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글/해사23기 김현기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이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

머린코341(mc341) 2015. 11. 5. 14:41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이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


국  방  대  학  원
교수    김  현  기


요약


    전쟁에서의 기습은 궁극적인 승리까지는 보장할 순 없겠지만 전장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주도권의 확보에는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기습의 규모에 따라서 파급효과는 전쟁전반에 미칠 수도, 또는 일부의 전역에만 미칠 수도 있다. 그 효과는 물리적 효과와 심리적 효과로 들 수 있으며, 양자가 병행하거나 경우에 따라서 한 쪽이 다른 쪽과 연계되어 영향을 미치게 되고, 어느 시점까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두 효과가 상호간에 영향을 주어 상승효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상승효과는 기습의 대상과 결과가 전쟁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군사목표에 지향되거나, 적의 군사행동의 방향을 전환시키거나, 수세의 위치에서 공세이전을 위한 기회조성에 결정적으로 작용되었을 때는 적군뿐만 아니라 아군의 전쟁지도에도 공히 영향을 미치게 되어 전쟁의 양상까지도 변화하게 만든다.


    인천상륙작전은 상륙전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천연적 장애요인을 극복하고 성공한 상륙작전의 가치와 기습의 의미를 일깨워준 대표적인 작전이다. 이는 과도하게 신장된 공산군의 병참선과 낙동강 방어선의 교착상태를 돌파하여 지상공격시 감수해야 할 인적․물적 자원의 손실 방지와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이고 상대적으로 종심에 비해 정면이 협소한 전장의 지형적 특성 등의 전략적 요소와, 태평양 전쟁시의 미해군 및 해병대의 상륙작전 경험과 능력을 맥아더 장군 자신의 전략적 안목으로 집약시켜 적의 최소 예상선과 최소 저항선에 투사시켜 결정적 승리를 달성한 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과 수도 서울 탈환작전이 한국전쟁에 미친 크나 큰 비중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들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공산군측의 자료 확보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사실상 추정에 의존하여 공산군측의 전쟁지도에 미친 영향을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공개되기 시작한 공산군측의 자료는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한국전쟁 기간 중의 여러 작전들에 대한 새로운 연구에 기폭제가 되고 있다.


    작전의 성공은 한국전쟁의 판도를 변화시킬 정도로 공산군측뿐만 아니라 유엔군 측에도 공히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공산군 측면에서는 중공군 참전 시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으로 부터의 후퇴과정에서 조직의 붕괴를 가져와서 결국 작전의 주체를 상실하고 중공군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유엔군 측면에서는 종래의 전쟁목적이 실지회복에서 북진통일로의 전환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에게는 수도 서울 탈환이 주는 정신적 효과로 국민의 사기 및 군의 전투의지 고양이라는 긍정적 영향뿐만 아니라 북진시 평양이라는 지형목표에 집착하게 하는 등의 부정적 영향도 발생하게 하였다.


    본 연구의 목적은 최근에 들어 공산군측 자료의 입수 등으로 새롭게 연구되기 시작하고 있는 인천상륙작전의 가치와 수도 서울 탈환이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을 재조명하므로 서 기존의 연구에 대한 발전과, 앞으로의 연구활동에 대해 보탬이 되고자 한다. 연구의 범위와 방향은 인천상륙이 실시하게 된 배경과 계획의 발전과정, 작전의 실시, 작전의 결과 및 교훈을 논의한 후 공산군측에서의 북한군과 중공군, 유엔군 측에서의 한국군과 미군의 4가지 범주의 전쟁 행위자들의 전쟁지도와 작전의 실시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여 인천상륙작전과 수도탈환이 한국전쟁에 미친 전쟁사적 가치에 대한 중요성을 재 강조하고자 한다.


