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기('50년) - 설한지 전투사를 빛낸 김윤근 장군
5.16군사정변을 거사(擧事)할 때 김포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여단장으로서 해병대의 거사부대를 직접 지휘하여 제1한강교를 건넘으로써 거사를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김윤근(金潤根) 장군은 6.25전쟁 때 2회에 걸쳐 3대대장을 역임한, 그리하여 특히 평원(평양 원산) 가도상의 요충지인 양덕(陽德)지구 철수작전 때는 설한지(雪寒地) 작전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겼고, 도솔산지구 탈환작전과 924고지 탈환작전에도 참가하여 용명을 떨쳤다.
1926년 황해도 은율에서 출생(1926년생)하여 신경군관학교(6기) 예과를 거쳐 일본 육사(본과)에 임교했던 김 장군은 본과 2년 재학 중 8.15 광복을 맞아 귀국, 47년 2월 해군사관학교(1기)를 졸업하고 해병대로 전입, 모슬포부대 제2중대장(대위)과 해양대학(군산) 배속장교를 거쳐 50년 7월 제3대대장으로 임명되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는데, 인천에 상륙한 후 미 해병5연대가 점령한(9.17) 김포비행장과 김포반도에 대한 잔적 소탕 임무를 부여받게 됨으로써 3대대는 비록 서울 탈환작전에는 참가하진 못했지만 그 때까지 김포비행장을 위협하고 있던 북괴군 107연대의 주력을 공격하여 연대장을 생포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당시의 3대대 탄약작업소대장 장익삼 중사(그 후 해간6기로 임관)는 9월 18일 이른 아침 비행장 부근의 수로(水路)와 나무 숲이 있는 작은 마을에서 전의를 상실한 수십 명의 적을 생포하여 물오리 차라고 부른 미 해병대의 수륙 양용차(DUKWW)에 실어 후송했다는 증언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그 날 아침 김포경찰서 뒷편 고지에서 중화기중대 3소대의 엄순길 분대장이 생포했던 북괴군 107연대장(중령)은 포박을 하여 중대CP로 연행했으나 중대장 정중철 중위가 포박을 풀어 주고 경계를 소홀히 한 것이 화근이 되어 그 연대장에 의해 피살을 당하는 충격적인 사태가 벌어졌었다.(그에 관산 얘기는 당시의 중화기중대 첨병소대장이었던 이광수 중령 편(제 2권에 수록됨)에 언급이 된다)
해병대의 북한지역 작전기간 중 특히 3대대는 평원(평양․원산)가도상의 요지인 양덕군(陽德郡)으로 진출, 고려 태조 때(태조21년) 축성한 양암산성(陽巖山城) 옛 성터가 있는 동양면 상석리(上石里)에 포진을 하여 11월 15일부터 12월 1일까지 약 2주 간 미 해병대의 일부 병력이 배치되어 있는 원산 서측방의 마전리(강원도 이천군 법동면)로부터 추진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던 군수품 보급이 번번이 적 패잔병들의 공격으로 도중에서 차단을 당해 미군 수송대가 막심한 피해를 입는 바람에 때로는 적 패잔병들에게 피탈당한 박격포탄을 찾아 나서는 등 많은 애로를 겪었다.
그리고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있던 12월 초 3대대는 명령에 따라 주둔지인 그 상석리에서 철수를 단행했는데 철수를 할 때 김윤근 대대장은 상석리에서 사거리를 거처서 가는 국도를 이용하지 않고 상석리에서 그 북쪽마을인 소양동(성북리) 북방의 재령산 줄기의 흰 눈 덮힌 깊숙한 골짜기와 능선을 가로질러 국도변의 수주리(水注里) 교량 밑으로 해서 국도로 올라가는 약 9시간이 더 걸리는 우회코스를 택함으로써 대원들과 함께 피란길에 나선 수백 명의 반공 청장년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했는데 김윤근 대대장이 행군로를 그렇게 잡은 까닭은 사거리와 수주리 어간의 큰고개를 위험시했기 때문인데 그 날 오후 그 위험지대로 향하고 있던 치안대 간부들이 그 길목에서 협공을 당해 상당수의 인명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또한 그 전날 밤 부대 앞에서 10여 명의 부상병을 편승시켰던 육군 HID 차도 그 위험지대에서 피격을 당한 사실을 멀리서 목격하고 대원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나 천만 뜻밖에도 죽은 줄 알았던 그 부상병들은 미군 정찰기에 포착이 되어 구사일생 미군 구조헬기에 의해 구조되어 마전리의 미군 주둔지에 이송되어 있었다.
그 날 12시간의 고된 행군 끝에 얼어붙은 수주리의 파괴된 교량 밑으로 해서 민간인들과 함께 제방을 타고 국도로 올라갔던 행군부대는 그곳에서 간간이 포탄이 작렬하는 굴곡이 심한 험준한 아호비령(阿虎飛嶺)을 혹한과 졸음과 사투를 벌이며 밤새도록 걸어 넘어 그 다음날 아침 미군들의 수송차량이 대기하고 있는 마전리에 도착했는데, 안전한 철수를 위해 무한한 인내심과 고통이 수반된 그 3대대의 성공적인 설한지 철수작전은 해병대의 전투사에 그 발자취가 길이 남을 작전으로 기억될 것이다.
한편 3대대가 양덕에서 철수할 때 양덕군에서 치안활동을 했거나 해병대의 작전에도 적극 협조한 약 1000명에 달하는 양덕군의 청년들이 학살을 당하게 될 그 고향땅을 등졌는데 그때 해병대에 입대하기를 지망한 약 80명의 애국 청년을 해병대에 입대시켜 그들로 하여금 구국전선에서 싸우게 했고, 또한 일부 피난민들의 정착을 위해서도 정성껏 보살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당시의 3대대장 김윤근 장군은, 89년 5월 11일 제31회 양덕군민 정기총회에서 당시의 3대대 작전장교였던 김연상 장군과 함께 양덕군민회 회장으로부터 보은의 감사패와 행운의 열쇠를 증정 받았었다.
1.4후퇴 후 해병학교 교장과 사령부 군수국장을 역임했던 김 장군은 또 다시 3대대장으로 임명되어 도솔산 전투와 924고지 탈환작전에 참가했는데, 도솔산 전투 때 3대대는 특히 13목표(△1175)를 점령하는 데 약 200명의 사상자를 내였으며 1대대와 함께 투입이 된 924고지 탈환작전에서도 많은 사상자를 내었으나 불굴의 감투정신을 빛낸 3대대 장병들과 그 장한 승리의 영예를 함께 나누었다.
5.16군사정변 후 최고위원을 역임했던 김윤근 장군은 63년 중장의 계급으로 예편 한 후 7년 간에 걸친 호남비료 사장직과 3년간에 걸친 민영화된 수산개발공사 사장직을 차례로 역임했었다. 일제 때 만주에서 36군데의 교회를 지어 선교사업에 헌신했던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진실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김 장군은 현재 영락교회의 퇴임 수석장로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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