15-1호 (베리아 반도 상륙)작전 (1969. 9. 5. ~ 9. 30.)


인천상륙작전 이래 처음으로 한.미국 해병대가 연합으로 실시한 베트남전쟁 사상 최대의 증강된 여단급 상륙작전으로써 한국 해병대의 1개 연대 상륙단과 미국 해병대대의 증강된 1개 대대 상륙단이 미 제 7함대의 지원을 받아 감행되었다. 다낭 남방 30㎞지점에 있는 베리아반도는 월맹정규군과 혼성된 베트콩 주력인 지방게릴라들이 천연요새를 이용하여 오랫동안 다낭 일대의 군사시설을 위협해 왔는데 본 상륙작전으로 적을 소탕.섬멸하고 적의 지역사용을 거부하기 위하여 초토화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억류되었던 많은 양민을 구출하였다.

작전기간 중 255명의 적을 사살하고 포로 4명과 용의자 40명을 검거함과 동시에 개인화기 149정과 공용화기 3문을 노획하였다.


9) 황룡 2호 작전 (1970. 4. 1. ~ 4. 15.)


청룡부대 전술책임구역 일대의 베트콩을 탐색.섬멸하여 지역 내의 안전과 본격적인 평정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여단규모로 실시한 작전으로 본격적인 건기의 폭염을 극복하면서 지역 내에 있는 적의 활동을 완전 거부 또는 파괴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다낭시와 호이안 외곽방어를 위한 확고한 기초를 닦았다. 작전기간 중 67명의 적을 사살하고 포로 38명과 용의자 42명을 검거함과 동시에 중공제 82미리 박격포를 포함한 공용화기 4문과 개인화기 50정을 노획하였는데 이 작전은 베트콩 게릴라 대장과 간부급 38명을 생포한데 비해 아군 피해는 한명도 없었다는 작전의 성과가 높이 평가되었다.


10) 황룡 10-22호 작전(1970. 12. 2. ~ 12. 12.)


적의 제 4전선 사령부 전방기지가 위치한 여단 TAOR 서남방 케손 산악일대를 여단 잠정 작전 지역으로 인수받아 연속적으로 보병대대급 탐색작전을 전개하면서 호시탐탐 월남 제 2의 도시인 다낭시와 우군 진지를 기습하려던 적을 섬멸하던 중 12월 5일 제 2대대가 적의 무기 은닉장소를 발견.탐색하여 중공제 122미리 로켓 30문과 개인화기 4정 및 대전차 유탄포 포탄 등을 노획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 케손 산악지대는 해발 500-1000m의 고지군으로 형성되어 있어 라오스 국경으로 연하는 고지군을 이용하여 다낭 지역과 호이안 평야로 향하는 적의 주요 기동로였다.


나. 청룡부대의 작전 결과


건군 사상 처음으로 해외 원정군으로 장도에 올랐던 제 2여단(청룡부대)은 캄란만에 상륙한 이래 6년 5개월간 여단급 작전 66회와 대대급 작전 109회를 비롯하여 소부대 작전 151,347회를 통해 적사살 9,619명, 포로 및 귀순 1,256명 등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한편, 8,810톤의 구호활동 및 대민진료, 403,729명에 대한 교육지원, 1,593동의 건설지원, 450,064명의 친선활동 등 대민 봉사활동을 전개함으로써, 3회의 대통령 부대표창을 비롯하여 1회의 미 대통령과 월남 대통령의 부대표창을 받았다.


3. 해병대의 통폐합과 재창설


해병대는 창설 24년 6개월 만인 1973. 7. 10. 국방부 훈령 제 157호에 의거, 경제적 군의 관리.운영을 위해 해병대 사령부 및 교육부대, 행정, 군수지원부대는 해군에 통폐합되어, 각종 법률 등에 의한 임무와 권한이 상실되는 역경을 맞았으나, 해군본부 내 해군 제 2참모차장을 중심으로 해병참모부를 편성, 운영하여 군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국가와 민족에게 충성된 군대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결과, 1977. 1. 1. 도서방어부대를 모체로 한 제 6해병여단과 양성교육을 담당하는 제 2해병훈련단을 창설하였고, 제 1해병사단 전투근무지원을 담당하는 해안 지원단을 창설하였다. 또한 청룡부대가 월남에 파병되었다가 개선 귀국한 뒤, 서부전선 김포반도에 배치된 제 2해병여단을 모체로 하여 1981. 4. 16. 제 2해병사단을 창설하였다. 따라서 해병대는 온갖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불타는 용기와 끈질긴 인내로써 이를 극복하면서, 전투부대 위주의 전력건설에 매진하였다.