    인천상륙작전은 작전 자체의 성과보다는 이후의 피․아 작전에 미친 영향에서 더욱더 전쟁사적인 의의를 갖는 작전이었다. 과거 세계의 수많은 상륙전사를 보더라도 인천상륙작전 만큼 전쟁의 행위자와 전쟁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친 작전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이유들은 기습효과 달성을 통한 적의 전투의지에 대한 파쇄와 상대국 전쟁지도부의 성향, 그리고 언제든지 상륙작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해․공군 세력의 불균형, 전장의 지리적 특성이 상호 결합되어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습의 효과는 여러 전사에서 입증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2차 세계대전시 독일군의 판져사단에 의한 경이적인 돌파작전에 의한 프랑스군의 붕괴, 제3차 중동전쟁시 이스라엘 군에 의한 시나이반도의 점령, 한국 전쟁시 T-34 전차를 앞세운 북괴군의 기습공격으로 조직적 저항 없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상황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기습이 심리적인 마비현상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심리적인 충격은 전투력 상승의 기하하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전투전의 병력손실 비율이 1:1에서 기습을 달성하고 난 이후에는 1:5의 비율로 공자에게 유리한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에서 이와 같은 심리적인 충격달성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인천이 서울과 근거리에 위치하여 서울을 통한 북괴군의 병참선과 퇴로를 차단할 수 있으며, 인천의 지리적 난관으로 북괴군이 예상하지 못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즉, 손자에 의한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사상을 기반으로 체계화한 리델하트의 간접접근전략의 지향점이 되는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으로의 전투력 집중이었기 떄문에 북괴군에게 심리적․물리적 교란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전투의지 파쇄 효과는 상술한 심리적․물리적 교란을 통해서 달성된다. 물리적 교란은 아군의 기동에 의해서 적의 배비와 조직을 교란시키고, 보급을 위기에 빠뜨리며, 적의 퇴로를 위협하므로 서 적의 전투력 발휘에 혼란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며, 심리적 교란은 물리적 교란 효과를 적 지휘관에게 인상시켜 준 결과인데 아군의 행동에 대하여 대응할 의지를 상실함으로서 주도권을 박탈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심리적 교란은 물리적 교란을 당한 직후에 통상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이 낙동강 전선에서의 적의 패주와 패주시 나타났던 조직의 와해는 기습적으로 실시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1차적인 심리적 충격의 효과와 수도탈환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 그리고 적이 병참선과 퇴로를 차단 당함으로서 배가된 2차적인 심리적 충격이 기하학적으로 상승되었기 때문이며, 이후 중공군의 개입 시에도 나타났던 대상륙방어에 대한 강도는 또다시 유엔군으로 부터 기습적인 상륙작전을 당할 시 겪게될 전투의지 파쇄에 대한 우려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미군과 한국군에게도 전쟁목적의 변경과 긍정적․부정적 영향이 나타난 것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이 주는 심리적인 고무와 작전적인 잇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지휘관의 성향은 상대편으로 하여금 방책을 수립하는데 작용하는 한 요소가 된다. 맥아더가 태평양 전쟁시 상륙작전을 통하여 전세를 역전시키고, 개인적으로 풍부한 상륙작전 경험과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은 적 지휘관으로 하여금 상대편 지휘관의 성향에 대한 대비를 위해 대상륙 방어작전에 많은 노력과 자원을 투자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모택동이 맥아더의 성향을 분석하여 인천이나 진남포 지역에 상륙작전을 감행할 것을 예견하여 북괴군에게 권고하는 내용을 참작하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유엔군과 공산군의 해․공군 세력의 불균형은 항상 제공권과 제해권의 편중현상


이 존재하여 공산군에게는 바다와 공중으로 부터의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으며, 반면에 유엔군은 압도적인 해․공군 세력을 이용 언제든지 바다와 하늘로 부터 전투력의 투사가 가능한 능력의 보유와, 전장의 지리적 특성이 종심은 길고 정면은 협소하여 주요 도시나 전략목표, 또는 도로망이 해안에 인접하여 바다로부터의 중무장한 전투력에 의한 차단위협을 상존시켜 대책을 강요케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이 전쟁의 각 행위자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결과를 보았듯이 이 작전은 한국전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실로 다대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38도선 이남 지역에서의 전투에서 공세이전의 계기를 조성하여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킨 점과 북괴군의 전투력 와해로 인한 전쟁 주체로부터의 이탈, 유엔군의 전쟁목적 변경, 한국군의 전투사기 고양과 지형목표의 집착, 중공군의 개입시 추가적인 상륙작전 위협에 대한 대비책으로 각 공세시마다 북한지역의 동․서해안에 대상륙 방어부대를 분산 배비하지 않을 수 없게 하므로 서 정면전선으로의 병력의 집중현상을 막을 수 있었던 것 등 여러 면에서 영향을 미친 사실들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최근에 공개되기 시작한 공산군측의 자료는 인천상륙작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의 전반에 걸친 재조명에 많은 보탬이 되고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본고에서는 주로 전략적․작전적 관점에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의 영향을 다루었다. 그 이하의 세부적인 전술작전 분야와 각 작전간 한국군 및 유엔군의 의사결정과정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활동이 필요할 것으로 보며, 아울러 본 작전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조명과 객관적이고 진실에 가까운 전장상황의 연구활동을 여러 제위들로부터 기대하면서, 이러한 연구활동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Ⅰ. 序   論


