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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기(‘51년) - 작전의 귀재 김종식 대령

머린코341(mc341) 2015. 11. 4. 16:30

6·25전쟁기(‘51년) - 작전의 귀재 김종식 대령

 
도솔산 탈환작전 때 연대본부 작전주임장교로서 연대장 김대식 대령을 보좌했고, 924고지 탈환작전 때 1대대장을 역임한 김종식 대령은 6‧25전쟁기간 중에 수립한 뛰어난 전공으로 2회에 걸쳐 을지무공훈장을 받았고, 또 2개의 충무무공훈장과 1개의 미국 동성훈장을 받은 수훈의 장교이다. 또한 작전의 귀재(鬼才)로 알려진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작전지도를 잘 판독할 줄 아는 그런 능력을 갖춘 장교로 기억되고 있다.

 
1925년 북만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하얼빈 대도관중학교를 졸업했던 그는 해방 후 고려자위단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가 대도관중학교 출신인 한예택 박성철씨 등과 함께 귀국하여 창설기의 해방병단에 입대한 후 48년 해군사관학교 1차 특교대에 입교할 때까지 병조장(상사)의 계급으로 SP(헌병대의 전신)에서 근무하며 해방병단 내부에 침투한 좌익 프락치 검거를 위해 많은 활약을 했고, 소위로 임관한 후에는 군산경비부 정보장교로 근무하다가 해병대의 진주 주둔기에 해병대로 전입하여 초대 방첩대장으로 활약했다. 또한 해병대가 제주도로 이동한 뒤 육군초등군사반(2기)을 수료(50.5)했던 그는 6‧25전쟁 초기 고길훈부대와 김성은부대의 수색소대장을 차례로 역임하며 정보 작전업무도 겸임했는데 50년 8월 초의 진동리전투 때는 이런 전공을 세웠다.

 
즉 부대가 위험한 상황 속에서 철수를 단행할 때 약 500미터 전방의 하천지대에 200~300명의 적이 출현한 것을 쌍안경으로 확인했던 그는 근처에서 철수 중인 3중대 화기소대 박격포분대장 고문갑 중사에게 그 적을 쌍안경으로 확인을 하게 한 연후에 60밀리 박격포로 때려 보게 한 다음 쌍안경으로 탄착점을 확인 유도하여 10여 발의 명중탄을 퍼붓게 함으로써 고 중사는 미국 정부로부터 은성무공훈장을 타고 자신을 동성훈장울 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산‧함흥지구전투 기간 중인 50년 11월 초 1대대 부대대장으로서 제2중대 화기중대의 1개 소대를 직접 지휘하여 철교와 발전소가 있는 통천(通川)지구로 향했던 김종식 대위는 가는 도중 길가에 있는 폭격을 당한 민가에서 죽어 있는 여인의 시체를 붙들고 애처럽게 울고 있는 대여섯 살 가량의 사내아이가 있기에 그 아이를 차에 싣고 와서 며칠 간 보호하고 있다가 진해로 내려가는 트럭 운전병 편으로 진해에 피난 와 있는 자기 누님 집에 데려다 주어 보살펴 주도록 당부를 했는데, 결국 그 아이는 김 대위의 누나가 거두지를 않고 자식이 없는 해군문관이(하사관이란 설도 있음) 양자로 잘 양육하여 후일 해군사관학교에 입교시켜 대위의 계급으로 예편하여 현재 서울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924고지 탈환작전 때 1대대를 지휘했던 김종식 대령은 그 작전에서 다음과 같은 비화를 남긴 지휘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즉 공격 첫날(51.8.31) 우군(USMC)포의 오폭으로 3대대에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또 그 다음날에는 11중대장 육동욱 중위가 부상을 입고 후송 당하고 선임장교 강길영 소위가 전사하는 등 피해가 막심하자 9월 2일 10중대와 교체시킨 1중대가 그 다음날 오후 8시 30분 목표고지를 점령했다가 다시 빼앗겼을 때 3중대를 투입하여 8부 능선을 사수토록 했는데, 후일 그가 술회한 바에 따르면 그 날 밤 1대대의 예비중대를 투입했더라면 능히 목표고지(924고지)를 재탈환 할 수 있었으나 피해가 막심한 3대대를 위해 우정 3중대로 하여금 8부 능선을 사수케 한 다음 그 다음날(9.3) 아침 3중대를 9중대의 조공이 되게 하여 9중대로 하여금 목포고지를 점령케 했다고 하는데, 피해가 심한 대대를 위해 최후의 승리를 양보했다는 그와 같은 이야기는 일찍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의 1대대 작전장교 이서근 대령도 그 정황을 알고 있다고 한다.

