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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기('50년) - 가장 고생을 많이한 보급장교 이원혁 대령

머린코341(mc341) 2015. 10. 30. 02:50

6·25전쟁기('50년) - 가장 고생을 많이한 보급장교 이원혁 대령

 
6․25전쟁을 겪은 해병대 출신 보급장교들 중 이원혁(李元赫) 대령만큼 일선에서 오래 근무한 장교도 드물고 이원혁씨 만큼 성실하게 복무한 자랑스러운 보급장교도 드물 것이다. 해병대가 전전(轉戰) 했던 전쟁터 중 동해부대와 서해부대를 제외하곤 누비지 않은 곳이 없었던 그는 그러한 사실만으로도 훈장을 받을 자격을 갖춘 보급장교라고 해야 할 것이며, 실제로 그의 가슴에는 그와 함께 전쟁터를 누비며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2명의 해사1차 특교대 출신 동기생들(보병장교)인 김종식 대령과 한예택 대령 등이 상신해서 달아 준 충무무공훈장이 빛나고 있다.

 
1923년 함경북도 명천(明川)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중학교에 다니다가 일제 말기에 청진 상업학교(5년제)로 전학하여 졸업을 했던 그는 해방이 된 그해(45년) 12월 부인과 함께 월남, 46년 창군기의 해방병단에 입대한 후 ‘48년 9월 해사 1차 특교대를 거쳐 소위로 임관했다.

 
그리하여 해병대가 제주도로 이동한 후 홍정표 소위가 해군사관학교 보급관으로 전출할 때 그 후임자로 발령이 난 하성관 소위가 설사병으로 입원하여 부임을 하지 않는 바람에 결국 하성관 소위의 후임 보급관(제3대 보급관)으로 임명되어 근무하던 중 50년 7월 중순 고길훈 부대가 군산으로 출동할 때 고길훈 부대의 보급관으로 임명이 됨으로써 그때부터 지옥문에 입문하듯 끝없이 고생길을 누볐다.

 
군산․장항지구 전투 때 숙영지인 해양대학 취사장에서 5~6명의 대원을 거느리고 약 300명분(총병력)의 주먹밥과 부식을 장만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이원혁 중위는 부대장(고길훈 소령)이 대원들의 사기를 염려하여 특별부식을 조달할 것을 주문했으나 자신의 고지식한 심성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부정과 민폐를 두려워했던 나머지 끝까지 그 주문을 묵살했다고 하며, 고길훈 부대가 군산에서 철수하던 날 부대가 철수하는 줄도 모르고 해양대학 취사장에서 주먹밥을 만드는 일에 골몰하고 있었던 그는 그날 오후 외곽지대에 대한 정찰을 마친 수색소대장 김종식 중위가 잔류병력의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차를 타고 해양대학 청사에 들려보지 않았더라면 철수 대열에서 낙오를 할 뻔했던 일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군산에서 철수한 고길훈 부대는 여수항에서 김성은 부대로 개편되어 남원을 거쳐 운봉고개를 넘어갔는데, 그 다음날(7. 23) 아침 2대의 우군기(호주기)가 운봉 초등학교 교정에 정차해 있는 육군 탄약차에 기총사격을 가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이원혁 중위는 우군기의 오폭에 대비하기 위해 대공표지판을 만들고자 흰 광목을 입수하기 위해 고래등 같이 큰 부자집을 수색하게 되었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그는 과거 큰 벼슬을 한 집안임이 분명한 그 부잣집 벽장에서 다량의 광목과 족자 등이 관모(官帽)와 산호스틱 및 돌안경 등과 함께 쏟아져 나왔을 때 필요한 광목 외에 지휘봉으로 대용할 산호스틱과 시원한 돌안경까지 수중에 넣게 됨으로써 그것을 본 대원들이 이 중위 몰래 은집기를 비롯한 많은 물품을 배낭 속에 잔뜩 챙겨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는데 뒤늦게(함안으로 이동했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된 이 원혁 보급관은 회지막급(悔之莫及)한 일이었지만 자신의 소행이 얼마나 부끄럽게 여겨졌던지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은 심정으로 그 돌안경과 산호지팡이를 때려 부수어 버린 다음 대원들로 하여금 그 물건들을 버리도록 했다고 하는데,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라고 한다.

 
운봉을 거쳐 함양․진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돈가방은 가지고 다녔지만 쌀을 구할 수가 없어 민간인들로부터 소(牛)를 구입하여 빈 농가의 큰 가마솥에 삶아 된장 간장도 없이 토막을 내어 각 중대에 배식했던 일과 취사병이 소를 사살하지 못해 고삐에 매인 소가 길길이 날뛰며 달아났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50년 7월 31일 진주에서 군북을 거쳐 마산으로 철수했던 김성은 부대는 성호 초등학교에서 일박한 다음 8월 1일 오후 3시경 육군에서 지원해 준 트럭에 승차하여 진동리 지구로 출동했는데 그 때 부족한 차량 사정 때문에 화기중대(1중대)와 주계를 포함한 보급반은 차량이 보충될 때까지 학교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8월 2일 아침에 이르러서야 성호 초등학교를 출발, 본대를 찾아가던 중 진동리 서방 약 7키로 지점에서 도로 양측에 매복한 적으로부터 요격을 받아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부득불 미군이 배치되어 있는 진동 초등학교 옆으로 가서 행방이 묘연한 본대와의 접촉을 꾀하다가 8월 6일에 이르러서야 함안에서 본대에 합류하게 됨으로써 그때까지 만 6일 간을 본대 장병들에게 주먹밥을 제공하지 못했던 일을 그는 지금도 가슴아프게 여기고 있다.

 
김성은 부대가 함양에서 진주로 철수했을 때 이원혁 보급관은 때마침 육군에 징용이 된 가기차(트럭)를 가진 임순택이란 나이가 많은 운전기사를 자원봉사자로 영입함으로써 보급품 조달과 각 중대에 배식을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는데, 북진을 할 때 이원혁 대위가 5대대 수송대 요원으로 현지입대(하사)시켜 준 그 임순택씨는 북진기간 중 자기차의 밧데리를 안고 잤기 때문에 동파를 당한 적이 없었다고 하며, 그 기간 중 사령부(북한)로 전속되어 휼병부 일을 추진했던 이원혁 대위는 그가 후방에 있는 장교 가족들에게 쌀을 보급 할 때 임순택 하사의 집에도 쌀을 보급해 줌으로써 임순택씨의 가족들로 하여금 두고 두고 그 은혜를 잊지 못하게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4후퇴 후 또 다시 1연대의 보급관으로 임명되어 영덕, 영월지구 전투와 화천, 도솔산지구 전투 및 924고지 전투와 장단지구 전투에도 참가했던 이원혁 대령은 휴전 후 보급정비단장과 사령부 보급감을 차례로 역임한 뒤 ‘64년 대령의 계급으로 예편했는데, 한학자로서 청빈하게 사신 조부의 유지를 받들어 평소 바르게 살고자 노력을 했던 그는 특히 보급정비단장 재임시에는 보급군기의 확립을 위해 부정을 저지른 자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일벌백계로 다스렸고 ‘61년 5월 17일 해병대의 일부 군사쿠테타 주제세력들이 사령부의 각 국감실장들에게 혁명을 지지하지 않을 시엔 육군에서 1군사령관 이한림 장군과 막료들을 체포했듯이 해병대에서도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협박하듯 말했을 때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유독 보급감 이원혁 대령만이 불의에 항거하듯 “국감실장들을 다 체포해도 사령관(김성은 중장)만은 체포해선 안 된다”고 용기 있게 발언하여 주목을 끌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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