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기(‘51년) - 추억의 산주인공 변광선·강동구씨
‘51년 6월 20일 도솔산지구 탈환작전을 완료한 해병제1연대는 7월 중순경까지 그 지역을 방어하다가 미 해병사단의 작명에 따라 그곳을 미 육군부대에 인계하고 홍천(洪川) 북방의 철정리(哲定里)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약 40일 간 맑은 홍천 강물에 전신을 씻으며 휴식과 재정비를 했다.
그런데 그 철정리에 머물고 있는 동안 연대본부에서는 장병들의 사기 앙양을 위해 씨름과 배구 등의 운동경기를 비롯해서 장기 두기 시합과 노래자랑 대회 및 무대극(단막극) 경연대회를 개최했고, 한 차례의 환상적인 위문공연도 관람했는데, 여기에 소개하는 두 사람 중 변광선(병6기)씨는 2대대 소속으로 무대극 경연에 출연했던 사람이고 강동구(해군7기)씨는 중포중대의 배구 선수와 씨름선수로 출전했던 사람이다. 여러 종목 가운데 가장 인기를 끌었던 것은 궁금증과 흥미를 유발하게 했던 단막극 경연이었다.
그 무대극 경연을 위해 각 대대에서는 물론 남자 한복 준비도 해야했지만 특히 여장(女裝)에 필요한 치마 저고리와 분(粉)과 연지 등의 화장품을 구하기 위해 비밀리에 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어떤 대대에서는 군의관을 원주(原州)로 보내기까지 했고 어떤 대대에서는 인근 두메골의 빈 민가를 샅샅이 뒤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해서 남자옷과 치마 저고리나 고무신짝은 그럭저럭 구할 수가 있었으나 분이나 연지 등은 구하기가 어려웠던 나머지 어떤 대대에서는 빨강 빛깔의 약을 물에 이겨서 연지 대신 사용하기도 했고, 또 어떤 대대에서는 흰 약가루를 분 대신 잔뜩 얼굴에 쳐 바르는 등 묘책 강구에 급급했었다.
그리고 연출시간이 약 30분 간으로 제한된 단막극 경연은 신랑이나 새댁으로 짝짓거나 총각 처녀로 짝지은 출연자들의 소박한 애정표현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롭고 우스꽝스러웠지만 관중들을 포복절도(抱腹絶倒)케 했던 것은 수줍은 시골 처녀와 새댁으로 분장한 절구통 같은 머슴애들의 서툰 역할이었으며 특히 바람둥이 남편의 예쁘장한 새댁으로 분장하여 시선을 끌었던 변광선 해병은 흰 수건을 머리에 덮어 쓴 다소곳한 모습으로 베개를 젖먹이 아이처럼 껴안은 채 “어린것은 젖 달라고 보채는데 밤낮 바람만 피우고 다니다니 원...” 하며 독백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연기를 잘 해냈고, 그 자리에 바람처럼 나타난 천치 바보의 낭군이 “색씨, 내 색씨, 내가 우리 애기 젖 줄까?” 하고 한 말이 청중들의 귀에 젖이 아니고 “ X을 줄까?” 하는 말로 들려 그 자리를 폭소의 도가니로 화하게 했었는데, 지금도 변광선씨는 홍천 강변에서 누렸던 그 즐거운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인천 상고 4학년 때 학도병으로 해병대에 지원입대 했던 변광선씨는 제대 후 인천 사범학교 연수과를 졸업한 다음 약 7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그 당시 씨름대회에 출전하여 우승을 겨루었던 사람들은 1대대의 이재규 중포중대의 강동구(신장 180센티) 및 신관용 하사관 등이었는데, 특히 중포(중박격포)중대의 배구선수로도 출전했던 강동구(姜東九, 해군 7기, 경남 합천 출신) 선수는 휴전 후 포병대대의 명물(名物)로 존재하며 금촌, 파주, 의정부, 김포, 강화 등지에서 개최된 민간인 씨름판을 휩쓸다시피 하며 7~8마리의 송아지(시골 시름판에선 주로 송아지를 우승 상품으로 내걸었음)를 딴 기록을 남겼고, 또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화제도 뿌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즉 애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은 옛부터 씨름판에서 소(牛)를 딴 장사의 샅바를 입수하여 귀저기처럼 차고 있으면 아이를 낳게 된다는 미신도 있고, 또 샅바를 어깨에 두르고 있으면병치레를 하는 아이나 손이 귀한 집안의 자손이 명줄을 길게 할 수 있다는 미신 때문에 우승을 한 장사의 샅바는 그 값어치가 대단하다고들 하는데, 말하는 강동구 준위의 말에 따르면 김포와 강화에서는 그 샅바를 차지하게 된 부잣집 사람(불임여의 남편)이 기분이 좋아서 강동구 장사 뿐 아니라 그를 수행한 6~7명의 대원들까지 여관에 투숙시키며 칙사 대접을 하는 바람에 코가 비뚜러지게 술을 마셨다고 한다.
해병대의 창설요원이며 해포대의 배구 및 씨름선수로서 많은 화제를 남겼던 강동구씨(1930년생)는 66년 11월 준위의 계급으로 예편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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