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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기(‘51년) - 여군 포로를 획득한 김병욱·신영균 해병

머린코341(mc341) 2015. 11. 3. 11:54

6·25전쟁기(‘51년) - 여군 포로를 획득한 김병욱·신영균 해병

 
육군 3군단의 작전을 지원한 영월․정선․평창지구 전투 때 (51. 2. 19-3. 17) 해병제1연대에서는 2명의 여군 포로를 획득했는데 제일 먼저 획득한 사람은 1대대 3중대 화기소대의 김병욱 해병(4기)과 그와 한림중학교 동창생인 양학량 해병(4기) 이었다.

 
김병욱씨의 증언에 따르면 영월인지 정선인지 잘 분간할 수 없지만 2월 하순경 같은 소대 소속인 양 해병과 함께 흰눈이 쌓여 있는 개울가의 야산지대를 수색하던 중 두사람이 눈 위로 걸어간 발자국이 있어 조심스럽게 그 발자국을 따라가던 중 발자국이 사라지고 눈이 쌓여 있지 않은 큰 소나무 밑에 서 한참 동안 소나무가 우거져 있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점심때가 되어 K레이션을 데피우기 위해 솔잎을 따려고 무심코 머리 위를 쳐다보는 순간 소나무 가지 위에 소총을 어깨에 멘 인민군과 비무장한 여군 하나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목격하곤 기겁을 해서 방아쇠를 당길 뻔했으나 전의(戰意)를 상실한 그들이 순순이 투항을 하기에 생포를 했다고 하는데, 검색을 해 보니 어깨에 메고 있는 소총에는 실탄이 장진되어 있지 않았고 동상에 걸려 있는 그들의 발에는 남루한 담요 조각이 감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포로들을 중대본부로 연행한 김병욱 해병과 양학량 해병은 그 전공으로 충무무공훈장을 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김병욱씨의 말에 따르면 중대본부에선 그 여군포로를 깨끗이 목욕시켜 대대본부로 데려 갔다고 한다.

 
한편 이러한 화제를 남긴 김병욱씨는 924고지 방어기간 중에 수행된 1대대 3중대의 751고지 야간 기습 전 때 중대장 김영상 중위가 적 포탄의 작렬로 허벅지에 중상을 입고 쓰러지자 중대장의 전령으로서 출혈이 심한 중대장을 구하기 위해 다른 2명의 대원들과 번갈아 업기도 하고 들것에 싣고 원주(原州)근처에 있는 미국 야전병원까지 몇 시간을 죽을 고생을 하며 운반해 간 끝에 가까스로 빈사지경에 이른 중대장을 회생시킴으로써 그 중대장의 생명의 은인이 되었는데 후일 보은의 정을 꽃피운 그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8부 능선을 사수한 김영상 장군편’에 수록되어 있다. 김병욱씨는 현재 제주시에서 세무사업을 경영하고 있다.

 
두 번째로 포로를 획득한 사람은 1대대 1중대 2소대 소총수 신영균 해병이었다. 6. 25전쟁 직전까지 해군본부(퇴계로) 근처에 있는 이발관의 이발사로 있다가 해병 5기로 지원 입대하여 영월 지구 전투에 참가했던 그는 나이가 꽤 많은 (29년생) 신병이었으며 그가 여군포로를 획득한 장소는 봉산리(평창군)였다. 1대대가 봉산리로 전진(轉進)했던 날짜는 3월 12일 이었다.

 
신영균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 날 오후 육군(소대병력)과 함께 산골짜기에 있는 돌기와집을 공격하던 중 공격에 앞장섰던 2소대장(견습사관)이 전사하는 바람에 적을 격퇴시킨 후 소대장의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지붕이 포삭 내려앉은 집안을 수색하던 중 소대장과 대원 한 사람의 시체를 발견한 것 외에 다리에 총상을 입은 여자(17-18세)와 부상을 입지 않은 여자(20세 가량) 한 명 (자매 중 언니)이 있기에 두 자매 중 다리에 총상을 입은, 옷깃에 단국대학 뺏지를 단 여동생은 독을 피우며 한 방 쏴 달라고 하는 바람에 분대장(3기생)이 사살해 버리고 언니(강순애)만을 중대본부로 연행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1중대장 이서근씨의 말에 따르면 그 때 전사한 2소대장은 부임한 지 2-3일 밖에 되지 않아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고, 신영균 해병이 연행해 왔던 그 여군포로(군속)는 대대본부(대대장 공정식 소령)의 지시에 따라 빈 농가 집 마당에 있는 큰 가마솥에 물을 데워 몸을 깨끗이 씻겨 대대본부로 후송시켰다고 한다.

 
한편 제대 후 약 10년 간 돈암동에서 이발소도 운영했고 부동산업에도 종사했던 신영균씨는 몇 해 전 임진각 (망향의 동산)에서 거행된 (해병대 참전 기념사업회 주관) 장단지구 전몰장병 추모식에 참석했을 때 문득 부모 생각과 함께 왕년에 자신이 소속되었던 1중대의 중대장 생각이 떠올라 행사장의 마이크를 잡고 “면횝니다. 이서근 선배님을 찾습니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이서근 대령님 계시면 나와 주십시오” 하고 방송을 한 것이 적중되어 마침 그 행사장에 참석한 이서근 대령을 만나게 되자 잃어버린 부모를 대하듯이 반가워하며 매년 해가 바뀌게 되면 친부모를 모시듯 부인과 함께 이서근 대령의 내외를 내방하고 있다고 하니 감동적인 화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신영균씨의 고향은 경북 문경이지만 어릴 적에 양친만이 황해도 광산촌으로 이주를 하게 되어 한 많은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서 살고 있는 신영균씨는 현재 부인과 함께 염소를 사육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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