    전쟁에서의 기습은 궁극적인 승리까지는 보장할 순 없겠지만 전장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주도권의 확보에는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기습의 규모에 따라서 파급효과는 전쟁전반에 미칠 수도, 또는 일부의 전역에만 미칠 수도 있다. 그 효과는 물리적 효과와 심리적 효과로 들 수 있으며, 양자가 병행하거나 경우에 따라서 한 쪽이 다른 쪽과 연계되어 영향을 미치게 되고, 어느 시점까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두 효과가 상호간에 영향을 주어 상승효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상승효과는 기습의 대상과 결과가 전쟁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군사목표에 지향되거나, 적의 군사행동의 방향을 전환시키거나, 수세의 위치에서 공세이전을 위한 기회조성에 결정적으로 작용되었을 때는 적군뿐만 아니라 아군의 전쟁지도에도 공히 영향을 미치게 되어 전쟁의 양상까지도 변화하게 만든다.


    인천상륙작전은 상륙전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천연적 장애요인을 극복하고 성공한 상륙작전의 가치와 기습의 의미를 일깨워준 대표적인 작전이다. 이는 과도하게 신장된 공산군의 병참선과 낙동강 방어선의 교착상태를 돌파하여 지상공격시 감수해야 할 인적․물적 자원의 손실 방지와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이고 상대적으로 종심에 비해 정면이 협소한 전장의 지형적 특성 등의 전략적 요소와, 태평양 전쟁시의 미해군 및 해병대의 상륙작전 경험과 능력을 맥아더 장군 자신의 전략적 안목으로 집약시켜 적의 최소 예상선과 최소 저항선에 투사시켜 결정적 승리를 달성한 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과 수도 서울 탈환작전이 한국전쟁에 미친 크나 큰 비중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들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공산군측의 자료 확보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사실상 추정에 의존하여 공산군측의 전쟁지도에 미친 영향을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공개되기 시작한 공산군측의 자료(중공은 1988년도에 그들의 항미원조전사를 공개하였다. 한국전략문제 연구소 譯, 중공군의 한국전쟁사: 항미원조전사 (서울: 세경사, 1991)는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한국전쟁기간중의 여러 작전들에 대한 새로운 연구에 기폭제가 되고 있다.

 

    작전의 성공은 한국전쟁의 판도를 변화시킬 정도로 공산군측뿐만 아니라 유엔군 측에도 공히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공산군 측면에서는 중공군 참전 시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으로부터의 후퇴과정에서 조직의 붕괴를 가져와서 결국 작전의 주체를 상실하고 중공군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유엔군 측면에서는 종래의 전쟁목적이 실지회복에서 북진통일로의 전환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에게는 수도 서울 탈환이 주는 정신적 효과로 국민의 사기 및 군의 전투의지 고양이라는 긍정적 영향뿐만 아니라 북진시 평양이라는 지형목표에 집착하게 하는 등의 부정적 영향도 발생하게 하였다.


    본 연구의 목적은 최근에 들어 공산군측 자료의 입수 등으로 새롭게 연구되기 시작하고 있는 인천상륙작전의 가치와 수도 서울 탈환이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을 재조명하므로 서 기존의 연구에 대한 발전과, 앞으로의 연구활동에 대해 보탬이 되고자 한다. 연구의 범위와 방향은 인천상륙이 실시하게 된 배경과 계획의 발전과정, 작전의 실시, 작전의 결과 및 교훈을 논의한 후 공산군측에서의 북한군과 중공군, 유엔군측에서의 한국군과 미군의 4가지 범주의 전쟁 행위자들의 전쟁지도와 작전의 실시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여 인천상륙작전과 수도탈환이 한국전쟁에 미친 전쟁사적 가치에 대한 중요성을 재 강조하고자 한다.


