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기(‘51년) - 고등군법 1호사건의 주역 김광식 대령
통영지구 전투 때 김성은 부대의 제2중대장으로써 원문고개를 방어했고, 104고지 전투와 연희고지 전투 때 1대대 2중대장이었던 김광식(金光植) 대령. 그는 51년 4월 임시수도 부산에서 일으킨 그 음주 난동사건으로 해병대에서 처음으로 고등군법회의를 열게 했던 화제의 인물이며, 또한 동해부대장 시절에는 자신의 비위를 거스리는 미 해병대 연락장교 라이니키 대령을 한 장의 서면으로 굴복시키는 등 군 복무기간 중 수많은 일화를 남긴 전설적인 인물이다.
경복 선산 출신(1923년생)으로 일제 때 만주에서 거주하다가 해방 후에 귀국하여 창군기의 해방병단에 입대한 후 48년 해사특교대( 1차)를 수료하고 소위로 임관, 6.25전쟁 초기 고길훈 부대의 2중대장으로서 군산 장항전투에 참가했던 그는 특히 통영지구 전투 때는 이런 일들을 겪었다.
즉 통영 시가지를 포위 공격할 때(8.18)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원문고개에 진출해 있던 그는, 그 날 아침 시가지를 탈출하기 위해 원문고개로 질주해 오는 지프차(소련제) 한 대가 있어 그 지프차를 요격할 태세를 갖춘 다음 중대장의 발사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절대로 사격을 하지 못하게 했으나 얼떨결에 한 대원이 방아쇠를 당기는 바람에 다소 거리가 멀어 명중을 시키지 못해 벼논에 쳐박힌 그 지프차에 타고 있던 4명의 군관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지프차는 시가지가 점령된 후 대원들이 끌어 올려 운전을 할 줄 아는 대원이 운전하여 김성은 부대장이 탈 수 있게 했었다. 한편 그 다음날(8.19) 아군이 통영시를 점령하자 적군은 그 날 밤 원문고개를 장악하기 위해 결사적인 공격을 해 왔는데 적군의 공격이 개시되기 전 2중대장 김광식 대위는 무단으로 진지를 이탈한 1소대장 조 모 소위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평소 해군의 김 모 대령이 자신의 고모부라며 으시대고 있던 그 조 소위는 “당신은 안전한 곳에 있으면서 왜 나만 위험한 곳에 두느냐”고 항명을 하면서 주먹으로 중대장의 뺨을 갈기자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7중대장 안창관 대위가 “이 새끼가 누굴 때려?” 하며 휴대하고 있던 소총의 개머리판을 휘둘러 제재를 가한 후 전투가 끝난 뒤 포박을 해서 부대장에게로 끌고 가서 “이 따위 새끼는 당장에 총살해야 된다”며 격분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원문고개에서 그러한 화제를 남겼던 김광식 대령은 인천상륙작전 때는 1대대 2중대장으로서 104고지 전투와 연희고지 전투에 참가했고, 1.4후퇴 후에는 초창기의 해병학교(도천초등학교) 부교장으로 근무했었는데, 그 해병학교 부교장 시절에 김광식 대위는 기분을 풀기 위해 교무처장 김한수 중위와 사관후보생교육대의 구대장 이광수 소위를 포함한 4명의 초급장교들을 지프차 한 대에 태우고 임시수도 부산까지 술을 마시러 간 것이 화근이 되어 이른바 그 고등군법회의 1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 음주 난동사건을 터뜨렸다. 본서에 수록된 ‘해병대의 12대사건 스토리’(제 1화)에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집행 유예로 풀려난 그 사건 때문에 추방을 당하듯이 일선으로 전출되어 2대대의 부대대장으로 근무했던 김광식 대위는 924고지 탈환 후 1연대 정훈에서 해병속보(海兵速報)라는 진중신문을 발간하고 있을 때 자기 대대와 관련된 기사를 다른 대대의 기사 보다 큼직하게 써 주지 않는다고 해서 연대본부 정훈실 천막 밖에서 “김득주(정훈실장) 이 새끼 죽여 버리겠어”하며 칼빈M2를 허공에 난사함으로써 해병속보를 편집하고 있던 문관들을 겁에 질리게 했었다.
김광식 소령이 동해부대장으로 있는 동안 부대본부에서는 미군 봉쇄함대의 협조 하에 어선들이 함흥선까지 북상하여 어로를 할 수 있도록 증명서를 발부하여 선체에 부착시켜 주는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동해부대 장병들의 급식 향상을 도모했고, 또한 전표(錢票)를 발행하여 그것을 가지고 미군 PX에서 쇼핑도 하고 휴가를 갈 때에는 현금으로 바꾸어 가기도 했는데, 장병들이 그러한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은 부임 첫날부터 미 해병대의 연락장교 라이니키 대령이 “KMC는 도적질을 잘한다” “당신은 무능한 장교가 아닌가” “진지배치를 새로이 해야겠으니 따라오라” 는 등 비위를 거스리는 말을 함부로 하기에 참모회의 석상에서 자신이 직접 쓴 다음과 같은 메시지, 즉 “연락장교인 주재에 동해봉쇄함대사령부의 예하부대장인 본인에게 모욕적인 언동을 함부로 하는 당신 같은 사람과는 같이 근무하고 싶지가 않아 이 섬을 떠나겠다는 뜻을 통역관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전하게 하자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며 사과를 하기에 불간섭 문제와 장병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조건을 제시하여 합의를 보게 됨으로써 그와 같은 혜택을 입게 된 것이었다.
모도부대 고문관과 엥그로크맨들의 백기항복사건(제 항 제 화)을 일으킨 모도부대장 이경하 중위를 엄벌에 처하지 않고 헌병대 영창에 수감해 두었다가 후방으로 전출시켰던 김광식 부대장은 전란으로 인해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여도의 원주민 어린이들과 피난민 어린이들에게 교육의 혜택을 베풀기 위해 여도에 활동기지를 두고 있던 해군첩보대 활동요원 중의 한 사람인 정태언(鄭泰彦)씨(함남 영흥출신)를 도와 간이교실을 마련하게 하여 30~40명 정도의 어린이들(원주민과 피란민)에게 초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실시했는데 그 간이교실에는 후일 장관직을 역임한 홍성철 중위(당시 연락장교)가 지은 대성학교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다음은 김광식 대령의 어록(語錄)과 관련된 일화이다. 해병학교 부교장 재임 시인 55년 8월 중순경 어느 날(주말) 그는, 소위로 임관하여 2주 간 휴가를 얻어 귀향한 약 20명의 호남지구 동기생 장교들(21기)의 초청으로 전주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전주지방병무청 참모장(육균대령)도 함께 초청된 자리에서 전북일보사의 기자가 전주를 방문한 소감을 묻자 김광식 중령은 육군대령과 동석한 것이 몹시 불쾌했던지 뚱단지 같이 “해병대에서는 육군과 같은 놈이라고 하면 가장 큰 욕이 된다”고 말함으로써 그 육군대령을 매우 곤혹스럽게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연대장으로 있을 때 김광식 대령은 미들급 참치언을 지낸 송방헌씨(당시 계급 대위)를 사범으로 영입하여 권투붐을 조성하기 위해 해병대로서는 처음으로 4각의 권투링을 만들었었는데, 그 후 송방헌씨가 가정적인 어려움으로 그 링을 금촌 시내의 모 체육관에 임대하자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관용을 베풀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60년 9월 대령의 계급으로 예편한 후 삼천포 경찰서장을 역임했던 김광식씨는 오래전 이민간 미국(뉴욕)에서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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