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기(‘51년) - 8부 능선을 사수했던 김영상 장군
해간3기 출신 장교로 현재 대선기공(大鮮技工) 주식회사의 대표이사 회장으로 재임 중인 김영상(金永祥) 장군(예, 준장)은 924고지 탈환작전 때 1대대 3중대의 선임장교로서 8부 능선을 사수하라는 대대장(김종식 소령)의 명령을 대원들의 시체를 끌어 안고서 지킨 용감한 지휘관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73년 10월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될 때 예편한 대령급 이상 장교들에게 베풀어진 정부 당국의 특별한 취업알선으로 서울통상 그룹의 관리본부장(상무이사) 으로 취임했던 그는, 그 직장을 자신의 출세를 기약할 보배로운 발판으로 삼아 최선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듯 그로부터 12년 간에 걸쳐 서울통상 전무를 비롯해서 유니버스공업(주) 대표이사 사장, 유니언전기(대표이사) 신영전기(대표이사) 금선기전(대표이사) 금성정밀공업(주) 대표이사 사장직을 차례로 역임했고, 또한 10년 전부터서는 합자회사인 현 대선기공(주) 대표이사 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국내 전기공업계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930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문리대 2학년 재학 중 6‧25전쟁의 발발로 해병대에 입대, 해간3기로 임관했던 김 장군은 1‧4후퇴 직후 1연대 1대대 3중대 3소대장으로 임명되어 영덕지구 전투를 비롯, 영월지구 전투와 가리산, 화천지구 전투를 거쳐 도솔산 탈환작전과 924고지 탈환작전에도 참가했는데, 그 924고지 탈환작전 때 3중대 선임장교였던 그는 9월(51년) 2일 오후 8시 30분경 목표고지를 점령했던 1중대가 적의 역습으로 점령했던 고지를 빼앗기자 1중대와 교대하여 8부 능선을 사수하라고 했던 1대대장 김종식 대위의 명령을 부하들의 시체를 끌어안고 엉엉 울면서 지켜내었던 일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그 이튿날 아침 3대대 9중대와 함께 그 924고지를 점령했던 일을 한없이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한다.
924고지 방어기간 중에 수행원 751고지 기습전에서 김영상 중대장은 오른쪽 다리 두 군데에 다발총탄을 맞고 쓰러졌는데, 그 때 전령을 비롯한 2~3명의 대원이 출혈이 심한 중대장을 구하기 위해 압박붕대로 구급조치를 한 다음 번갈아 업기도 하고 들것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몇 시간에 걸쳐 죽을 고생을 하며 원주(原州) 근처에 있는 미군 야전병원까지 운반해 주었던 그 일과 미군 군의관들이 총탄이 박힌 다리를 덮어놓고 톱으로 자르려고 하기에 대학 교수의 꿈을 박살내는가 싶어 칼빈 소총을 집어들고 병원 천장을 난사했더니 그 군의관들이 기겁을 하고 달아난 그 악몽 같은 일을 그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한편 도솔산 탈환작전을 마친 후 해병대1연대는 7월 17일부터 8월 26일까지 40일 간 홍천(洪川)강변의 철정리에서 휴식과 재정비를 했는데 그 기간 중 3중대 3소대장이었던 김영상 소위는 장가를 든 어느 분대장으로부터 “처녀 손 한 번 잡아보고 죽고 싶다”는 것이 대원들의 원이라는 말을 듣고 언제 죽게 될지도 모를 젊듸젊은 저 장정들에게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인 섹스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기앙양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머지 대대본부에 요청하여 후방으로부터 모집해 온 2명의 여자를 확보하여 밤중을 이용해서 31명의 소대원들로 하여금 한 번씩 경험을 하게 함으로써 대원들의 원도 풀어 주고 사기도 진작시켰다고 했다.
김영상 장군이 자신의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던 그 전령(김병욱 해병)과 재회를 했던 것은 그가 사령부 작전교육국 교육과장(초대 교육과장)으로 있을 때인 52년 6월 경이었다. 그 때 김병욱 해병은 약 2개월 동안 황달 질병으로 해군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옛 중대장의 배려로 사령부 인사국 복무기록과로 발령이 나 있었다.
