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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기(‘51년) - 소대장의 방패가 된 강두숙 하사

머린코341(mc341) 2015. 11. 7. 16:03

6·25전쟁기(‘51년) - 소대장의 방패가 된 강두숙 하사

 
해병대의 전투사를 통해 우군포의 오격(誤擊)에 의한 피해가 가장 컸던 전투는 924고지 탈환작전이었다. 공격 개시일인 8월(51년) 31일 3대대(장, 김윤근 소령)는 주공(主攻)인 11중대가 목표고지의 정면을 공격하고 조공(助攻)인 9중대는 우측 능선으로 우회공격을 했다.

 
그런데 공격도중 짙은 골안개 때문에 길을 잘못 택했던 9중대는 주공인 11중대 보다 먼저 11중대의 진출 예정지역으로 진출하여 시계가 불량한 상태에서 적과 치열한 교전이 벌어져 중대 본부에 위치하고 있던 미 해병대의 포병관측장교가 1소대 진지로 나타나 105밀리포의 지원사격을 요청한 결과 처음에는 전방의 적진지로 날아가던 포탄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갑자기 아군진지 전후방으로 날아와 작렬하는 바람에 9중대 1소대의 경우 급히 산병호 속으로 뛰어든 대원들을 제외하곤 거의 전원이 피해를 입었고, 9중대의 다른 소대와 11중대의 일부 지역까지 피해를 입게 됨으로써 순식간에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니 실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우군포의 오격 과정에서 11중대 1소대장 임경섭(林炅燮) 소위는 그의 전령 강두숙(康斗淑) 해병(3기)이 등 뒤쪽에서 발사된 포탄이 가까이 비래하는 순간 위험에 노출된 소대장을 산병호 속으로 급히 밀어 놓고 자기 몸으로 그 위를 덮치지 않았더라면 목숨을 잃어버릴 뻔했고, 대신 자기를 구해 준 그 전령은 어깨에 파편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강두숙 해병이 발휘한 그와 같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전신은 일찍이 모군의 창설기 때부터 상‧하급자가 한 가정의 친부모, 친형제처럼 서로 공경하고 사랑했던 그 가족적인 단결정신을 표상하는 것이었다. 6‧25전쟁 기간 중 강두숙 해병처럼 자신의 몸을 덮쳐 소대장의 위기를 구한 전령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924고지 탈환작전에서 수립한 전공으로 충무무공훈장을 탔던 강두숙 해병은 약 2개월 간 입원해 있던 진해 해군병원에서 퇴원한 후 56년 6월 24일 하사의 계급으로 전역할 때 까지 신병훈련소 인사과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제대 후 서귀포시 도순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을 때인 ‘74년 강두숙씨는 제주도를 시찰한 박정희 대통령이 서귀포읍을 방문했을 때 박 대통령을 수행한 임경섭 대령(당시 사령부 보안대장)을 임 대령의 배려로 23년만에 처음으로 만나 잠시나마 해투의 정을 나누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후 강두숙 하사는 약 10년 간 임경섭 장군과 서신교환을 해 왔으나 예편한 임경섭 장군이 극동방송국 부사장으로 취임한 후로는 소식이 단절되고 말았다고 한다.

 
10여 년 전 미국으로 이민간 임경섭 장군은 현재 LA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이승에서 임경섭 장군과 그러한 인연을 맺었던 강두숙 하사는 2001년 1월 4일 이승을 하직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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