Ⅱ. 인천상륙작전의 배경 및 계획의 발전


1. 인천상륙작전의 배경


    한국전쟁 초기의 연합군의 전쟁목적은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격퇴하여 전쟁전의 상태로 원상 복구시킴으로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군 및 유엔군은 효과적으로 적을 저지하지 못하고 낙동강 선까지 후퇴하게 되었고 전선이 교착상태에 이르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작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맥아더(Douglas MacArther) 원수의 최초의 구상은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전쟁발발 후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한강변에 이르렀을 떄이다. (이선호 외,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서울: 도서출판 희승, 1995), p. 50.) 맥아더는 유엔군의 후퇴를 예견하고 서울을 연한 적의 병참선 중앙부를 타격하기 위해 인천에 대하여 상륙작전계획을 수립할 것을 그의 참모장 알몬드(Edward Almond)소장에게 지시하였다. 맥아더의 최초구상에 의해 극동군 사령부의 작전참모부장 라이트(Edwin K. Wright) 준장이 이끄는 합동전략계획단에서 수립한 계획은 불루하트(Blue Heart) 계획으로서 미 24사단을 투입하여 남하중인 북괴군을 오산-차령산맥을 연하는 선에서 저지하고, 미 제 1기병사단을 7월 22일경 인천지역에 상륙시켜 북괴군을 남과 북에서 협공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블루하트 계획은 미 24사단이 북괴군의 진출저지에 성공하지 못하므로 서 취소되고, 상륙부대로 고려되었던 미 제 1기병사단을 지상작전에 투입하였다. 당시의 전선상황은 북한군의 T-34 탱크에 대적할 적합한 수단의 부족과 병력수의 상대적 열세(3:1)로 금강-소백산맥을 연하는 방어선이 잇따라 붕괴되므로 서 유엔군은 낙동강을 연하는 선에서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에 대하여 확고한 신념을 가진 장군이었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전쟁에 있어서 후세에 길이 빛날 전술상의 신기원”은 상륙작전 뿐이다 라는 풀러(J.F.C. Fuller) 장군의 지적과 태평양 전쟁을 통하여 제해권과 제공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일본군 점령하의 도서들에 대하여 우회전술 (우회전술과 일본군의 와조전술의 차이는 우회전술은 강점은 건너뛰고 약점만 점령하는 것이며,  와조전술은 강점만을 점령하여 기타지역은 저절로 제압되도록 하는 전술이다. 노병천, 도해세계전사 ( 서울: 도서출판 연경문화사, 1996), p. 457, 473.) 에 의한 총 11회의 상륙작전을 성공시킴으로 서 상륙작전의 가치에 대하여 타인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깊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블루하트 계획의 취소는 맥아더에게 새로운 상륙작전 계획을 발전시키도록 하였다. 이 계획은 크로마이트(Chromite)계획으로 7월 중순에 샌디에고와 다코마를 출항하여 증원 중이던 미 해병대 제 1여단과 미 제 2사단을 9월중에 상륙시킨다는 것으로 다음과 같이 3가지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원복譯, 일본육전사 연구보급회,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서울: 명성출판사, 1986), pp. 20-21.) 크로마이트 100-B계획은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수원지역을 점령하며, 제 8군은 반격으로 전환하는 것이며, 100-C계획은 군산에 상륙, 대전을 향해 공격하여 북괴군의 우측 배후를 장악하는 것이며, 100-D계획은 동해안 주문진에 상륙하여 강릉․원주방향으로 공격, 북괴군의 후방을 차단하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3가지 계획중에서 맥아더는 인천에 상륙하는 100-B계획을 염두에 두고 알몬드 참모장과 라이트 작전부장에게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상륙작전에 대한 미 함참과 펜타곤의 시각은 대체로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는 맥아더가 7월 하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북괴군의 후방에 대한 상륙작전 실시 의도와 부대 및 물자 소요를 워싱턴에 보고하였을 때, 워싱턴에서는 그 요청에 대하여 7월 25일 미 해병대 제 1사단의 동원명령과 상륙작전용 자료, 공수전투단, 특별 공병여단 등을 재편성하여 극동으로 증파하였다. (Ibid., pp. 20-21.)