그리하여 약 반년 간 사령부에서 함께 근무했던 김 해병은 제대를 하여 복학(한림중학교)을 한 다음 상고를 거쳐 세무공무원 채용시험에 합격하여 약 10년 간 제주도와 광주 및 서울지방 국세청 산하의 여러 세무서를 전전하다가 사직을 하고 세무사업을 개업하던 중 73년 전 최고위원 오정근 장군(해간3기)이 국세청장으로 취임하자 김 장군은 오 청장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사정이 여의치가 못해 복직을 원하고 있던 김병욱 해병을 복직시켜 줌으로써 보은의 뜻을 베풀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병욱씨의 말에 따르면 김 장군은 누구에게든지 자기를 소개할 시에는 일선 중대장 시절에 나의 목숨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했다고 했다.
신영전기(주) 대표이사 사장으로 있을 때 김영상 장군은 적탄이 빗발치는 상황 속에서 3중대장 강용 중위가 “3소대장 죽으면 안돼, 바위 뒤에 숨어”라고 했던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어 도솔산 전투 때 3중대장이었던 그 강 선배의 딸을 그 회사에 취직을 시켜 주고 결혼을 할 때도 정성껏 도와 줬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는가 하면 사글세로 보증금을 다 까먹게 되어 집을 비워 주게 된 선배를 위해 전셋돈을 마련해 주었다는 소문도 전해지고 있고, 또 신현준 사령관 부인께서 입원을 했을 때는 덕성회에서 130만 원의 성금을 갹출하여 쾌유를 빌었으나 안타깝게도 그 성금이 조위금이 되고 말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금년 2월 13일 전쟁기념관에서는 2월의 ‘호국의 인물’로 선정된 고길훈 장군의 유덕 현양식이 거행되었는데 그 식전에서 김영상 장군은 덕성회(德星會) 회장의 자격으로 추모사를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가 고인들이 되었지만 고길훈 장군의 경복고보 시절의 5학년(졸업반) 담임이었던 김 장군의 친형 김영기 교사는 고 장군이 교칙을 위반한 사건(음주 폭행)으로 퇴교를 당할 뻔했을 때 고 장군을 구해 준 일이 있었고, 또 그러한 인연으로 고 장군은 현역 때 어려움에 처한 김 장군(영관시절)을 도와 준 보은의 드라마와도 같은 일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령의 계급에서 준장으로 승진할 때 김영상 대령은 해간 3기 출신 장교들 중에서(특별케이스는 제외하고) 1차로 승진발령을 받은 맴버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30년 간 전문경영인으로서 놀라운 경영실적을 쌓아 81년 경영인협회로부터 전문경영인상을 받은 바 있는 김영상 장군은 과거 6년 반 동안 대표이사 사장으로 있었던 신영(新榮) 전기(주) 출신 기업인들(약 50개 업체)의 친목단체인 신영신우회의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어 있으며, 또한 해병대 출신 예비역장성들(역대사령관 제외)의 친목단체인 덕성회(德星會)의 제 3대 회장인 그는 금년 2월 총회의 결정에 따라 만료된 3년 임기를 1회 더 연임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본 내용의 저작권은 정채호 대선배님께 있습니다. 저작권관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해병대 역사 > 해병대 명인·기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6·25전쟁기(‘51년) - 소대장의 방패가 된 강두숙 하사 (0) | 2015.11.07 |
---|---|
6·25전쟁기(‘51년) - 투혼을 빛낸 3인의 용사들 (0) | 2015.11.07 |
6·25전쟁기(‘51년) - 추억의 산주인공 변광선·강동구씨 (0) | 2015.11.07 |
6·25전쟁기(‘51년) - 훈장을 거부한 이서근 대령 (0) | 2015.11.04 |
6·25전쟁기(‘51년) - 작전의 귀재 김종식 대령 (0) | 2015.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