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글/해간35기 구문굉

믿거나 말거나 해병대 야사 1.

머린코341(mc341) 2015. 10. 26. 00:27

믿거나 말거나 해병대 야사 1.


조기 철을 연평도나 백령도에 있는 사람들은 작사 철이라 했다. 그리고 1960년대 초기만 해도 연평중대 중대장을 하면 서울에 집한 채는 산다는 소문이 있었다.


당시는 어선들이 모선을 바다에 두고 잡은 조기들을 계속 퍼 담아 가게 하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고 조기를 잡으면 거의 모든 배가 연평도로 일단 들어 와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그 배의 수는 작은 돛단배까지 모두 합치면 모두 1.500여척을 넘을 정도라고 했다.


그런 가운데 또 일단 조기를 잡아 연평도로 되돌아오는 배의 수는 매일 500여척이라 했으니 출항증을 끊어주는 해병대로서는 그 책임이 막중할 뿐만 아니라 아침이면 서로 빨리 조업을 위해 나가야 하니 자연히 급행료도 본의 아니게 챙기는 수가 많아 아예 어떤 경우는 따블 백을 옆에다 두고 출항증을 끊어 주어야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고 나중에 보면 따블백 안에 돈이 가득했다는 말이 있다.


1966년 내가 백령도에서 인사 장교로 근무를 했을 때는 북한에서 작사 철을 맞아 연평도 근해로 가기 위해 4월경이면 장산곶을 거쳐 백령도 앞바다로 배들이 이동을 하는데 그 무리가 약 400척에서 500척 정도가 되며 꼭 야간에 이동을 하는 것은 물론 약 한 달 후가 되면 되돌아 지나간다는 것이 당시 참모 회의에서 하는 정보 장교의 보고였다.


그리고 당시의 연평중대에서는 배가 입항을 할 때는 배들로부터 조기를 얻어 모두 사병들이 굴비를 만들었는데 다른 시설이 없어 바위 위에 얹어 뒤집어가며 말렸다고 한다. 문제는 뒤집는 것은 괜찮지만 손으로 눌러 버리면 그만 상하게 된다고도 했다.


내가 백령도에 있었을 때는 홍어를 말려 사령부에 진상을 했다. 백령도에는 당시 낚시 배 정도 밖에는 없고 또 조기는 잡아봐야 알을 낳고 연평도로부터 북상을 해 기름기가 없는 탓에 부스러져 굴비를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대청도와 소청도에 파견대가 나가있었기 때문에 홍어를 얻기가 쉬웠을 것으로 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시는 대청 어장이라는 말이 방송으로도 나올 정도라 그 근해에는 배들이 크게 조업을 하는 곳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가을이면 백령도에 있는 도서부대 본부에서는 홍어를 말려 부부대장 지휘 아래 사령부에 진상을 했는데 말린 홍어가 얼마나 컸던지 놀랄 정도였다. 그러나 제일 신경을 쓰는 것은 뭐니 해도 벌레가 생기는 것이라는 것도 나는 그곳에서 처음 알았고 홍어 찜도 백령도에서 처음 먹어 보았다.


사실 내가 살던 고장에서는 가오리는 별미로 먹지만 홍어는 구경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신기해 보이기도 했고 요즈음이야 국내산 홍어가 4,5십 만원이 간다고 하지만 그 당시는 만만한게 홍어 X라는 말이 있듯이 백령도로 가려고 인천 해안에 가면 그 수많은 대포집 진영장 안에 벌겋게 무침을 해 놓고 펼쳐 놓은 것이 모두 홍어 무침이었다.


나는 별로 매운 음식을 안 먹었기 때문에 보기만 해도 저렇게 맵게 무침을 해 놓았는데 과연 먹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싶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의 주역이었던 박 선배는 우리 헌병감실의 헌무과장을 하신 분이다. 또 훨씬 그 이전에는 연평 중대장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듣기로는 위장이 안 좋아 늘 상 신경이 날카로우셨다는 말도 들었다. 아마 중정으로 가신 것이 1968년 내가 월남전에 참전을 하고 있었을 때였을 것이다.


해병대 장교끼리의 피치 못한 살육.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고 사격 선수로 아시아의 왕이었던 안재송 선배는 해간 34기의 중대장을 하신 분이셨다.


물론 청와대 경호실 차장으로 계셨던 정인영 선배는 박 선배와 동기셨고 안재송 선배는 그보다 후배셨다.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면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절로 생각이 난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