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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기('50년) - 조선호텔에서 커피마신 김종기 대령

머린코341(mc341) 2015. 10. 30. 02:46

6·25전쟁기('50년) - 조선호텔에서 커피마신 김종기 대령

 
50년 7월 15일 고길훈부대가 군산에 상륙했을 때 소령의 계급으로 군산경비부사령관으로 재임했던 김종기(金鍾淇) 대령(해사1기)은 고길훈부대가 군산에서 철수했던 바로 그 무렵에 군산경비부를 폐쇠하고 후방으로 철수, 해군본부로부터 7월 21일 부로 제2대대장으로 임명되어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고, 9.28을 거쳐 10월 중순경 해병대가 원산(元山)으로 출항할 시에는 2대대를 지휘하여 목포에 상륙, 유달산 산점초등학교에 대대본부를 설치하여 목포 영암지구의 적 패잔병 소탕전을 전개한 다음 2대대가 원산으로 출항할 때 다시 해군으로 복귀함으로써 해병대와 인연을 끊은 그러한 지휘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2대대장으로서 근무했던 그 기간은 비록 4개월 남짓했지만 그 시기는 해병대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였고, 또한 재조명을 해야할 행적과 화제도 있다.

 
1926년 경남 구포에서 출생하여 부산상고를 거쳐 47년 2월 해군사관학교(1기)를 수료하고 소위로 임관했던 그는, 48년 해군사관학교에서 정규 사관생도 외에 실무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특별교육대를 설치했을 때 1차에서 11차에 이르는 기수(基數) 중 1차에서 6차까지 대위 또는 소령의 계급으로 담임교사격인 훈육관을 역임함으로써 그 후 특교대를 거쳐 해병대 장교가 된 약 30명의 특교대 출신 장교들과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은 셈이었다.

 
한편 군산경비부 사령관으로 있을 때 6.25전쟁이 발발하여 북괴군이 파죽지세와도 같이 남으로 진공해오자 김종기 소령은 10여 명의 대원을 지휘하여 해양대학 배속장교 김윤근 소령과 함께 적 전차부대의 진입을 막기 위해 군산 시청에서 보유하고 있었던 다이나마이트를 이리(裡里)에서 군산으로 진입하는 도로의 교량 밑에 매설을 했고 서천경찰서의 경찰관들이 군산으로 피난을 해 오자 “왜 후퇴를 했느냐”고 힐책을 한 다음 그들을 배에 태워 서천경찰서로 복귀시켰다고 한다.

 
또한 트럭에 경기관총을 거치하여 대천(大川)까지 정찰을 했던 그는 귀대할 때 장항에 있는 미간인 배들을 군산에 집결시키는 조치를 취하는 등 군산지구 위수사령관으로서 적극적인 대처를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또한 7월 15일 고길훈부대가 군산에 상륙했을 때는 해군본부의 행정명령에 따라 고길훈부대가 해양대학에 주둔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종기 소령이 2대대장으로 부임했을 때(7.22) 2대대는 약 200명의 기존 병력(5.6.7중대) 외에 제주도에서 모집한 3기 신병들(약 1500명) 중의 일부를 배치받아 제주 북초등학교에서 제식교련을 실시하고 있는 중이었고, 부대대장은 김용국 대위, 전임 대대장은 고길훈 소령이었다.