  가. 해병대 사령부 통.폐합


군의 유신과업수행을 위한 군 본연의 사명을 충실히 완수하고 군의 전투력 위주로 정비를 강화하여 자주국방태세를 조속히 확립하며 국가 자립 경제발전을 위해 경제적인 군으로 관리.운영하기 위하여 1973. 5. 29. 대통령 분부사항 및 1973. 7. 10. 해병대 운영개선에 관한 국방부 훈령 제 157호에 의거 해병대 효율적 운영을 위해 해병대 사령부가 해군에 통폐합되었다.


1) 통?폐합 경위



2) 해병참모부


가) 해병참모부 직능 및 지휘 체제


국방부 훈령 제 157호에 의거 1973. 10. 1. 해군본부 내 해병참모부를 편성.운영하여 해군참모총장을 보좌하고 제 2참모차장의 지시에 의거 해군의 상륙작전, 도서방어, 상륙전부대의 교육훈련과 교리발전에 관한 사항을 분장하였으며, 1987. 11. 1. 해병대 사령부 재창설시까지 14년간 해병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관리 하였다.

 
나) 통폐합 전.후 기구도




나. 사령부 재창설


1973년 10월 10일 경제적 군 운용을 목적으로 해병대 사령부 및 주요 지원 기구가 해체되고 해군에 14년간 통합 운용된 해병대는 해병의 전력관리상 문제점이 노출되어 상륙작전에 관한 지휘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이를 위해 해군에 해병부대를 통합 지휘할 기구인 해병대 사령부를 87년 11월 1일 재창설하였다.


해병대 사령부의 창설로 해병 특성에 맞는 부대관리 및 지휘 감독을 강화하는 한편, 해병대 사령부를 구심점으로 상륙작전 및 지상 기동부대 임무수행 등 장차 해병부대 운용개념에 부응하도록 하였다. 창설 당시 법적 절차를 거치지 못하고 부대령(대통령령)부대로 해병대 사령부를 창설시켜 모법인 국군조직법에 의한 법적 보장이 미흡한 상태였으나, 국군조직법 개정령 제 4249호(90. 10. 1.)를 통해 직제부대로 법적 지위가 보장됨으로써 해병대 사령부는 빛나는 해병 전통정신을 계승.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재창설 필요성은 해병 전력 관리상 문제점으로서

1) 해군참모총장의 지휘 부담 과중,

2) 해군.해병 간의 전문성 차이,

3) 해병부대 통합 지휘기구 부재,

4) 해병 고유의 특성에 맞는 교육훈련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해병 전력 관리상

1) 해군참모총장의 지휘폭 적정화,

2) 해병 특성에 맞는 부대관리, 지휘감독 강화,

3) 구심점 부여로 해병부대 사기 앙양,

4) 장차 해병부대 운영개념에 부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주요내용

해병대 사령부를 ′87년 11월 1일 재창설하며, 중요한 개편내용은

1) 해군본부 예하에 해병대 사령부 편성하고,

2) 총장은 해병대 사령관을 통해 해병대를 지휘하며,

3) 해병대 사령관이 해병대 예하부대를 지휘하는 것이다.


   1) 사령부 창설 기구도

 

   2) 지휘관리 개선


해병대는 작전 지휘체제를 보강하기 위하여 ‘부대령 부대’와는 그 위상이 다른 직제령 부대로서 해병대 사령부가 해병대 부대를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1990. 8. 1. 공포된 법률 제 4,249호 국군조직법 제 2조(해병대의 조직), 제 14조(해병대 사령부 설치 근거/임무)와 1990. 9. 29. 공포된 대통령령 제 13, 113호에 해병대 사령부 직제 제 1조(해병대 사령부 임무)에 의거 해병대 사령부는 육군의 군 사령부나 해.공군의 작전사령부와는 다르게 합참군령 계선상의 작전사령부이면서 해병대 운영에 관한 제반사항을 관장하는 군정사령부임을 법으로 보장하여 해병대의 특수성과 전문성을 인정하였다.