 그러나 인천에 대한 상륙은 회의적이었다.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에서는 육군참모총장 콜린스(L. J. Collins)와 해군참모총장 셔먼(F. P. Sherman)을 일본에 급파하여 8월 23일 개최된 최종회의에서 육군과 해군의 인천상륙에 대한 반대사유 (Ibid., pp. 40-58.)를 제시하였다.


    육군에서는 상륙군으로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된 부대를 전용하는 것은 낙동강 방어선 유지자체가 곤란하며, 인천이 주전장과 과도히 이격되어 각개격파 당할 위험이 있고, 일본에 주둔중인 제 7사단을 상륙작전에 투입시는 일본 방어에 공백이 발생한다고 주장하였으며, 해군에서는 인천항의 조수간만의 차가 6.9m~10m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심하며, 간조시 개펄이 3.2km까지 형성되고, 인천항의 입․출항 수로의 협소와 6knot의 빠른 유속, 월미도로 인한 기습효과의 상실, 5m이상의 인천항 석벽, 해안에 인접된 인천 시가지, 공격개시일인 9월 15일의 만조시간이 2시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 등을 들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유명한 그의 연설문 (구범모 譯, 맥아더 맥아더 회고록, (서울: 한림출판사), p. 416.)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그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첫째, 인천은 인천항의 조수나 수로학적인 측량결과, 지형 등 기타 난점이 많기 때문에 북괴군 지도부는 인천을 상륙장소로 선택할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에 1759년 퀘백(Quebec)전투에서 영국 울프(James Wolfe)장군의 승리처럼 기습달성이 가능하다. 둘째, 이러한 물리적 장애요인은 태평양 전쟁시의 경험으로 숙달된 미해군 및 해병대의 능력으로 극복이 가능하다. 셋째, 군산의 물리적 난관은 인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으나 적에 대한 불충분한 포위가 되어 적의 병참선과 보급시설에 대한 파괴가 불가하다. 넷째, 낙동강 방어선을 통한 지상반격은 유엔군 10만의 병력과 장비․물자의 손실을 가져오며 결정적인 전과를 거둘 수 없다. 다섯째, 적의 약점은 병참선에 있으며,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탈취한다면 적의 병참선을 차단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상륙개시일을 9월 15일로 선정한 이유 (이원복譯, 일본육전사 연구보급회,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서울: 명성출판사, 1986), p. 21.)에 대해서는, 상륙함정이 접안(beaching)시 충분한 수심(29ft)을 보유할 고조는 1950년 가을에 3차례(9/15, 10/11, 11/3)밖에 없었으며, 만약 상륙이 늦어질 경우 제 8군의 방어선이 피로와 혹서로 붕괴될 가능성이 많으며, 인천의 방어상태의 강화와 대량의 기뢰부설 시간을 부여하는 우를 범할 수 있고, 추수기인 10월 이전에 남한지역을 회복하지 못하면 북괴군에게 대량의 전쟁지속식량을 약탈당하게 되며, 한국의 기후를 고려시 동계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 인천상륙작전 계획의 발전


    맥아더는 상륙작전을 위한 부대편성을 8월 15일경에 실시하여 상륙군 사령부를 편성하고 그 예하에 미 해병대 제 1사단, 미 육군 제 7사단, 한국 해병대 제 1연대, 한국 육군 제 17연대를 편성하였으며, 8월 26일에는 제 10군단을 편성하고 군단장에 그의 참모장인 알몬드 장군을 임명했다. 최초에 상륙군으로 고려했던 미 해병대 제 1여단은 낙동간 방어선의 유지를 위해 제외시켰다. 이와 같이 편성된 상륙군 부대는 총 7만여명에 달하였으며, 수행할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인천상륙작전 (서울: 삼화, 1983), p. 77.)


