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기(‘51년) - 사지를 탈출한 박희태 대령
일본해군 경력자의 일원으로 1946년 2월 창군기의 해방병단에 입대(해군1기)한 후 6.25전쟁 때 해간3기로 임관했던 박희태(朴熙泰)대령(1926년생). 그는 일찍이 여순(麗順)사건 때부터 사선(死線)을 내집처럼 넘나들기 시작했고, 4개의 급성충무훈장이 입증하듯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많은 전공을 세운 역전의 용사이며, 특히 6중대 본부가 피격을 당했던 덕산동(영덕군 달산면) 계곡지대에서 적에게 포위를 당해 생포가 되었던 그는 그 엄동설한에 한밤 중 펜티만 걸친 채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 구사일생 생환을 했고, 대우산 공격전에선 처음으로 진내사격을 요청하여 위기를 극복했던 그는 또한, 장단지구 전선에선 빈번히 기습대를 내 보내라고 지시하는 대대장 앞에 안전장치를 푼 권총을 내밀며 “더 이상 대원들을 죽일 수가 없으니 차라리 이 권총으로 저를 쏘십시요”라고 말했을 정도로 부하 대원들을 아낀 지휘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49년 3월 창설기의 해병대에 전입, 병조장(상사)의 계급으로 2중대 1소대장으로 임명되어 1기 신병들의 훈련에 임했던 박희태 대령은 육군 진압부대에 의해 여수시가 탈환되던 48년 10월 27일 신현준 중령(당시 통제부 참모장)이 지휘하는 임시함대에 소속된 JMA305정의 승조원으로써 거문도(矩文島)에 상륙하여 다음과 같은 실적을 거두었다는 증언을 한 적이 있었다.
즉 여수 부근의 많은 섬 가운데 거문도에 약 30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상륙, 반군(叛軍)들과 지방 폭도들이 열고 있는 인민대회에 민간인 복장으로 침투하여 그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다가 대담하고 민첩한 작전으로 30여 명의 반군을 무장해제시켜 육군 진압부대에 인계함으로써 훈장까지 탔다고 그는 증언 했었다.
인천상륙작전 때 2대대와 인연을 맺게 되었던 박희태 상사는 9월 21일 미 해병5연대에 배속이 된 2대대가 행주로 도강, 전진하는 우군부대의 측후방 경계부대로서 고양군 일대의 적 패잔병 소탕작전을 수행했는데 그 때 중화기중대 화기소대장으로서 능곡 부근의 산간부락 수색전에서 40여 명의 패잔병을 사살하고, 고양군의 여성동맹위원장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던 박희태 상사는 수도탈환작전과 남양주지구 차단작전을 마친 해병대의 주력부대가 원산(元山)으로 출항할 때(10.17) 목포로 떠난 2대대가 영암지구에서 적 패잔병 소탕전을 벌이고 있을 때 해간3기 후보생으로 선발되어 제1차로 육군종합학교를 거쳐 견습사관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다시 2대대 중화기중대에 배치되어 영덕지구 전투에 참가했는데, 51년 2월 6일 이동 중에 있던 6중대 본부를 비롯한 일부 병력이 덕산동 계곡에서 피격을 당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던 그 날 1개 기관포반과 함께 6중대에 배속이 되어 있었던 그는 사지(死地)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적에게 2중 3중 포위를 당한 절대 절명의 상황 속에서 생포를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러나 무장 해제를 당한 다음 군복과 신발까지 홀장 벗긴 알몸으로 빈집에 갇혀 추위에 부들부들 떨고 있던 그는 그를 감시하고 있던 경비병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하늘이 돕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필사적인 탈주를 결행한 끝에 구사일생 본대로 생환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영월지구 전투와 가리산 및 화천지구 전투를 거쳐 도솔산지구 탈환작전에서 참가했던 박희태 대령은 특히 도솔산 북방에 있는 대우산(大愚山.△1178) 공격전에서 해병대에서는 처음으로 진내포격(BOXMEIN)을 요청하여 5중대가 처해 있던 위기를 극복하는 전례(前例)를 남겼다. 그 날(51.7.8) 박 소위가 진내사격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5중대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확보한 무명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지키기 위함이었는데, 조명탄(박격포와 야포)의 지원 하에 결사적으로 방어하고 있던 급편방어진지가 적의 포위망 속에서 사상자가 속출하자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부득불 중대본부에 나와 있는 미 해병대의 포병관측장교에게 손짓 몸짓과 서툰 영어로 아군 병사들은 진지 안으로 들어가게 할테니 진지 안팎에 포탄을 떼려 달라고 간청을 거듭한 끝에 진지 주변에 대대 3발의 포탄을 퍼부었다고 하는데, 날이 밝은 후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 일대에는 30여 구의 참담한 적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해병제1연대가 장단지구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52년 8월 중순경 1대대 2중대장이었던 박희태 중위는 2중대에서 운용한 3소대(소대장 임성도 소위)의 야간 매복대가 67고지 좌측 철로 옆으로 접근해 오는 적 정찰대를 요격하여 부상을 입고 쓰러진 중공군 1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는데, 2중대에서 포로를 획득하게 되자 1대대장 남상휘 중령은 자신이 2중대장에게 약속한 대로 2중대를 전초진지에서 예비대로 빠져 나오게 했으나 중상을 입은 그 포로 하나만으로는 마음에 차지 않았던지 자신이 믿고 있던 박 중위를 대대장실로 불러 다시 기습전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자 박희태 중대장은 “포로 때문에 대원들을 죽일 수는 없읍니다”라고 말하고선 권총의 안전장치를 푼 다음 그 권총의 손잡이를 대대장에게로 돌려 대대장이 앉아 있는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차라리 이 권총으로 저를 쏘십시요”라고 했고, 그 말에 무안을 당한 대대장은 박 중위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기습전을 준비하라는 자신의 지시를 철회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잇다.
54년 5월 말경이었다. 당시 해병학교 16기 사관후보생교육대의 구대장이었던 박희태 대위는 사관후보생들을 인솔하여 웅동저수지까지 행군을 했는데 전술대형을 유지한 행군대열이 웅천(熊川)에서 진해로 넘어 오는 속칭 ‘발티고개’라는 고개에 이르렀을 때 행군대열의 맨 앞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던 향도후보생이 누런 흙먼지를 일으키며 비포장 도로를 질주해 오는 앞 범퍼에 청색 별판이 부착된 해군참모총장의 승용차를 도로 옆에 정차시킨 것이 화근이 되어 직속상관에 대한 불경죄로 해병학교에서 열린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그 향도후보생은 퇴교처분을 당하고 박희태 대위는 중근신 처분을 당하는 불운을 겪었었는데, 그 날 그런 일을 당했던 박옥규 참모총장은 얼마나 화가 났던지 해병교육단장 김성은 준장에게 “해병대가 무서워서 어디 진해로 오겠나. 해병대 데리고 어디든지 떠나 가시요”라고 하는 바람에 김성은 장군은 박 총장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중간에 사람을 넣어 박 총장을 근사한 곳으로 초대하여 극진하게 술대접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휴전 후 하사관학교장 훈련소장 연대장을 거쳐 해군본부 특전감실에서 근무하다가 73년 대령의 계급으로 예편했던 박희태 대령은 2002년 지병으로 타계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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