4. 덕산대이후 해병대 정책과 전략


가. 해병대 사령부 발안으로 이전


1987. 11. 1. 재창설된 해병대 사령부는 해군본부 부속건물인 기지병원을 개축하여 사용하던 중 1988. 4. 15. 재경부대 교외 이전계획에 의거, 경기도 서해안으로 해병대 사령부 이전을 결정하고 52개 지역을 대상으로 33회 검토하여  화성군 봉담읍 형제산 하록에 사령부 위치를 결정한 후 백년대계의 이전사업을 추진하였다. 사령부 신 청사는 1992. 4. 1. 기공하여 1994. 4. 6. 준공, 이전함으로써 해병대 전통정신을 계승하고 미래지향적인 해병대 역사를 창조하는 요람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나. 지휘관리 개선


1990. 9. 29. 공포된 해병대 직제령(대통령령 제 13,113호)에 따라 해병대 사령부의 임무가 명시되었지만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실질적인 지휘기능이 보장되지 않아, 1993년도 해병대 사령부 내 해병대 현안과제 연구팀을 발족하여 작전 및 부대지휘 시 문제점을 해본에 건의하였고, 현역과 예비역의 노력과 성원에 힘입어 1997년 12월 해군본부와 국방부에 해병대 지휘관리체제 개선위원회가 구성되어 1999년 1월 21일 해병대 사령관이 해병대 부대를 지휘하도록 법령 및 규정을 개정하였다. 조직 및 정원에 관한 통칙, 해병대 직제령, 군 인사법시행령, 국방기획관리, 예산 및 군수품관리, 국방보도 규정, 군무원 인사관리지침, 예비군 실무편람 등에 대한 법령 및 규정을 개정하여 해병대 사령관에게 위임함으로써, 미래전에 대비한 다목적 신속대응군으로서 해병대 위상을 제고하였다.


다. 교육훈련단


1991. 11. 1 해병대 양성교육 부대인 제2해병훈련단을 해병대 교육훈련단으로 개칭하여 교육부대에 적합한 일반형 참모형태에서 부장형 참모형태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1998. 3. 1 해병대교육훈련단에 해병대사관후보생 양성과정을 해군사관학교로부터 인수하고 장교교육대를 장교교육대대로 개편하여, 예하에 장교초군반 중대와 사관후보생 중대를 편성함으로써 해병대 장교양성 교육을 25년만에 해병대 주관으로 실시하게되었다.


라. 상륙지원단


1994. 4. 4 제1사단 해안지원단 해체한 뒤 사령부 직할부대인 상륙지원단을 창설하여 전.평시 해병대 전 부대에  대한 군수지원 전담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라. 다목적 신속대응군 준비


해병대는 소수 정예군으로서 임무와 역할이 다양하고 막중하다. 상륙작전, 지상작전, 특화거점 방어, FEBA 방어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국토방위의 전략적 요충지인 서북도서로부터 제주도 남단까지 여러 지역에 배치되어 있으므로 부대별 작전수행의 전문성과 부대 운영의 특성을 보장해야 한다. 따라서 21세기 해병대는 현재의 다양한 임무와 대비, 그리고 미래의 전장 환경에 적합한 다목적 신속대응군으로서 고강도 전면전으로부터 전쟁 이외의 작전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임무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상시 전투준비가 완료된 군대(Force in readiness)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장차전의 양상은 해상을 통한 전력 투사로 연안지역 중심의 작전이 전개될 것이다. 따라서 장차전의 양상에 대비하여 해상 및 수직 상륙돌격, 연안 도시지역 작전, 초수평선 입체 기동상륙 작전, 전략도서 및 전략기지 방어 작전 등의 교리를 발전시키고 있다.


마. 해병대 과학화.정보화 추진


해병대는 첨단 정보체계의 필요성이 요구됨에 따라, 미래 전장환경에 대비, C4I 체계의 기반 구축을 위하여 해병대 과학화.정보화 사업 추진계획을 설정,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해병대 C4I 체계를 국방 정보체계의 한 분야로 접속하여, 상륙작전과 지상작전, 도서방어 작전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한편, 해병대 야전 인트라넷(Intranet)을 구축하여 야전성 있는 통합 사무자동화 체계로 발전시키고 있으며, 상륙군 기동통제 장비(EPLRS) 등의 도입으로 21세기를 대비하고 있다.


