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명인·기인

6·25전쟁기('50년) - 망일봉을 선제점령한 안창관 대령

머린코341(mc341) 2015. 10. 28. 16:36

6·25전쟁기('50년) - 망일봉을 선제점령한 안창관 대령

 
해병사(海兵史)의 주춧돌이 된 300명의 1기 신병들을 해군13기 가입대자들 중에서 모집할 때 구술시험관을 맡았고, 그 1기신병 교육대의 제2중대 선임장교였던 안창관(安昌寬) 대령은 진주 공비내습사건 때 진주 주둔군부대의 당직사관이었으며, 통영상륙작전 때는 7중대를 지휘하여 망일봉(望日峰)을 선제(先制)점령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평안도 출신(1924년생)으로 일찍이 하얼빈사도학교를 졸업하고 금강보통학교(조선인 초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중 일본군(관동군)에 입대(징병)했던 그는 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귀향한 후 곧 월남하여 46년 2월 창군기의 해안경비대에 입대했고, 해사특교대(1차)를 거쳐 소위로 임관했던 그는 49년 2월 창설기의 해병대로 전입, 해병대 신병 1기생들을 모집할 때 김낙천 소위와 함께 구술시험관으로 선임되어 강복구 중사가 외모와 체격 등을 고려해서 뽑아 놓은 330명에 대한 구술시험을 실시하여 그들 중에서 30명을 떨어뜨렸는데, 그 때 안창관 소위는 강한 평안도 사투리로 “도국과 민독을 위해 목숨 바칠 각오가 돼 있나?” “용감히 싸우다 둑어도 여한이 없갓지?”하며 거친 수험자들의 의지를 테스트했다.

 
한편 진주 공비내습사건 때(49.10.27) 주둔군부대의 당직사관 근무를 했던 안창관 중위는 그 날 새벽 기습을 받은 제일병사(진주사범학교 강당)에 불길이 치솟고, 요란한 총성이 들리자 취침 중에 펜티바람으로 뛰쳐 나와 “공비야 공비! 진짜 공비가 왔어, 진짜 공비가...”하며 비상을 걸었고, 또한 공비들이 전등불이 켜져 있는 병사를 향해 총격을 가하자 “전등불을 박살내!” 하며 소리치기도 했던 그는, 통영지구 작전 때(50.8)는 7중대를 지휘하여 망일봉을 선제 점령함으로써 용맹을 떨쳤다.

 
그리고 원문고개 방어전 때는 이런 일화를 남겼다. 즉 통영 시가지 수색전에 참가한 후 7중대는 원문고개에 배치된 2중의 좌일선에 배치되어 고성(固城)쪽으로부터 통영 시내로 침공할 적군의 공격에 대비했는데, 시가지를 탈환했던 그 다음날(8.19) 아침 안창관 중대장은 2중대 1소대장 조 모 소위가 그 전날 밤 중대장(김광식 대위)의 명령을 어기고 1소대의 방어선을 후퇴시킨 것을 힐책하자 중대장의 뺨을 갈겼다는 소문을 전해 듣곤 격분을 했던 나머지 전쟁터의 추상같은 군기 확립을 위해 직접 조 소위를 포박하여 부대장(김성은 대령) 앞으로 끌고 가선 “부대장님, 이따위 새낀 당장에 총살을 해야 되지 않갔습니까” 하며 흥분을 했고, 보고를 받은 부대장은 그 조 소위를 해군본부로 후송하여 군법회의에 회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공군의 2차 추기공세 때(52.10.31) 전투단의 우일선에 배치되어 있던 3대대는 상황의 급변으로 5대대와의 부대교대 명령이 내려져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주저항선 상의 일부 진지만을 5대대에 인계했을 뿐 31.33.39진지 등 3개의 전초진지를 방어하고 있던 11중대는 그 진지들을 인수해야 할 51중대(5대대)가 직면한 불가피한 장애 요인 때문에 51중대와 교대를 하지 못한 채 이미 내려진 전투단의 명령에 따라 5대대장의 작전지휘 하에 두게 됨으로써 3대대장으로서 많은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그 동안(약 40일 간) 계속된 적군의 포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11중대 본부진지(31진지)의 병력을 교체시키기 위해 10중대에서 차출한 2개 소대의 병력을 그 때 이미 31진지에 배치해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11중대를 지휘하고 있는 5대대장 강기천 중령의 지휘소를 방문하여 “우리 11중대 장병들 잘 싸울 수 있도록 화력지원을 잘 해 주시라구요”하여 두 번 세 번 간청을 하는 바람에 강기천 대대장이 “알았으니 그만 돌아가시오” 하며 역정을 내기까지 했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는 성미는 불같이 급했지만 인정이 많고 부하를 끔찍하게 아꼈던 상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56년 여름철 해병교육단 참모장으로 있던 안창관 대령은 태백동 화장터에서 과거 하얼빈 금강보통학교에서 함께 교직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임시문관 이재순(李在淳)씨(안창관씨 보다 몇 살 연장자)의 장례식을 엄수하여 화제를 모았었다.

 
해방 후 부인의 고향인 원산에 정착하여 교직생활을 하고 있던 이재순씨(경기도 출신. 일본중앙대졸)는 6.25전쟁의 와중에 반격을 개시한 유엔군과 국군이 한만국경으로 진격해 가자 남북통일이 다 된 것으로 속단했던 나머지 서울에서 가르치고 있는 반공교과서를 구해 오기 위해 서울로 내려가 용무를 마치고 잠시 고향(평택)에 들렸다 나오는 사이에 전세가 급변하여 1.4후퇴를 맞는 바람에 처자식이 있는 원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실의 낙담하고 있던 중 과거 금강보통학교에서 함께 교편을 잡았던 안창관씨가 해병대 장교가 된 것을 원산에서 보았다는 어떤 피난민의 말을 듣고 진해로 내려가 안창관 대령의 도움으로 셋방도 얻게 되고 교육단의 임시문관으로 취직하여 배급쌀도 타게 되었었다.

 
그리고 그 이재순씨는 1.4후퇴 때 남으로 내려오다가 야크기의 폭격으로 남편을 잃은 원산 여자를 진해에서 만나 동거생활도 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몰래 원산을 다녀 온 지인(知人)으로부터 자기부인(일본 여대 출신)이 중공군의 고급군관과 동거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곤 그 때부터 독한 소주만 마시며 자해를 하다가 끝내는 50세의 나이로 비명 횡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재순씨를 해군병원에 입원시켜 임종을 지키고 있을 때 안창관 대령은 가족 때문에 눈을 감지 못할까봐 “통일이 되면 꼭 부인을 만나 소식을 전해 드리겠다”는 말을 했고, 그 말을 마치자 곧 그는 눈을 감고 운명을 했다고 한다.

 
그 날 고인의 장례식장에는 교육단의 군악대와 의장대가 동원되었고, 많은 문관들과 관련 부서의 현역장병 및 피난민들이 참석했었다.

 
그 후 사단 참모장. 부사단장 등을 역임했으나 장군이 되지 못하고 66년 대령의 계급으로 예편했던 안창관 대령은 71년 3월 47세의 나이로 타계했고, 2000년 전쟁기념관에서 호국의 인물로 현양되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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