 
‘52년 12월 하순경 후임대대장으로 발령이 난 남상휘 중령을 대대 OP로 안내하여 전선을 시찰하게 했던 김종식 소령은 쌍안경으로 1중대 전방지대를 관찰하던 중 백색 위장복을 입은 7~8명의 적 정찰병을 발견하곤 남 중령에게 그들을 확인시켜 준 다음 그들을 혼내 주고 싶은 생각에서 곁에 있는 1중대장 김경홍 소위와 화기중대장 이기덕 중위에게 지시하여 60밀리와 81밀리 박격포탄으로 2탄 3탄 거리를 좁혀 가며 그들을 포위 공격하여 결국 사생결단 달아나지 못하고 넋을 잃은 체 서 있는 소년병 하나를 투항케 하여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는데 이러한 일도 일찍이 없었던 일로 기억되고 있다.

 
924고지 탈환작전 때 1대대를 지휘했던 김종식 대령은 그 후 해병학교 교무처장을 거쳐 보충병훈련대인 10대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중공군의 1차 추기공세 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김포지구에서 재편 중인 1대대장으로 발령 받게 됨으로써 2회에 걸쳐 1대대장 근무를 했으며 발령을 받고 진해를 떠날 때 이번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장충단 묘역에 「고 해군소령 김종식씨묘」란 팻말을 꽂아 놓고 출동했던 그는 재정비된 1대대가 장단지구로 이동하여 전투단의 예비대로 있는동안(52년 12월 초순경) 삭발중대라는 기습대를 운용하여 중공군 3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삭발중대라는 별명이 생겨나게 될 것은 뜻밖의 상황 때문이긴 했지마는 1차 기습전에서 1중대가 소대장 1명을 포함한 수 명의 사상자를 내게 되자 그 책임을 통감하게 하기 위해 1중대장 엄상록 중위 이하 전 대원에게 삭발명령 내렸기 때문이며, 뜻밖의 상황이란 기습대가 거쳐서 가게 돼 있던 지점에 주저항선 부대의 야간 잠복대가 예정대로 나가 있지 않고 중공군의 매복대가 매복해 있다가 기습대를 공격한 그런 상황이었다. 따라서 삭발중대는 문제의 그 지점에 매복해 있는 중공군을 기습하여 그와 같은 전과를 거둔 것이며, 기습전이 성공한 후 김종식 소령은 그 주저항선대대(5대대)의 대대장에게 그 날 밤 매복대가 나가 있지 않아 그와 같은 피해를 입었다는 말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군 1‧2차 특교대 출신자들 가운데 제일 먼저 제1연대의 대대장이 되었고, 또 전시 하에서 가장 많은 훈장을 탄 김종식 대령은 청백한 인품에 능력도 있고 인간미도 풍부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는데도 관운 때문인지 아니면 한 번 과음을 하게 되면 2~3일 간 출근을 하지 못하는 주벽 때문인지 끝내 별을 달지 못하고 정보국장 1사단 참모장등을 거쳐 66년 대령의 계급으로 예편했다.

 
한편 예편한 뒤 약 3년 간 풍산금속에서 근무한 다음 약 8년간에 걸쳐 한양대학과 부산대학 학군단장을 역임했던 그는 , 94년 지병으로 타계했으며, 고인은 2001년 전쟁기념간에서 호국의 인물로 현양되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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