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기(‘51년) - 소양강 수색전의 수훈자 계병도 중령
군산 장항지구 전투 때 932부대(전투정찰대)의 분대장으로서 활약했던 계병도(桂炳道)씨. 통영상륙작전 때 1개 분대의 정찰조를 지휘하여 거제도 서해안을 정찰했던 계병도 분대장, 그는 51년 5월 해병제1연대의 소양강 연안 수색전에서 중공군에 생포된 2명의 미군 조종사를 구출하는 전과를 거두었고, 924고지 탈환 최후의 날(51.9.3)엔 주공부대(3대대 9중대)의 지휘관으로서 수훈을 장식한 역전의 용사이다.
일본해군 경력자인 계병도(桂炳道)씨(1925년 평복 선천에서 출생)는 8.15 후 귀향을 했으나 신의주 학생 의거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간 옥고를 치른 다음 단신으로 월남, 해안경비대에 입대(해군8기)한 후 해병대의 진주 주둔기에 해병대로 전입, 하사관교육대의 간부요원으로 근무하다가 50년 7월 고길훈 부대가 군산(群山)으로 출동할 때 수색소대에 편입되어 해병대의 처녀작전인 군산 장항지구 전투 및 운봉 함양 진주지구 전투와 진동지구 전투를 거쳐 통영상륙작전에 참가했는데, 특히 통영상륙작전때 계병도 분대장은 김성은 부대의 본부(함정)가 위치한 지도(地島)에서 거제도 서해안을 정찰하라는 명령을 받고 1개 조의 대원들을 이끌고 그 임무를 수행했는데, 그 결과 경찰관들이 지키고 있는 거제도에는 별다른 적정이 없었고, 통영에서 헤엄을 쳐서 견내량을 건너 왔다는 수상쩍은 군인(육군)이 있다기에 육군 방첩대 소속으로 고성(固城)으로부터 통영으로 쫓겨 왔다고 말한 그 이 모 상사를 대동하고 귀대했는데, 그 이 모 상사는 자신의 원에 따라 해병대에 입대했으나 도솔산 전투에서 전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병 제1연대가 소양강(昭陽江) 연안 일대에서 수색과 정찰전을 전개했던 시기는 화천(華川)에서 홍천(洪川)으로 철수한 후 송정리에 지휘소를 설치했던 51년 5월 하순경이었다. 그런데 그 기간 중 9중대 선임장교 계병도 소위와 화기소대장 오정근(吳定根) 소위는 1개 소대의 병력을 이끌고 강변을 수색하던 중 풀숲에 숨어 있는 중공군 1명을 생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종이에 民主主義好(민주주의호)란 글자를 써 보이는 그 중공군이 손으로 가리키는 강 건너편 마을에 대한 수색전을 벌인 끝에(화기 소대장은 강변에서 엄호) 낙하산으로 뛰어 내리다가 다리를 다친 몸으로 중공군들에게 생포가 되어 들것에 실려와 뉘여져 있는 2명의 미군 조종사를 구출하는 한편 굶주림으로 인해 일어설 기력조차 없는 10여 명의 나이 어린 중공군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 미군포로들은 해병들을 보자마자 우군인줄 알아 차리고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짭짭”하며 입맛을 다시기에 한 대원이 건빵 봉지를 뜯어 통채로 건네주자 게눈 감추듯이 다 먹어치우고선 더 달라는 눈치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구출된 미군 종사들은 즉각 무전기로 대대본부에 연락을 취해 고문관이 구급 헬기를 보내 야전병원으로 싣고 가고 대원들과 함께 강을 건넌 그 10여 명의 중공군 포로들은 그들을 심문하는 기관원들에게 전쟁이 끝나게 되면 자유중국(대만)으로 가기를 희망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51년 8월 31일에 공격을 개시했던 924고지 탈환작전이 9월 3일 3대대 9중대(주공)와 1대대 3중대(조공)에 의해 완전히 점령된 시각은 정오경이었으며, 바로 그 날 아침 부상을 입고 후송된 중대장(강복구 중위)을 대리하여 9중대를 지휘했던 계병도 선임장교(소위) 군산 장항지구 전투로부터 장단지구 전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지만 그 날처럼 무운이 빛난 적은 없었을 것이다.
군복무기간 중 자타가 공인하듯 성실의 대명사처럼 근무했던 계병도 중령 유감스럽게도 연합참모본부(지금의 합참)에서 근무할 때인 61년(5.16군사정변 직후) 합참에서 계병도 중령을 부정축재위원회의 조사위원으로 파견 근무케 한 것이 화근이 되어 그를 제거하려고 한 그 어떤 강력한 세력에 의해 아무런 영문도 알지 못한 채 하루 아침에 무능장교 심사위원회에 회부되어 군복을 벗게 되는 기가 막히는 변을 당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오정근 장군(해간3기 동기생)의 각별한 도움으로 62년 박태준(朴泰俊) 장군(육사2기)이 사장으로 재임 중인 대한중석의 간부사원으로 입사하게 되었던 계병도 중령은 그것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어 그를 신임하게 된 박태준 사장이 68년 POSCO(포항제철)을 건설할 때 그를 포철의 총무부장으로 기용,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대(大) 포철의 총무를 관장케 했고, 그 후 더욱 두터운 신임을 받게된 그는 약 10년 간의 포철 봉직기간 중 박태준 회장의 절대한 신임을 받는 가운데 감사역까지 역임하는 능력을 발휘했었다.
한편 00년 포철에서 물러 나와 포철 협력업체인 대성기업(중소기업체)을 설립했던 계병도 중령은 현역 때 가까이 모시고 근무한 적은 없었지만 일생을 깨끗하고 정의롭게 사신 신현준 사령관을 존경했던 나머지 포철에서 1사단장 박구일 소장이 요청한 신현준 사령관에 대한 생활 보조금 지원 요청을 불가피한 사정으로 받아드리지 못하고 있을 때 조금이라도 어려움을 덜어 드리고 싶은 생각에서 선뜻 그 일을 맡아 실행했을 뿐 아니라 그가 중병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을 때는 자식들에게 내가죽더라도 잊지 말고 그 어른에 대한 생활보조비(월 50만원)을 꼭 송금해 드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선친으로부터 대성기업을 물려받은 3남 계성열(桂成悅)씨를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현재 신현준 장군은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지만 그 유언을 지금도 지키고 있다고 하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인이 타계한 날자는 94년 5월 27일 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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