 
제주도에서 3개 대대로 증편된 해병대의 전 병력이 제주항을 떠난 날짜는 9월 3일이었고 그 병력 중 2대대를 제외한 모든 병력은 부산으로 향하고 진해에서 하선한 2대대는 경화초등학교를 숙영지로 정한 다음 바로 그 무렵 상남(上南)에 있는 미군 통신중계소를 습격하여 7명의 미군과 2명의 한국군을 사살한 적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상남으로 출동시켰고, 임무를 수행한 후에 부산으로 향했다.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그 날(9.15) 연대 예비대가 되어 오후 9시 30분경 사령부 제대의 상륙에 이어 상륙을 했던 2대대는 16일 오후부터 사령부가 위치한 인천상업학교에 본부를 두고 시 외곽지대에 대한 정찰과 잔적 소탕전을 벌인 다음 9월 20일 미 해병5연대와 함께 행주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수도 서울탈환작전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런 다음 행주와 능곡지구에서 잔적 소탕전을 벌였던 2대대는 25일 영등포에서 한강을 도강한 미 해병1연대에 배속되어 당인리발전소를 경유하여 마포로 진입, 마포초등학교에 지휘소를 설치했는데 그 날 밤 마포쪽에는 7중대(장, 정광호 중위)가 배치되고 원효로쪽에는 5중대(장, 박성철 중위)와 6중대(장, 심포학 중위)가 배치되어 숙영을 했다.


서울 시가지에 대한 공격이 개시된 9월 26일 2대대는 미 해병1연대와 함께 서울역 일대의 전투를 거쳐 서울역 광장 건너편의 고층건물을 방벽 삼아 저항하고 있는 적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고 시가지 전투가 사실상 끝이 난 27일에는 중앙우체국을 거쳐 퇴계로 쪽으로 진출했던 2대대 5중대는 날이 저문 후 해군본부 청사에서, 7중대는 을지로 입구의 내무부 자리, 2대대 본부와 6중대는 조선호텔에서 각 각 숙영을 했다.

 
그런데 그 조선호텔에서 대대장 김종기 소령은 그 호텔을 지키고 있던 직원으로부터 커피 한 잔을 대접받았는데, 김종기 소령이 마신 그 커피는 6월 28일 새벽 수도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 후부터 그 날 그 시각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내빈도 마셔 보지 못한, 말하자면 김종기 소령이 처음으로 마셔본 커피였다.

 
김종기 소령의 부탁으로 커피 대접을 한 그 조선호텔 직원이 김종기 소령에게 한 말에 따르면 그 호텔에 머물고 간 수많은 북괴군 장성들과 당 간부들에게 커피를 대접했더니 그들은 커피가 뭔지 몰라서 그런지, 아니면 독극물이 들어 있을까 의심을 해서 그런지 아무도 마시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9월 29일에 거행된 환도식 행사 때 마포에서 중앙청에 이르는 연도 경비에 임했던 2대대는 그 후 남양주지구 차단작전을 거쳐 10월 중순경 집결지인 인천에서 목포에 상륙하여 약 1개월 간 영암지구의 적 패잔병 소탕과 목포경비부의 재건을 위한 지원임무를 수행한 다음 원산으로 향했는데, 그 때 김종기 소령이 해군에 복귀하지 말고 해병대에서 복무할 것을 권고한 신현준 사령관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굳이 해군에 복귀했던 것은 장차 해군참모총장이 되고자 했던 자신의 포부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관운이 따르지는 않았다. 비록 해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또 그 후(51년 2월) 덕적도 주둔부대장으로서 제2차 인천상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인천경비부사령관을 거쳐 PC701, LST803 함장 등의 요직을 차례로 역임했으나, 불운하게도 51년 11월 20일 해병대의 병력과 군량미를 싣고 석도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LST803함이 거센 돌풍으로 체인이 끊어지는 바람에 선체가 섬 기슭으로 밀려 가 좌초를 당한 그 사고로 인해 대령 진급시까진 선두를 말렸으나 끝내 제독으로 승진을 하지 못하고 해군종합학교장, PT편대장, PF63함장, 해군사관학교부교장 겸 생도대장, 해군본부 정훈감, 국방대학원 교수, 해군본부 관리참모부장 등을 역임하고 65년 대령의 계급으로 예편했었다.(군산경비부사령관 시절 구포에서 결혼식을 거행할 때 부산헌병대장 이봉출 소위가 부산에서 제일 번들거리는 하이야<택시> 2대를 대절하여 결혼식장에 대령시킨 흥미로운 이야기는 제2권에 수록될 이봉출 장군편에 소개가 된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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