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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기(‘51년) - 훈장을 거부한 이서근 대령

머린코341(mc341) 2015. 11. 4. 16:32

6·25전쟁기(‘51년) - 훈장을 거부한 이서근 대령

 
모군의 창설기 때부터 작전통(作戰通)으로 알려져 있던 이서근(李西根) 대령. 도솔산 지구 탈환작전 때 1중대장으로서 난공(難攻)의 4목표 공격에 앞장섰던 그는 17일 간의 혈전이 끝난 후 부하 대원들을 많이 잃은 죄책감 때문에 훈장 받기를 거부한 그런 인간성을 지닌 지휘관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생활 미술과 원예와 조경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그는 예편 후 월남으로 진출하여 ‘월남인 기술훈련소’의 소장으로 공헌한 적도 있었고, 강원도 철원에 있는 20만평의 황무지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해병정신으로 신성한 땀을 뿌려 자신이 명명(命名)한 동송(東松)농장을 일구기 위해 심혈을 다한 그런 인물이다.

 
평남 정주 출신(1923년생)으로 일찌기 만주 신경(新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해군에서 복무하던 중 8. 15해방과 함께 귀국했던 그는 49년 1월 해군에 입대하여 하사의 계급으로 항해학교 특수과를 거쳐 창설기의 해병대로 전입하여 사령부 작전에서 근무하던 중 해간1기로 선발되어 육사(9기) 위탁교육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다.

 
그리하여 다시 사령부에 복귀하여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인사참모실 보좌관으로 근무했던 그는 해병대가 경인지구 작전을 거쳐 북한지역에서의 작전을 마치고 진해로 철수할 때까지 1대대 1중대 선임장교로 근무하다가 1중대장으로 임명되어 영덕, 영월지구 전투와 홍천, 화천 및 도솔산 지구 전투에 참가했고, 924고지 탈활작전 때는 1대대 작전장교로 근무했는데 특히 육군3군단의 작전을 지원했던 영월지구 전투에서 1중대는 흰눈이 쌓여 있는 고비덕산(高飛德山)을 공격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봉산리(평창) 전투에서는 2소대의 소총병 신영균 해병(5기생) 이 여군 포로를 생포하여 중대본부로 연행해 왔는데, 보고를 받은 대대장(공정식 소령)이 깨끗이 목욕을 시켜서 후송하라고 하는 바람에 그 엄동설한에 빈 농가 마당에 있는 쇠죽 끓이는 가마솥에 어렵게 물을 데워 온 몸이 동상에 걸려 있는 그 여군을 목욕을 시킨 일화를 남겼다. 그 여군포로 생포에 얽힌 이야기는 ‘여군 포로를 획득한 김병욱․신영균씨’ 편에 소상하게 언급되어 있으며, 그 신영균씨(75세)가 이서근 대령을 친 부모처럼 받들게 된 특이한 사연도 함께 적혀 있다.

 
한편 도솔산 탈환작전 때 1중대는 특히 주저항선 상에 있는 4목표 공격전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2중대로부터 일부 병력을 지원 받기까지 했는데 그 전투를 회상하는 왕년의 1중대장 이서근 대령은 공격 둘쨋 날 아침 주먹밥이 배식 되는 자리에서 중대장 앞에 철모를 내밀며 “중대장님 밥 대신 수류탄을 주십시오” 라고 했던, 그리고 왜 하필이면 수류탄만 달라느냐고 하자 “저놈들이 수류탄으로 우리 전우들을 많이 다치게 하고 죽게 했으니 나도 수류탄으로 저놈들을 쳐부시고 말겠다”고 했던 그 용감한 제주 출신 학도병이 24목표 공격전에서 산화하고 말았던 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17일간의 전투기간 중 약 7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도솔산에는 백령도에서 모집한 상당수의 7기 신병들이 보충되어 왔었는데, 그들 중 17세의 나이로 입대했던 정양원씨(황해도 은율 출신)의 말에 따르면 수십명의 신병들이 중대본부에 도착하여 중대장에게 도착신고를 하자 중대장은 그 신병들을 한 번 훑어 본 다음 자기에게 “넌 몇 살이지?” 하고 묻기에 “17세 입니다”하고 대답했더니 “차라리 내가 죽어야지, 죽이기 아깝군”하며 행정병으로 하여금 화기소대로 보내 밥을 많이 먹이도록 하라고 지시를 했다고 한다.

 
한편 이서근 대령이 제주 막사장으로 있을 때 (60년) 제주시에서는 해군 군의관 출신인 장시영씨를 비롯한 몇 명의 3․4기 출신 예비역 유지들의 발기로 제주시의 중심가인 동문 로타리에 제주도와 해병대와의 인연을 표상하는 海兵魂塔(해병혼탑)을 건립했는데 그 혼탑 건립에 적극 동참했던 이 대령은 자신의 미술재능을 발휘하여 그 탑의 형상을 직접 도안했고, 또 그 예산(50만환)을 사령부에서 지원함에 따라(일부는 장시영씨 등이 갹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탑의 건립공사도 진두에서 지휘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서근 대령이 진해기지 참모장으로 있을 때인 68년 해병대에서는 처음으로 역사의 유물을 보존하기 위한 기념관을 건립했는데 진해 기지에 터를 잡았던 그 기념관 건립시에도 이서근 대령은 자신의 모든 재능과 열정을 다 쏟아 부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서근 대령이 예편을 했던 것은 한국군의 월남 파병기간 중인 69년 3월이었다. 자타가 공인하듯 성실하고 청렴하고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장군으로 승진하지 못했던 그는 훈장을 외면했듯이 미련을 버리고 자신의 희망에 따라 대한통운과 경남기업이 미국의 민사(民事) 원조를 받아 운영하고 있던 ‘월남인(越南人) 기술훈련소’의 소장으로 취임하여 약 3년간 약간 명의 기술 보조원을 거느리고 농사용 경장비와 중장비의 취급요령을 교육시키는 사업을 추진하여 수백명의 월남인 기술자들을 양성했으나 주월 미군의 월남화 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그 사업은 주월 미군과 한국군의 철수가 이루어짐에 따라 중단되고 말았다.

 
월남에서 그러한 일을 추진했던 이서근 대령은 74년 철의 삼각지의 일변인 철원군 동송면에 소재하는 약 50만평의 황무지(국유지)에 대량의 해바라기씨를 뿌려 재배를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그 이듬해에는 옥수수와 배추 무 등의 야채씨를 뿌려 재배를 시도해 보았으나 7월에 내린 폭우로 실패하는 바람에 76년 봄에는 대량의 육도(陸稻)를 재배하는 한편 한우 사육을 위한 목장을 조성한 연후에 그 농장지를 정부로부터 불하 받을 계획이었으나 약 4년 간에 걸쳐 트렉터를 직접 운전하며 땀흘린 노력과는 달리 방해하는 세력의 등장과 대자연이 그에게 준 가혹한 시련 등이 겹쳐 필경엔 그 우람한 뜻을 접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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