아울러, 전술/전략훈련의 전술모의 체계(Simulation)를 추진하여 대대/연대, 사단급 부대의 전투 모의훈련을 활성화하고, 전차 및 자주포 등 전력 장비의 교육훈련 시에도 전투 모의장비를 적극 활용하는 컴퓨터 훈련 모델(CBT)기반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러한 과학화.정보화 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해병대는 관련 전문 부서의 보강 및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데 적극적인 지원과 투자를 하고 있다.
 
바. 한ㆍ미 해병구성군사령부 창설


한국과 미국은 한반도 유사시 해병대의 주도적 전투수행을 위한 연합해병구성군사령부(CMCC, Combined Marine Component Command)를 2월 20일 비공개리에 창설하였다.  합동참모본부와 주한미군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관진 합참의장과 버웰 벨 주한미군사령관/한ㆍ미 연합사령관은 2월 20일 제21차 한ㆍ미 군사위원회(MC) 상설회의를 열고 연합사 예하 연합해병사령부(CMFC)를 전구급 사령부인 구성군사령부로 확대해 이날 부로 창설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교환하였다.


 양측은 평시에는 한국 해병대사령관(중장)이, 전시에는 미 국가통수 및 군사지휘기구(NCMA, National Command and Military Authority)가 승인한 미 해병대 장성이 구성군사령관을 맡는다는 데 합의했다.  전시의 연합해병구성군사령관은 미 제3해병기동군(III-MEF) 사령관(중장)이 임명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합참 관계자는 “연합해병구성군사령부의 창설은 전시작전권 전환 준비를 위해 해병대가 전투수행사령부로 발전하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즉 연합사의 전력예비부대 성격으로 1992년 창설된 기존의 CMFC는 전시지원사령부였지만 새로 만들어진 CMCC는 전투작전사령부라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한ㆍ미 해병대가 전시 지원기능의 보조적 역할에 치중했다면 앞으로는 전시에 주도적으로 전투 수행 역할을 확대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 연합해병구성군사령부 창설은 한반도 유사시 대북 후방기습능력을 대폭 향상시킨 상륙군 사령부의 출범인데다 전작권이 전환되면서 한ㆍ미 연합사가 해체되더라도 상륙 돌격부대의 전투력은 더욱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중요성을 지닌다.


IV. 해병대 제도 발전기( 1998년이후--)


1. 해병대 발전을 위한 제언


해병대가 하나의 군사제도로 정착한 이유는 군사적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21세기에도 해병대의 생존과 발전의 군사적 요구는 증대될 것이다. 즉 미래전쟁 양상에 능동적으로 대응이 가능하고, 국내ㆍ외 안보환경에 가장 효용성이 높은 군대로 거듭나야 함을 말한다. 한국 해병대는 작지만 강한 군대로서 인식되고 있지만 대내외적으로 개혁과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한국 해병대는 평시 ‘다목적 신속대응군’으로서, 전시 ‘공세적 전략기동군’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공지기동해병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해병대 목표를 지향함에 있어서 당면한 과제를 식별하고 이에 대한 발전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가. 공지기동부대 건설


공지기동부대 건설은 해병대에게 주어진 가장 시급하고 가장 근원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 공지기동부대의 편성에는 많은 과제가 염출될 수 있으나, 한국 해병대의 공지기동부대화의 핵심은 해병대에 적정 규모의 헬리콥터 부대를 자체의 편성부대로 갖게 하는 것이다. 상륙작전용 헬기는 필요할 때 불러서 빌려 타는 임대용 수송기가 아니다. 상륙헬기는 상륙군의 기동과 생존을 책임지는 상륙전력의 핵심 전투 세력이다. 현대전에서 공중기동수단을 편성부대로 갖지 못하는 상륙군은 이미 상륙군이라 할 수 없다. 상륙작전의 성공은 지상전투제대와 헬기부대가 완벽한 호흡을 맞춘 팀웍이 절대적이다.


육군이 왜 공군의 지원을 받지 않고, 자체의 항공작전사령부를 두고 수백대의 헬기를 보유하고 있는가를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육군도 해병대를 지원할만한 헬기를 가질수 없고 함상과 바다를 통한 육지로의 헬기작전은 그들의 전문분야가 아니다. 또한 해군 조종사 역시 상륙군을 싣고 내륙의 목표를 찾아 기동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상륙작전에 요구되는 평소의 팀웍을 이루기 힘든 것이 치명적 결함이다.


