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거나 말거나 해병대 야사 2.
해군 사관학교로부터 해병대로 넘어 온 장교는 해사 정규 4년을 마친 8기생부터였다. 그러나 임관을 하자 이미 휴전이 되어 참전의 기회는 없었다. 그것은 마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해당하는 육사 정규 11기 기수와도 엇비슷했다.
그러나 해병대로 온 두 선배 중 한 분은 일찍 작고를 하셨고 다른 한 분도 일찍 제대를 하셔 크게 해사 출신 후배들에게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고 한다.
내가 월남에서 전투를 할 때는 유일하게 해사 출신으로 9기이신 박진구 중령(작고)께서 이화출(해간 7기. 작고) 중령의 뒤를 이어 청룡부대 5대대장을 하셨고 그 뛰어난 능력은 실로 전장에서 발휘 되었었다.
물론 미국 해군 참모 대학에까지 가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수석을 할 정도의 실력파라 영어 구사도 월등했고 또 다방면에서도 평범함을 훨씬 넘어섰기 때문에 실로 내가 가장 존경했던 선배셨다.
사실은 나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도 월남전에서 혁혁하게 공을 세운 분이 1차 대령 진급에서 누락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으랴?
선배께서는 어떤 결심이 계셨는지 바로 모자를 벗으시고 국방대학원에서 교수로 재직을 하시다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던 것이다.
해사 10기생 이후 해병대를 지원하는 장교들의 수가 점점 20여명 남짓까지 불어나다 결국은 해사 14기에 이르러서는 무려 50여명의 장교가 임관 후 해병대로 지원 해 넘어왔다.
추라이와 호이안 전투 전후 청룡부대에는 중대장이라면 거의가 해사 14기요 소대장이라면 거의가 해간 35기였다.
또 해간 35기는 후보생 때부터 중대장이 해사 14기였기 때문에 더구나 인연이 많은 것으로 여겨졌고 특히 나는 실무에서도 헌병 장교 중 유일하게 해사 출신이셨던 윤춘웅 선배(미국 이민 후 작고)와 함께 근무를 했었는데 그 분 역시 해사 14기셨다.
좀 더 나의 개인적인 얘기하자면 물론 내가 해병대로 늦게 들어 와 외인부대 같은 해간 35기가 되었지만 해사 17로 임관을 해 해군과 해병대의 소장까지 지낸 두 사람들이 모두 내 중고교 동기생들이었고 해병대에서 대령으로 예편한 다른 한 사람도 실은 그러했다.
특히 해간 35기를 외인부대라고 별칭 하는 것은 같은 동기생끼리의 학번이 많게는 무려 5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 특징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 있다가 입교를 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 연임 국민투표라는 정치적인 논간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며 1940년 41년생으로 대학을 마칠 때까지 군 입대를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모두 보충력으로 군대를 가지 않게 하겠다는 공약에 현혹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사 군 당국은 창원에 훈련소를 하나 더 만들어 결국 모두 영장을 발부했고 많은 보충력 해당자들은 새삼 사병으로 가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있어 결국 장교를 지망하고 들어 온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바로 해간 35기에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 해사 14기와의 인연을 열거하자면 위에서 말했다시피 후보생 때의 중대장이셨던 분이 해사 14기요 월남에 가서 처음 만난 중대장도 14기요 그 후임으로 오신 분도 역시 14기셨을 뿐 아니라 결국은 서울지구 헌병대에서도 보좌관이셨던 분이 바로 앞에서 말한 해사 14기 윤춘웅 소령이셨다.
그런데 당시는 대위의 진급이 임관 후 5년으로 되어 있기는 했으나 대한민국 육해공군 해병대에서 유독 해간 35기만은 진급이 빨라 나중에는 한 동안 해사 14기와 동 계급으로 대위가 되어 말하자면 윤춘웅 선배와 한 동안은 같은 대위 계급장을 달고 함께 서울지구 헌병대에서 근무를 했으니 해프닝이 아닐 수 없었다. 즉 해간 35기는 해사 20기와 같은 해에 임관이 된 사람들인데도 해사 14기와 한 동안 동 계급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실은 해병대의 사정은 이러했다. 당시는 포항의 사단과 김포의 여단 그리고 백령도의 증가 된 대대 병력 밖에는 전투 부대가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1개 여단 병력을 파월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 비록 사전 준비는 조금씩 해 왔지만 너무 병력에 많은 차질이 생겼고 특히 위관 장교가 더 문제였다.
내 동기생은 병과가 포병이었는데 나와 함께 1966년 9월 백령도에 처음 배치를 받아 중화기 중대의 소대장을 했다. 그는 2년 후 중위가 되어 포항으로 발령을 받아 가게 되었는데 막상 포항을 가보니 포병대대에 위관 장교가 안 보이는데다 너무 썰렁해 이상한 느낌마저 들더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많은 병력이 월남 행을 했고 대위는 씨가 말라있었다는 것이다. 이윽고 대대장에게 신고를 하니 갓 중위가 된 그를 보고 포병 중대장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더라는 것이다.
그는 얼떨떨해 “대대장님 저는 백령도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주력 포인 105미리 포도 한 번 본 적조차 없는데 어떻게 중대장을 할 수 잇겠습니까? 정 피치 못할 사정이시라면 저에게 1주일의 시간을 주시면 그때 가서 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승낙을 받은 내 동기생은 마침 훈련을 하는 다른 중대에 빌을 붙어 일주일간을 열심히 따라다닌 후 중대장을 했다는 얘기가 있다.
1965년부터 당시 월남전으로 인해 갑자기 필요했던 것은 위관 장교였다. 전사자와 부상자로 소대장의 결원은 자꾸 생기는데다 또 장기로는 중대장 요원까지 걱정을 안 할 수 없어 결국 고심 끝에 해간35기 부터는 훈련 기간을 6개월에서 3개월로 줄이고 그 후 해간38기까지의 모집 및 임관 시차를 매 기수마다 1년이던 것을 3개월로 줄여 마구 양산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맨 앞줄에 선 해간 35기는 크게 진급의 덕을 보았고 별도로 3년의 근무를 마치고 제대를 해야 했던 해간 32기는 제대를 안 시켜 주는 대신 바로 대위 진급을 2년 앞당겨 해 주기도 했던 것이다.
내가 전투를 치열하게 했던 시기 월남에서는 소대장이 한 사람 죽거나 부상을 당하면 소대장 거의 모두가 내심 “그 새끼는 왜 그랬어!”하고 뒤돌아 불평을 했다.
말하자면 전투 소대장이 한 사람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하면 학수고대 교대를 바라던 소대장의 후방 배치가 한 달에 한 번씩 들어오는 배로 인해 한 달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파급 효과는 직간접적으로 다음과 다음의 차례로 이어져 실로 생명을 부지하는데 큰 불안감을 안겼던 것이다.
당시 해병대 사령부에서는 너무 급하다는 것을 깨닫고 앞에서 말한 대로 양산을 했는데 내가 부중대장을 잠시 할 때는 너무 소위들을 많이 보내 부소대장까지 있는 형편이어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또 부소대장은 함께 작전은 나가도 지휘권이 없으니 마치 사병이나 전령 밖에는 안 되는 꼴인데다 임관은 선임이라 할지라도 월남에서는 도착순이라 어떤 경우 후배 아래 부소대장을 해야 했으니 말이 아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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