        ‧ 인천항만의 확보와 해안두보 점령
        ‧ 가능한 한 신속히 진출하여 김포 비행장 확보
        ‧ 한강도하 및 서울탈환
        ‧ 미 8군과 연결작전이 이루어지기 까지 서울근교의 진지점령


표 1. 크로마이트 작전단계의 지휘체계 (Ibid., p. 106.)


                                             

    8월말 유엔군 사령부와 제 10군단은 경인지역에 대한 정보수집활동을 전개하여 북괴군의 병력은 서울지역에 5천명, 인천지역에 1천명의 해안경비부대, 김포지역에 500명 규모를 판단하였고, 9월 초순에는 인천지역에 1800~2500명의 병력이 증원된 것을 확인했으며, 추가로 상륙지역에 증원될 수 있는 북괴군의 예비병력은 제한된다고 판단했다. (이원복譯, 일본육전사 연구보급회,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서울: 명성출판사, 1986), pp. 67-68.)


    합동상륙기동부대에 부여된 일반적 임무 (Ibid., p. 75.)는 청천강 이남지역의 한국해안 봉쇄와 D일 인천지역에 상륙돌격을 실시 해안두보를 확보하고, 의명 후속제대 및 전략예비의 수송과 기타 부수적인 작전지원 등의 임무를 부여하고, 아울러 수상함정 및 항공기의 소련 및 중공 국경으로부터 12마일 이내에서의 행동금지등이 포함된 제한사항을 명시했다. 


    해병대의 상륙계획은 작전방향을 해안두보 확보 - 김포 비행장 탈환 - 한강도하 - 서울공격으로 정하고 미 해병대 제 1사단을 돌격제대로 제 5연대 3대대를 월미도에, 연대(-)를 월미도 북방 인천 시가지 정면 해안에, 제 1연대를 인천-서울간 도로망을 차단할 수 있도록 인천 남방 해안에, 한국 해병대 제 1연대를 대기파로 미 해병대 제 5연대(-)지역에, 후속제대로는 미 육군 제 7사단 및 한국 육군 제 17연대를 상륙시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아울러 작전성공을 보장하기 위한 기만대책으로서 보안대책과 언론을 이용한 기만활동, 양공작전 등을 계획하였다.  보안대책은 일본과 미국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각국의 스파이들에게 상륙작전을 위한 대규모 병력과 장비․물자의 집적 등을 은폐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과제였음으로 계획수립과 관련된 일부 인원들 이외에는 세부적인 계획을 통제하였으며, 상륙군 자체 내에서도 상륙지역이 군산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고는 작전개시 직전인 9월 14일에야 비로소 실제 상륙지역인 인천의 지형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Ibid., pp. 198-201.)  언론을 이용한 기만활동은 언론을 역 이용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군산이 상륙지역이 될 것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노출시키고, 해병대의 상륙훈련시 군산을 모형으로 훈련케하였으며, 언론에는 10월경에 대규모 반격작전이 전개될 것이며 그 대상지역은 인천이 될 것이라고 공표하므로서 북괴군 지도부로 하여금 인천은 양공을 위한 지역이고 실제 상륙지역은 군산이 될 것이라는 오판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양공작전은 기만을 위해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다. 맥아더는 서해안에서 최적의 상륙지역으로 고려될 수 있는 군산지역에 대하여 9월 5일부터 인천주변에 대한 폭격과 동일한 강도로 군산 주변 50km내의 도로, 교량, 철도시설에 대하여 폭격을 하고 9월 12일에는 영국의 코만도 부대를 군산해변에 상륙시켜 위력수색을 실시하며, 대량의 전단을 살포하여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군산 주민들에게 내륙으로 대피할 것을 권고하였다. 또한 동해안 지역에서는 삼척일대에 항공 및 함포포격을 가하고 상륙개시일에는 포항 북방 26km지점인 장사동에 한국군 1개 대대 규모로 상륙기습작전을 실시케 하는 등 북괴군의 전쟁지도부에게 정확한 상륙지역을 판단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천상륙작전 계획은 최고사령부의 전략․정치․심리적인 필요성에 의하여 결정되었지만 작전의 계획 및 실시제대에서는 많은 문제점이 도출되었다. (Ibid., pp. 78-82.) 첫째, 준비기간의 부족으로서 상륙개시일까지의 약 20여일 동안에 군단급 상륙작전을 준비한다는 것은 충분한 협조와 훈련, 세부적인 계획수립이 불가능하므로 그많큼 위험부담도 큰 것이었다. 둘째, 상륙군으로 최적인 해병대를 사용하는 것은 낙동강 방어를 위한 강력한 예비부대의 전용이므로 대체할 적합한 부대가 없었다. 셋째, 수송선의 집결과 개조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부족하였고, 넷째, 상술한 바와 같이 비밀유지의 어려움과 기만작전을 위한 대규모 양공부대의 부족과, 다섯째, 인천지역의 상륙에 대한 반대사유로 논의되었던 여러 가지의 지형적 조건을 극복하는 문제 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과 제약조건들은 미 해군과 해병대의 실전경험을 통해 축적된 계획수립능력으로 극복되어 9 월 3일에는 모든 계획에 대하여 협조 및 조정을 완료하게 되었다.