국방개혁 2020 해병대 부대구조는 사단 예하에 항공대대가 편성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단 항공대대는 공격헬기 위주로 편성되어 공중기동 및 화력으로 지상 전투부대의 지원임무에 한정되고, 상륙작전시 상륙군을 목표에 전개시킬 수 있는 상륙기동헬기는 해군 항공사 예하의 상륙기동헬기전대를 편성하는 것으로 두고 있다. 이는 해군/해병대가 상륙작전을 위한 항공전력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불안정한 구조를 갖추고 있어 지휘권 관계나 운용상의 비효율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상륙기동헬기는 해병대 구조에 편성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제 곧 해군은 대형상륙함을 다량 보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여기에 실어야 할 해병대의 헬기는 없다. 한국 해병대의 가치와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지기동 부대화’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하며 해군ㆍ해병대의 공감대 형성이 중요한 시점이다.

 
나. 한국 단독상륙작전 능력 확보의 문제


국방개혁2020에 의하면 2020년까지는 한국 단독 여단급 상륙작전 능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각종 국방기획문서상에 언급되던 한국군 대대급 상륙작전 능력이 여단급 단독상륙작전 능력으로 조정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대단히 긍정적인 일이지만 여단급 단독 상륙작전능력이 무엇에 근거를 두고 설정되었는가에 의문이 있다.


현 연합사의 기본구상은 한반도에서 유사시에 북한군의 선제공격이 개시되면 적의 휴전선 돌파에 이은 전과확대 기도를 효과적으로 저지함으로써 수도권 전방으로 적 주력의 진출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반격여건을 조성한 다음 반격단계에서 동해안 또는 서해안에 대규모의 연합상륙작전을 실시하는 것이다. 이는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의 조직적인 방어를 거부함으로써 작전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적 격멸에 기여하도록 한다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개념은 전작권전환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이다.

 

반면 해병대는 전작권전환 이후 미 해병대와의 연합상륙작전은 현재 연합작전체제의 것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따라서 한국군 독자적으로 적 지역에 전략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상륙작전 규모를 염두에 두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 지정학적 특성 고려시 1개 상륙사단은 지상군 3~5개의 기계화 군단 이상의 전략적 효과를 가져올수 있다. 현행 한반도 전구작전 및 미래 주변국과의 안보환경을 고려 전략적 효과를 가져올수 있는 한국 단독상륙작전의 능력은 최소 사단급으로 상향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다. 상륙군 수송능력의 획기적인 증진


전시 작전통제권전환에 따라 한국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한ㆍ미 연합해병전력의 운용에도 변화가 예상되며, 미군은 해ㆍ공군을 중심으로 한국을 지원할 것이다. 그와같은 미 해군의 지원범주안에 미해병대 전력도 현재의 연합해병구성군사 수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미 해병대 전력이 수행하는 세계 분쟁지역에서의 역할을 감안한다면 현재의 수준으로 지원 및 증원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현재 연합해병구성군사에서 운용가능한 미 해병전력은 미 해군의 지원을 받는 해상ㆍ항공 전력을 포함하여 실전에 배치되어 있는 태평양사령부 예하 미7함대세력중 상륙전력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 있다.  또한 가용 상륙전력은 태평양사령부 예하의 미 3함대 세력중 일부와 본토로부터 계획되어 있는 해병대 예비전력 등이 포함되어 있어 한미 연합상륙전력은 그 규모와 작전의 융통성 면에서 한국방어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결정적인 규모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연합사 해체와 관련하여 한국방어에서 변화되는 상륙전력 운용방향에 따라 일부 또는 상당부분의 상륙전력 운용이 제한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앞에서 제기한 한국 해병대의 사단급 규모의 독자적인 상륙작전 능력을 확보하는데 있어서 항공전력과 더불어 획기적인 상륙군 수송전력 확보가 필수적이다.


