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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기('50년) - 소년포로의 이름을 바꿔준 박성철 장군

머린코341(mc341) 2015. 10. 30. 02:44

6·25전쟁기('50년) - 소년포로의 이름을 바꿔준 박성철 장군

 
능곡지구 전투 때(50.9.21) 2대대 5중대는 밤중에 반격을 해 온 적을 격퇴시킨 그 다음날 아침 누렇게 익은 벼논과 솔밭에서 지치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는 약 150여 명의 적을 생포했는데 그 포로들을 후송할 때 5중대장 박성철(朴成哲) 중위는 이런 화제를 남겼다.

 
즉 유난히 나이가 어려 보이는 한 소년 포로(17세)의 이름이 변봉순(辺逢順)이라고 하자 한강변에서 계집애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 봉순을 봉남으로 바꿀 것을 제의하여 동의를 얻은 다음 그 소년 포로를 후송시키지 않고 진중에서 보호하고 있다가 해병대의 10기 신병으로 입대시켜 준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화제를 남겼던 박성철 장군은 해방 후 만주에서 귀국하여 한동안 돈암장에서 이승만 박사의 경호요원으로 활약한 일이 있었 듯이 예편 후(5.18 직전) 예비역 소장의 신분으로 김대중(金大中) 총재의 경호역을 담당했던 것이 화근이 되어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검거가 되어 옥고를 치렀고, 또 그 후유증으로 제 명을 다 살지 못한 불행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1925년 만주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성장했던 박 장군은 8.15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유도 유단자인 대도관중학교 동창인 한예택씨 등과 함께 이승만 박사가 거처하는 돈암장 경비임무를 수행하다가 46년 2월 15일 창군기의 해방병단에 입대했다.

 
그리하여 해사특교대를 거쳐 소위로 임관했던 그는 50년 2월 해병대로 전입하여 육군초등군사반(2기) 입교명령을 받을 때까지 해군 목포경비부 헌병대장으로 근무했고, 초등군사반 수료 직후 6.25전쟁이 발발하여 2대대 5중대장으로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는데, 9월 21일 5중대가 능곡지구의 야산(△51)에서 뜻밖의 큰 전과를 거두게 된 것은 그 날 오후 수 명의 민간인(청년들)이 진지 근처로 목관(木棺)을 메고 와서 장례를 지내고 간 것을 수상쩍게 생각했던 박 중위가 날이 저문 뒤 진지를 이동시킨 다음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가 적을 요격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서울 시가지 전투 때(9.27) 서울 역전을 거쳐 중앙우체국 앞에서 퇴계로에 있는 해군본부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5중대장 박성철 중위는 일부 병력을 진두에서 지휘하여 소공동에 있는 텅 비어 있는 한국은행 지하금고를 수색했는데 그 지하금고 속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초췌한 몰골의 한 은행원은 박 중위에게 지하금고 속에 들어 있었던 금괴는 서울이 실함되기 하루 전날 밤 지하 비밀통로를 통해 밖으로 실려 나갔다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울 수복 후 남양주지구 전투와 목포 영암지구의 적 패잔병 소탕전을 거쳐 함흥지구 전투에도 참가했던 박성철 중위는 그 후 도솔산 탈환작전 때는 2대대 부대대장으로 참가를 했고, 해병제1연대가 장단지구로 이동한 직후에는 2대대장으로 임명이 되었는데 그 2대대장 재임기간 중(예비대로 있을 때) 보충받은 신병들에 대한 재교육을 실시하는 재교육대에서 3명의 도망병이 발생하여 교육대장 정영옥 소위가 권총으로 자결을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여 대대장의 입장을 난처하게 했었다.

 
휴전 후 서울지구 해병분실장을 역임한 데 이어 도서부대장 보급단장 교육기지사령관 사령부작전참모부장 등의 요직을 거쳐 미국 해병참모대학 재학중(63년) 준장으로 승진했고, 66년에 소장으로 승진했던 박 장군은 71년 1월 25년 간의 군복무생활을 하직하고 예편했었다.

 
그리하여 73년에 설립이 된 원양어업회사인 대진농수산(大進農水産) 주식회사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던 박 장군은 그로부터 약5년간 부족한 경영수완으로 사세(社勢)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다가 종국에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 장차의 진로를 구상하던 중 어느 날 성당에서 김대중(金大中)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 화근이 되어 정계에 발을 들여 놓겠다는 생각도 없이 다만 어려움에 처해 있는 그 분을 도와 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경호원처럼 측근에서 모시고 다닌 것이 화근이 되어 모 일간신문에 ‘예비역 해병소장 박성철씨 김대중씨의 경호실장’ 운운하는 큼직한 기사가 실린 뒤를 이어 충격적인 10. 26사태(박대통령 시해사건)가 일어났고, 또 그 틈을 타서 등장한 신군부가 계엄령 하에서 개최한 김대중 선생의 실내 강연회를 빌미로 박 장군을 비롯한 비서진을 계엄포고령 위반죄로 채포하여 군법회의에 회부함으로써 3년형을 선고받고 1년 간 옥고를 치렀으며 그러한 일로 하여 심근경색증에 걸려 있었던 박 장군은 치료를 받고 있는 몸이었는데도 무리를 하고 몹시 추운 날(85.1.30) 민추협(民推協) 모임에 참석하러 갔다가 길에서 쓰러져 비명 횡사를 하는 그런 말로를 걸었다.

 
그리고 유족측에서 국립묘지에 유골을 매장하려고 했으나 형사사건으로 선고받은 사람은 국가유공자라 할지라도 형의 만료일로부터 5년 이내에 사망한 자는 국립묘지에 매장할 수 없다는 군 인사법의 규정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를 못하고 삼각지 성당묘지에 유골을 매장해 두었다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후 법원에 재심청구를 하여 무죄판결을 받게 됨으로써 99년 2월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을 하게 되었는데 고인의 미망인 정선희씨의 말에 따르면 재심 청구 때 특히 영부인 이휘호 여사의 배려가 컸었다고 한다.

 
덧붙여 둘 얘기가 있다. 박성철 장군이 목포여고 출신인 부인 정선희씨와 결혼을 한 것은 소위의 계급으로 목포경비부 헌병대장직을 수행하고 있던 49년이었고, 그 때 중매를 선 사람은 그 당시 청년운동을 하고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고 여순사건(48.10.19) 직후 목포경찰서에서는 예비검속 대상자인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검거하여 수감을 했는데 그 때 헌병대장 박 성철 중위가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는 김대중선생을 석방시켜 주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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