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기('50년) - 원문고개의 군신 고종석 중사
아군이 통영 시가지를 점령한 바로 그날(50.8.19)밤 시가지 전투에서 패퇴한 적군은 밤 9시경을 기해 122밀리 박격포의 지원사격 하에 역습을 감행했다. 2중대(우일선)와 7중대(좌일선)가 배치된 아군의 원문고개 진지는 원문고개를 거쳐 통영 시가지로 진입하는 도로 좌우측에 뻗어 있는 약 1킬로미터의 나직한 야산지대에 민가에서 빌려 온 곡괭이와 삽으로 8부 능선의 요소요소에 교통호와 산병호를 파서 만들어 놓은 급조된 진지였으며, 철조망도 지뢰도 그 당시엔 공급받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야산지대는 양쪽 끝이 해변에 접해 있었다.
적이 공격을 개시하자 한 벙커 안에서 같이 기거하고 있던 2중대장 김광식 대위와 7중대장 안창관 대위(이들은 진동리지구 전투에서 특진한 장교였다)은 빗발치는 포탄을 무릅쓰고 각 소대본부로 달려가 “적이 공격해 온다. 한치라도 물러서면 안 돼!” “우린 죽어도 여기서 같이 죽고 살아도 여기서 같이 사는 거야 알간?”하며 닥달을 하듯 소대장들에게 소리쳤다.
적군의 포격은 약 5분 간 계속되었고, 포격이 멎기가 무섭게 아군의 기관총이 불을 뿜기 시작한다. 그리고 교통호와 산병호의 소화기도 뒤질세라 이에 가세했다. 적병들의 공격은 집요하게 되풀이 되었으나 아군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번번이 격퇴를 당했다. 그러던 와중에 소수의 적이 진지의 일각을 뚫고 진내로 돌입함으로써 한동안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에 그 적병들이 자취를 감추게 됨으로써 일단 평온을 되찼았다.
그러나 그 평온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적이 재공격을 감행했기 때문이었다. 적이 재공격을 감행한 시각은 교통호와 산병호에 배치된 대원들이 꾸벅 꾸벅 졸고 있는 새벽(20일) 3시경이었다. 적을 격퇴시킨 후 소대장들은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 분대장들로 하여금 순찰대를 편성하여 적의 재공격에 대비했으나 그 시각이 되자 거의 모든 대원들이 졸고 있었던 것이며 그 때를 노려 재공격을 감행한 적군은 주공부대를 정면에 투입하는 한편 약 80명의 결사대를 양 측방 해안선으로 침투시킴으로써 혀를 찔린 아군의 진내에선 피비린 백병전이 벌어지고 말았다.
“적이 쳐들어 왔다! 한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때려잡아라-!” “머리를 빡빡 깍은 놈들은 모두가 적이다-!”하는 소리가 진전과 배후에서 터져 나오면서 전개된 백병전은 총검과 총검, 육탄과 육탄의 대결이었으며, 칠흑 같은 어둠과 짙은 안개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를 분간하기가 어려워 결국엔 뒤엉킨 상태에서 상대방의 머리를 만져 보고서야(적병들은 머리를 빡빡 깎았고 아군은 빡빡 깎지 않았었다)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처치하기도 하고 이빨로 코와 목덜미를 물어 뜯거나 목을 졸라 죽이는 등 피비린 혈투로 일관되었다.
백병전이 끝난 시각은 아침 5시경이었다. 동이 틀 무렵까지 계속된 그 백병전에서 아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아군 진지의 배후로 침투한 적군의 특공대가 제2 방어선에 배치된 아군의 예비 병력에 의해 역포위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혈전이 벌어졌던 아군의 진중에는 유혈이 낭자했고, 참살 당한 피아군의 시체들이 도처에 뒹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번째의 공방전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사람은 7중대 1소대의 고종석(高鐘碩) 해병이었다. 해병 2기생이었던 그는 비록 체구는 작고 깡마른 편이었지만 기질이 강하고 행동이 민첩하고 담대했다.
그는 총검을 들고 돌진해 오는 적병들을 하나 하나 99식 소총의 총검과 개머리판으로써 처치했다. 그의 산병호 앞에는 그의 총검에 찔려 죽거나 개머리판에 두골이 쪼개진 다섯구의 적 시체가 뒹굴고 있었고, 그가 소지하고 있던 99식 소총의 총대는 적병들의 총대를 얼마나 치고 받았던지 온통 상처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최후도 역시 참담했다. 중과부적인 상태에서 결사 분투하고 있던 그는 그의 등 뒤쪽에 나타난 또 다른 적병의 총검에 등을 찔려 처참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한편 그의 용맹성과 끔찍한 최후가 확인되자 7중대 본부에선 고인의 뛰어난 용맹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현양하기 위해 2계급 특진을 부대본부에 상신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또한 부대 내의 일각에선 고인을 해병대의 군신(軍神)으로 받들기 위해 동상을 건립하자는 여론이 일기까지 했으나 결국 계속된 전쟁의 와중에 흐지부지 무산되고 말았다고 한다.
81년에 발간된 해병실록 ‘덕산에서 월남까지’ 상권 216쪽에 보면 누군가의 말을 듣고 개성 출신인 고종석 해병이 위로 누이 일곱명을 둔 8남매중의 외아들이라 했고, 또 가문의 대(代)를 잇지 못해 천추의 한을 남겼다는 등의 글이 적혀 있는데 최근에 와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고향은 38선 이남인 장단군(長湍郡) 진서면이고 6남매(남4, 여2)중의 3남의 태어났다고 하며 내년 전쟁기념관에서 거행될 고인(고종석 중사)의 호국의 인물 현양식에는 북한에 있는 누이와 제씨는 참석할 수가 없겠지만 미국과 남한에 거주하는 두 분의 형과 누님은 참석할 것이라고 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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