라. 상륙함의 획기적인 증진


국가의 국력이 증대되고 대외적 평화와 안전보장활동이 확대되면서 군대도 본연의 임무 이외에도 전쟁 이외의 군사작전의 다목적 임무 수행역할을 요청받게 되었다.  전쟁이외 군사작전’에는 대테러전이나 비선형 저강도작전과 같이 준군사작전과 더불어 영토와 해상 관할권보호, 경제적 압력, 제3국 분쟁개입, 해상교통로보호, 국제마약밀매단속, 국제평화유지활동, 재난구조 및 건설, 인도주의적 지원 등도 포함되고, 해외공간이나 국가 주요시설 경비와 방호, 무력시위 등 기타활동도 포함된다. 해병대가 이러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해군의 전쟁외 군사작전 개념이 동시에 발전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한국해군 기동함대가 실시할 원정작전은 어떠한 능력을 요구받게 되는가? 무엇보다 다양한 능력을 가진 입체적 상륙작전 및 신속대응 능력에 부합된 상륙함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상시탑재하고 해상기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10,000톤 이상의 대형상륙함정(LPD)이 요구된다. 이러한 대형 상륙함정은 전시 작전만이 아니라 평시 각종 저ㆍ중도 분쟁에서의 해외 자국민 철수, 자연재난 구조 및 지원작전 등에 있어 매우 유용한 전력으로 간주된다. 필요에 따라 헬기상륙함정(LPH)도 대형 상륙함정 대체전력으로도 운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한국형 LPX 건조가 현실화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해상투사 전력인 해병대를 다목적 신속대응군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상륙함의 획기적인 증진이 되기를 바란다.


V. 결론


한국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조국광복기의 격동기에 신현준 사령관을 비롯한 380명의 선각자들에 의해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창설되었다. 창설후 불과 1년후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는 진동리전투와 통영상륙작전에서 연전연승함으로서 “귀신잡는 해병대”의 격찬을 받았고, 인천상륙작전을 거처 도솔산전투에서 용전분투하여 “무적해병”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1965년부터 6년여 동안은 월남에 파병되어 짜빈동 전투 등 수 많은 전투를 통하여 한국해병대의 용기와 명예를 세계에 떨치며 “신화를 남긴 해병”의 전통을 쌓았다.


오늘날 해병대는 서해 백령도에서 김포반도, 포항, 제주에 이르기까지 국가전략도서와 수도권 서측방을 방위하고,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작지만 강한 군대로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군의 존재논리의 기본이 되는 안보.군사환경은 너무도 많이 그리고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해병대 역시 빛나는 지난 반세기의 영광을 발판으로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해병대는 바다로부터 육지로 상륙하며, 그런 작전을 위해 훈련된 부대를 의미한다. 해병대 또는 해군보병이라는 이름으로 보유한 국가는 세계적으로 약40여 국가 있으며 ,역할을 보면 일반적으로 군의 속성인 상륙작전, 공격 그리고 방어와 관련된 법적으로 정립된 그 군의 고유의 설치목적으로부터 온다 할 수 있으며, 그 정확한 기능은 역시 군의 지휘계선상에 어디에 위치하여 임무를 부여 받느냐가 중요하고 통상 최고 군 사령관 또는 평시 국가 지도자로부터 받는다 할 수 있다.


평시 해병대의 정치적 역할 측면을 보면, 전투능력을 갖춘 해병대의 역할과 기능은 다른 군사전력과 다를 바는 없고, 전통적으로 상륙작전의 범주에서 그 역할이 발전되어 왔으나, 미국과 같이 군사전력의 일반적인 목적의 모든 영역까지 확대되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해병대 전력이 전평 시 언제든지 어떤 상황하에서 국가 지도자와 최고 군 지휘관으로부터 어떤 역할과 기능 그리고 임무 면에서 받아왔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해병대 전력의 전쟁 시 역할과 기능면에서 과거 냉전시의 서구유럽 동맹국들은 승리에 중요하게 기여하여 왔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해병대 전력이 해군력과 결합될 때 그 억제력은 증대함을 알 수 있다.


이런 해병대가 과거 전사를 통해 형성되어왔던 과정을 살펴보면, 미국의 경우 독립전쟁 발발로 인해 필요성을 인지하게 되어 1775년 약2개 대대규모로 출발이 되었으나 독립전쟁 이후 해체되었고, 다시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1798년 1개 대대 규모로 재 창설되었으며, 전쟁 이후 어려운 시기를 맞이 하였으나 1834년 해병대조직법이 만들어 지면서 해병대의 지위는 다른 군종과 동일한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그 후 1차 세계대전시 증편하여 항공전력을 추가 시켰고 2차 세계대전 때에는 태평양전쟁의 주 전력으로 운용되면서 약50 만명에 이르기도 하였지만, 전쟁 이후 다시 축소되어 7만여명에 이르는 어려움 속에 결국 1952년에 법적으로 3개 해병사단, 3개 비행사단의 조직을 보장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를 보면 전시는 비교적 상륙전력의 역할의 확대와 해병대의 능력이 우수함을 보여서 상륙전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나, 평시에는 역할의 축소 또는 타 군종과의 영역 갈등에서 힘의 논리에 의해 감축됨을 알 수 있었다.


