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명인·기인

6·25전쟁기(‘51년) - 도솔산 13목표 점령의 수훈자 석태진 소령

머린코341(mc341) 2015. 11. 4. 16:24

6·25전쟁기(‘51년) - 도솔산 13목표 점령의 수훈자 석태진 소령

 
도솔산지구 탈환작전 때 천험(天險)의 13목표(△1175)를 점령하는데 수훈을 장식했을 뿐 아니라 적의 역습을 격퇴시킨 그날 밤의 방어전에서도 체코식 소련제 중기관총을 노획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9중대 1소대장이었던 석태진(石泰鎭) (당시소위)소령. 그러나 그러한 전공을 세웠으면서도 아무런 훈장도 타지 못했던 지지리도 훈장복이 없었던 그는 또한, 9중대가 14목표를 점령 했던날(6 .12) 15목표인 대암산(大岩山)에 진출해 있던 우 인접부대인 미 해병 5연대와 작전상의 연계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진두에서 지휘한 1소대 대원들이 밥통에 김이 무럭거리는 누런 조밥을 지어 놓은 1개 분대의 적병들을 계곡에서 발견, 그들을 전원 사살함으로써 생과 사가 뒤엉킨 비정(非情)한 전쟁터의 생리를 실감케 한 그런 화제도 남겼다.

 
또한 ‘94년에 이르러서야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게 되었지만 선친이 독립운동가이던 석태진 소령은 그가 대위의 계급으로 강화도의 독립14중대장으로 있을 때 현지 주둔 육군방첩부대장과 빚은 사소한 알력이 발단이 되어 그의 소속부대 장병들이 육군방첩대를 습격한 사건이 화근이 되어 결국 동기생들과의 진급경쟁에 낙오를 하게 되는 불운을 겪은 전설적인 인물이며, 그 사건(육군 방첩대 습격사건)은 본서의 12대 사건 스토리 <제 3 화>에 수록되어 있다.


1928년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여 중국 제남중학에 다니다가 8․15전에 귀향하여 정주중학을 졸업했던 석태진 소령은 ‘48년에 월남하여 해군 14기 신병으로 입대한 후 해병 2기로 전입하여 6․25전쟁기간 중 2대대 7중대에 배치되어 경인지구 작전과 남양주지구 작전을 거쳐 2대대가 목포지구에서 적 패잔병 소탕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50. 11) 해간 3기로 입대, 육군종합학교(12기)를 거쳐 장교로 임관함과 동시에 7중대 1소대장으로 임명되어 영덕, 영월 지구 전투와 가리산, 화천지구 전투를 거쳐 도솔산지구 탈환작전에 참가했는데, 그 13목표를 공격할 때 9중대 3소대장(김학렬 소위)은 중상으로 후송되고, 2소대장(김문성 소위)은 전사를 한 그러한 상황 속에 1개 소대 밖에 남지 않은 그 1소대를 진두에서 지휘하여 수훈을 세웠고, 또 그날 밤 적의 역습을 제1선에서 격퇴시켰던 그는 그 다음날 아침 전과 확인을 위한 수색대를 직접 지휘하여 바퀴가 달린 체코식 중기관총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는데 그 중기관총은 현재 제1사단 황룡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그런데 그처럼 혁혁한 전공을 세웠는데도 석태진 소위가 훈장을 타지 못했다는 것은 책임의 소재가 어디에 있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너무나 불공정한 결과가 초래되었기 때문이며, 재심 청구의 길이 있다면 재심이 이루어져야 되리라고 생각한다.

 
한편 3대대 9중대가 20목표를 공격할 때 공격소대를 지휘했던 1소대장 석태진 소위는 돌격을 감행한 순간 날벼락 같이 떨어진 화기중대의 81밀리 박격포탄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220~30명의 대원이 쓰러지자 자신도 좌측 엉덩이와 팔꿈치에 파편상을 입은 몸으로 권총을 손에 쥔 채 약400미터 후방에 있는 화기중대 진지로 내려갔으나 그가 노리고 있던 화기 중대장( 임모 중위)가 피신을 하고 없자 81밀리 박격포 진지로 가서 동기생 정모 소위의 면전에 권총을 들이대며 당장에라도 쏠 듯한 기세로 “야 이새끼야 우리 대원들 왜 죽였어!” 하고 윽박지르자 실수를 자인한 정 소위는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다고 한다.

 
그 20목표 점령 시 그 고지 일각에 쓰러져 있던 고사목(枯死木) 덕분에 큰 변을 당하지 않고 왼쪽 엉덩이와 팔꿈치에 가벼운 부상을 입고 진해병원으로 후송이 되었던 석태진 소위는 약 2개월 간 해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막사(幕舍)관장부대인 6대대로 전출되어 약 1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백령도 부대의 제2대 부대장으로 근무하다가 휴전 후 신편 부대인 강화도의 독립 14중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으나 54년 4월 중순경 전등사에서 개최된 육군 특무부대장 김 모 소령의 생일 파티에서 주고받은 약간의 말다툼이 발단이 되어 독립 14중대의 당직장교가 육군 특무부대에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여단본부(금촌)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3개월간의 정직처분을 선고받았고 5․16군사 정변이 일어났을 때 백령도 주둔부대의 화기중대장이었던 그는 부대장 최청송 대령이 참모회의 석상에서 미 7함대로부터 백령부대 장병들은 쿠테타에 가담하지 말아 달라는 전문이 왔다는 말을 했을 때 마치 부대장의 심정에 동조하듯 방첩대 장교도 동석한 그 얼어붙은 자리에서 “시기 상조야”라고 내뱉았던 그 말이 화근이 되어 그로부터 약 2개월 후인 7월 30일 부로 최청송 대령과 함께 예편 발령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 예편 후 석태진 소령은 그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925년 만주에서 온 대한독립단 비밀단원으로부터 권총 한 자루를 받고 정주지구의 군자금 모금책이 되어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형(소화천황의 탄생으로 2년 감형)했던 선친 (石昌倫. ‘44년에 타계)에 대한 재판기록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던 중 ’94년에 이르러서야 정부문서 보관소( 구 총독부 무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관련 문건(재판기록부분)을 찾아내게 됨으로써 그해 8월 15일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는 영예를 누렸으니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가 없을 것이다.

 
2001년에 등록된 사단법인 ‘6․25 참전 전우기념사업회’의 이사로 있는 석태진씨는 유일한 해병대 출신 임원으로서 임의 단체로 발족했던 78년부터 특히 사무총장으로서 대외 로비리스트로서 훈장을 타지 못한 참전전우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큰 업적을 남겼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본 내용의 저작권은 정채호 대선배님께 있습니다. 저작권관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