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기(‘51년) - 아들에게 들려준 이야기 이동성 대령
여기에 공개하는 이야기는 그로부터 먼 훗날 이동성 대령이 그의 외아들(이태선)에게 들려 준 자신의 성장 배경과 입대 배경 및 구사일생(九死一生)한 화천지구 전투 때의 아찔했던 무용담과 복부로 들어가 등 뒤쪽에 박힌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미군 이동외과병원(부산)에서 그 총알과 화진포(花津浦)의 김일성(金日成) 별장에서 뜯어 온 러시아 혁명 그림(유화) 한 장을 미군 군의관에게 준 이야기와 자신의 결혼 배경담 등인데, 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대충 다음과 같다.
즉, 1928년 평북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 부친을 여의고 편모 슬하에 자라났던 이동성 대령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요정을 경영하고 있던 모친의 뒷바라지로 만주로 건너가 봉천(奉天) 동광 중학교에 입학했다고 하는데(안주에서 봉천까지 걸어서 갔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음) 신체가 강건하여 럭비 선수가 되었던 그는 시합이 끝나기만하면 의례 일본인 학생들과 싸움박질을 하다보니 ‘쪼인트’를 까이지 않게 하기 위해 평소 무릎 밑(정강이)에 부피가 두터운 수학책을 끈으로 동여 매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동광중학교를 졸업한 수 8. 15해방을 맞이하여 귀향을 했던 이동성 대령은 세상이 무서운 공산주의 천하로 돌변한 가운데 모친이 별세하고 소작인들의 밀고(密告)가 잇따르자 고향땅을 등지기로 결심, 46년 1월 중순경 단신으로 월남하여 오갈데가 없어 해군의 전신(前身)인 해방병단에 입대(해군1기)한 것이라고 했고, 화천지구 전투 때 겪었던 상황에 대해 그는 특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얘기를 했다고 한다.
즉 혼전의 와중에 복부에 적탄을 맞고 쓰러졌을 때 오른쪽 허리에 차고 있던 대검은 빼앗겼으나 왼쪽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은 (왼손잡이가 되어) 그들 (2명의 중공군․장교와 사병)의 눈에 띄지 않았던지 빼앗기지 않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국방군 해병대 장교를 포로로 잡았으니 미군 장교 다음으로 많은 돈(포상금)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며, 왼쪽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으로 중공군 병사를 쏴 죽이게 된 것은 갑자기 ‘쾅!’ 하는 총성과 함께 자기에게 총뿌리를 겨누고 있던 덩치가 큰 장교가 ‘으악’하는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순간 깜짝 놀라 복부의 통증을 참으며 일어나 앉고 보니 (덩치 큰 중공군 장교를 쓰러뜨린 사람은 중대장 이동성 중위의 전령 고두규 해병이었음) 역시 깜짝 놀란 중공군 병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기에 지체없이 왼쪽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 들고 실탄이 떨어질 때까지 정신없이 쐈다고 말하면서 만약 왼손잡이가 아니었더라면 그와 같은 기적적인 결과는 초래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선지구에서 후송이 되어 입원을 했던 병원은 부산에 잇는 MASH(미 육군이동외과병원-Movile Army Surgical Hospital)이었고, 그 병원에서 복부로 들어가 등 뒤쪽에 박힌 총알을 제거했는데, 제거된 그 총알은 수술을 담당했던 미군 군의관이 기념으로 갖고 싶다고 말하기에 고통을 없애 준 것이 너무나 고마워서 그 총알 뿐 아니라 화진포(花津浦)에 있는 김일성 별장에서 뜯어 온 (50년 11월 하순 고성지구 전투 때) 러시아 혁명과 관련된 그림(유화) 한 장까지 주고 말았는데 그 그림을 주지 않고 가지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도 피력했고, 그 때 미군 군의관과 대화가 가능했던 것은 봉천 동광중학교에 다닐 때 근로봉사 시간에 일본군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미군 포로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끝으로 이동성 대령이 아들에게 한 결혼 배경담은 이러했다. 즉 해안 경비대시절(47년) 소해정 507호의 갑판하사관으로 근무했던 이동성 대령은 자신의 짐(사물)을 맡겨 둘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어 직속상관인 507호 정장 송석호 중위(해사1기)의 관사(진해)에 맡겨 두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후일 (55년 대위 때) 진해여고를 나온 송석호 중령(후일 제독이 됨)의 누이동생과 결혼을 했다는 것이 그 배경담의 개요이다.
강원도 속초에 거주하고 있는 고인의 외아들 이태선씨(48세 회사원)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중․고등학교 시절에 이러한 얘기를 아버지로부터 직접 전해 들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기회를 통해 아버지에 대한 좋은 추억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 것을 매우 반갑고 고맙게 여긴다는 말을 필자에게 했다.
이동성 대령이 상사의 계급으로 해군에서 해병대로 전입했던 시기는 해병대의 창설기인 49년 3월이었으며, 사령부 작전에서 근무하던 중 해간1기 전형시험에 합격하여 육사 위탁교육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50. 1)했던 그는 소대장을 거쳐 6. 25전쟁 기간 중 3대대 S-1으로 임명되어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시 고성(高城)지구 전투와 양덕(陽德)지구 전투에 참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1. 4후퇴 후 3대대 10중대장으로서 영덕 영월지구 전투와 가리산(홍천지구)전투에 참가했던 그는 화천지구 전투에서 중상을 당함으로써 그 이상 전투부대에 발령 받지 못하고 69년 대령의 계급으로 예편할 때까지 대대장, 전차 대대장, 하사관 학교장, 상남훈련대장, 연대장, 해병학교장 등을 역임하는 가운데 강병 육성과 모군의 발전을 위해 기여했다.
그런데 특히 진해지구에서 근무할 때 이동성 대령은 야간에 지프차의 헤드라이트를 이용한 노루사냥을 즐겼고, 따라서 그만큼 녹혈을 많이 마셨으나 그것이 영약이 되지 못했던지 애석하게도 52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이 자리를 빌어 필자에게 이런 내용의 자료와 이 지면에 게재된 사진을 제공해 준 이태선 씨에게 깊은 사의를 표한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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