우리 한국의 경우에도 상륙전력의 탄생은 전쟁전이기는 하나, 국내정세 안정화를 위해 1개 보병대대(-)규모로 창설되었고, 6.25전쟁 시에는 소규모로 확장되어 약 여단규모를 유지하다가 휴전 이후 한국군의 확장시기에 편승 임무에 맞는 규모로 2개 사단 1개 여단의 규모로 증대 되었다. 그러나 상륙전력을 수송할 수 있는 전력의 부족과 평시 역할미흡으로 올바른 역할에 제한을 받아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해병대는 21세기 안보환경하에서 소수정예를 특징으로 하는 해병대의 요구되는 임무를 수행하기에 매우 적합한 조직이며, 따라서 미래 해병대의 역할 역시 다목적 신속대응군으로 임무수행은 물론, 한반도 및 부속도서와 한국의 사활적 이익지역의 분쟁시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을 따라 적의 배후로 우회기동하여, 최소의 전투로 결정적 승리를 추구함으로써 아군의 전장주도권을 확보하고 공세이전의 여건을 조성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동시에 해병대는 평시 우발작전, 대테러작전, 재난구조, 평화유지활동 등 다양한 형태의 전쟁이외의 작전 임무에 유용하게 활용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병대가 이와같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해군과 함께  해양으로부터의 군사활동에 대한 개념, 교리, 전술, 훈련, 무기 및 장비하고 한반도에서의 상륙작전 수행능력을 더욱 혁신적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특히 국가가 요구하는 가장 융통성 있는 신속대응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해군의 해양력 투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해양전력으로서의 준비를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해병대가 해군과 함께 존재의 기반을 확립하고 해군의 강력한 해양투사 전력이 되었을 때, 국가는 전략기동기동부대로서 해병대의 능력과 역할을 더욱 분명히 인정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본 연구가 해병대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확대시키고 나아가 올바른 해병대의 역할과 기능발전을 위해  일조하기를 기대한다.


주제어: 6.25전쟁, 대한민국해병대, 해병공지기동부대, 베트남전쟁, 상륙작전,  무적해병, 진동리 작전, 통영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짜빈동작전

 

 참고 문헌


I. 국내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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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이후 해병대 연합성 강화방안 연구, 국방부정책연구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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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Establishment of the ROKMC and It's Development
                                  Kim, Hyun-Ki*

This Article attempt to provide a historically description of the establish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Marine Corps and it's development.
ROKMC was established on 15th April, 1949 at Chinhae Naval Air Base(Deoksandae) with 380 marines(Officers: 26, Non-Commissioned officers: 54, Enlistmen: 380).
During the Korean War, ROKMC carried out the combats of Kunsan, Iri, Janghang and then took part in Hamyang, JinJu, Jindongri, Tongyung battles. Just after Inchon landing and recapture of Metropolitan Seoul, ROKMC carried out Wonsan, Kosung, Hanheung combat and then took part in Andong, Yungduk, Yungwol, Hongchun, Hwachon, Dosolsan, Kim, Il-sung, Kimpo, Jangdan Campaigns.
ROKMC had a nickname of "Invincible Marines" with indomitable fighting spirit and   created glorious tradition at the first stage of the Korean War.

During the Vietnam War( 1964-72), ROKMC took part in war with US Marine Corps(USMC) against North Vietnam. The 2nd comabt group(another name Chungryong Troops) had 4,130 personnel(Officer: 208, Enlistmen: 3,9222) which fought various combat with  Chungryong 1st Opn., Haeryong Opn., Tra Bin Dong Opn., Yongdu Opn., The Loi Opn., Seungrong 7-21, 21-1, 15-1 Opns., Hoi An Opn., and Hwangrong Opn..
ROKMC wrote a record brilliant victory over North Vietcong with 9,619 killed in action(KIA), 687 prisoners of war(POW) through 151,437 times of small troop operations and 168 times of operations over battalion size. ROKMC even another nickname of "Korean Marines leaves myth to the world."

