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기(‘51년) - 충령비 제막식을 거행한 박정모 대령
도솔산지구 탈환작전이 끝난 직후 9목표의 산록에서는 9목표 탈환전에서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7중대의 주관으로 전몰한 전우들의 영령을 추도하는 충령비(忠靈碑) 제막식을 거행하여 그 자리를 눈물바다로 화하게 했다.
충령비는 특별히 제작한 것이 아니고 격전장에 서 있는 고목나무의 아랫부위를 대검과 손도끼로 깎아 그곳에다 ‘忠靈碑’란 글자를 먹글씨로 써놓은 것이었으며, 붓글씨를 쓴 사람은 양반고을인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1소대장 김문한(金文漢)소위였다.
그 행사장에는 살아 남은 7중대장 박정모 중위 외에 2대대장 윤영준 소령과 연대장 김대식 대령도 2~3명의 참모들과 함께 참석을 했었다. 식순은 제막, 헌화, 조총발사, 추도문 낭독 등으로 짜여져 있었고, 중대장이 비를 가려 놓은 태극기를 벗기자(제막) 忠靈碑라 써 놓은 세 글자가 눈에 못 박히듯 확 드러나면서 현장 분위기를 더 한층 숙연한 느낌을 갖게 했다.
그 산기슭에 피어 있는 들꽃 대궁이를 꺾어서 준비한 헌화는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및 살아 남은 분대장 순으로 했고, 조총의 발사에 이어 진행된 추도문 낭독은 7중대장 박정모 중위가 “먼저 가신 전우들이여! 야속한 전우들이시여..... 어찌하여 그대들은 오늘의 이 승전을 맞기 전에 이 세상을 하직하셨단 말입니까?” 하고 말문을 연 그 대목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그 슬픔의 봇물이 터져 격한 오열과 호곡이 좀처럼 그치지 않음으로써 중대장은 더 이상 화기소대장 윤태환 소위가 쓴 추도문을 읽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러한 충령비를 마련해 놓고 그런 식으로 제막식을 거행한 예는 일찍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9목표 탈환전에서 7중대가 그처럼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된 것은 첫째는 공격 첫날(6. 4) 8목표를 점령했던 5중대가 7일까지 9목표를 공격했으나 2명의 소대장과 중대 선임장교를 포함한 약 3분의 1 이상의 병력을 잃게 됨으로써 부득불 2대대장은 6월 9일 예비대로 있던 7중대를 공격소대로 투입하게 되었는데, 치열한 접전 끝에 돌격을 감행한 1소대 (공격소대)가 고지 위로 넘어간 상태에서 적군의 배사면(背斜面) 방어전술에 걸려 생포를 당한 2명을 제외하곤 전원 사살을 당했을 뿐 아니라 공격소대가 목표를 점령한 것으로 착각한 1소대장의 요청에 따라 급히 실탄상자와 식량(건빵)을 운반해 간 KSC 노무자들을 비롯한 10여 명의 대원이 8부 능선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고지 위에 나타나 BAR 소총을 난사한 적병에 의해 사살을 당하는 변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는데, 고지 위로 뛰어 올라갔다가 생포를 당했던 그 2명 중의 한 사람인 김상진 해병은 한밤중 적병들의 감시를 받는 가운데 엉덩이를 까붙이고 변을 보는 척하다가 죽음을 각오하고 능선아래로 굴러 떨어져 구사일생 소대본부로 돌아 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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