14 years of without HQs of  ROKMC, they recreated HQS of ROKMC on 1st of November, 1987 at Seoul just beside of Navy HQs. In order to effective operations of multi-purpose rapid reaction forces, Korean Marines moved to new base, Balan for the future development.
ROMC reformed , found and drive forwarded chain of command, Education and Training Group, multi-purpose rapid reaction troops, making IT and scientific Marines, and  Combined Marines Component Command(CMCC).

For the future developing and strong Marines, I would lie to conclded that ROKMC must solve the matters of issue as follow.
First, Creating Marine Air-Ground Task Forces(MAGTF) as Korean style as soon as possible.
Second, insurance of  Korean amphibious capability itself.
Third, epoch-making enhancement of transportation capability for Korean amphibious forces.
Fourth, appropriation enhancement of amphibious command, landing, transport ships for Korean Navy.

Key words: Korean war, ROKMC, MAGTF, Vietnam war, amphibious operation, Invincible marine, Jindongri operation,  Tongyung landing,  Inchon landing, Tra bin dong operation.

* Professor of  Kyonggi University

 


요약


한국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조국광복기의 격동기에 신현준 사령관을 비롯한 380명의 선각자들에 의해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창설되었다. 창설후 불과 1년후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는 진동리전투와 통영상륙작전에서 연전연승함으로서 “귀신잡는 해병대”의 격찬을 받았고, 인천상륙작전을 거처 도솔산전투에서 용전분투하여 “무적해병”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1965년부터 6년여 동안은 월남에 파병되어 짜빈동 전투 등 수 많은 전투를 통하여 한국해병대의 용기와 명예를 세계에 떨치며 “신화를 남긴 해병”의 전통을 쌓았다.


오늘날 해병대는 서해 백령도에서 김포반도, 포항, 제주에 이르기까지 국가전략도서와 수도권 서측방을 방위하고,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작지만 강한 군대로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다.


평시 해병대의 정치적 역할 측면을 보면, 전투능력을 갖춘 해병대의 역할과 기능은 다른 군사전력과 다를 바는 없고, 전통적으로 상륙작전의 범주에서 그 역할이 발전되어 왔으나, 미국과 같이 군사전력의 일반적인 목적의 모든 영역까지 확대되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해병대 전력이 전평 시 언제든지 어떤 상황하에서 국가 지도자와 최고 군 지휘관으로부터 어떤 역할과 기능 그리고 임무 면에서 받아왔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해병대 전력의 전쟁 시 역할과 기능면에서 과거 냉전시의 서구유럽 동맹국들은 승리에 중요하게 기여하여 왔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해병대 전력이 해군력과 결합될 때 그 억제력은 증대함을 알 수 있다.
리에 의해 감축됨을 알 수 있었다.


이렇듯 해병대는 21세기 안보환경하에서 소수정예를 특징으로 하는 해병대의 요구되는 임무를 수행하기에 매우 적합한 조직이며, 따라서 미래 해병대의 역할 역시 다목적 신속대응군으로 임무수행은 물론, 한반도 및 부속도서와 한국의 사활적 이익지역의 분쟁시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을 따라 적의 배후로 우회기동하여, 최소의 전투로 결정적 승리를 추구함으로써 아군의 전장주도권을 확보하고 공세이전의 여건을 조성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동시에 해병대는 평시 우발작전, 대테러작전, 재난구조, 평화유지활동 등 다양한 형태의 전쟁이외의 작전 임무에 유용하게 활용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병대가 이와같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해군과 함께  해양으로부터의 군사활동에 대한 개념, 교리, 전술, 훈련, 무기 및 장비하고 한반도에서의 상륙작전 수행능력을 더욱 혁신적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특히 국가가 요구하는 가장 융통성 있는 신속대응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해군의 해양력 투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해양전력으로서의 준비를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해병대가 해군과 함께 존재의 기반을 확립하고 해군의 강력한 해양투사 전력이 되었을 때, 국가는 전략기동기동부대로서 해병대의 능력과 역할을 더욱 분명히 인정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본 연구가 해병대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확대시키고 나아가 올바른 해병대의 역할과 기능발전을 위해  일조하기를 기대한다.

 
출처 : 해병대 전략연구소, 해사23기 예비역해병대령 김현기 이사님 

         http://www.rim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