Ⅲ. 상륙작전의 실시


1. 북괴군 상황


    북괴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부산만 점령하면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다는 집념 하에 최종공세를 위해 새로운 부대들을 전선으로 투입시키고 있었다. 연합군의 상륙작전에 대해서는 북괴군이 제해권 및 제공권이 없는 상태였으므로 항상 주의를 하고 있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으나 상륙지역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연합군의 보안대책과 기만작전으로 혼돈을 거듭하고 있었다. 9월 초순경 경인지역에 배치된 북괴군은 (Ibid., p. 164.) 신편완료된 제 18사단과 9사단 87연대, 독립 제 849 대전차 연대가 있었고, 철원지역에 독립 제 25여단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9월 15일에는 제 9사단 87연대와 독립 제 849 대전차 대대는 금천으로 이동 중에 있었고, 제 18사단은 낙동강 전선이나 군산 지역으로 증원하기 위해 평택에서 남하 중에 있었으며, 인천지역에는 추가로 증가 배치된 북괴군은 없었다. 따라서 연합군의 기만작전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상륙작전 기간중에 즉각적으로 해안두보 내로 증원할 수 있는 예비병력은 보유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낙동강 전선에서의 북괴군은 부산을 조기 점령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작전한계점에 다다라 있었다. 이는 계속되는 전투와 과로, 지연작전간 한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실시된 공세행동, 병참선 신장, 그리고 유엔군의 계속적인 증원으로 피․아 전투력 비율은 점차 북괴군에게 불리하게 되어가고 있었다. (9월중순의 피․아 전투력 비율은 다음과 같다.

   육군대학, 한반도 전역에서의 공세이전에 관한 연구: 군사평론 제 322호 (1996), p. 107.)


2. 상륙작전 경과 (이원복譯, 일본육전사 연구보급회,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서울: 명성출판사, 1986), pp. 120-159.)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명령은 9월 9일 하달되었으며, 선견부대 작전은 9월 4일부터 10일까지 서울, 인천 중심 반경 50km이내의 도로, 교량, 터널, 철도 등 교통 요충지를 차단하여 상륙지역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항공폭격과 기만 및 양공작전을 실시하였고 월미도에 대한 제압사격은 13일부터 2일간 이루어졌다. 상륙돌격은 녹색해안인 월미도에 9월 15일 06:30분에 미 해병대 제 5연대 3대대가 한국 해병대 1개 중대를 배속받아 항공․함포사격의 엄호 하에 돌격을 감행하여 08:00시까지 소월미도를 포함하여 완전 점령하였다. 적색해안인 인천북방은 17:30분에 한국 해병대 제 3대대를 배속받은 미 해병대 제 5연대와 한국 해병대 제 1연대 2개 대대가 상륙하고 청색해안인 인천남방은 17:30분 미 해병대 제 1연대가 상륙하였다.


   해안두보는 16일 01:30분 인천중심 48km의 광범위한 해안두보를 확보하였으며 약 2,000명 정도의 적을 소탕하였고, 상륙군의 피해는 경미하였다. 후속부대인 미육군 제 7사단, 미 해병대 제 7연대, 한국 육군 제 17연대는 초기의 돌격제대가 해안두보를 확보 후 김포공항 및 영등포로 진격하는 동안 상륙하였으며, 상륙작전의 종료는 21일 18:00시 제 10군단 전투지휘소가 해안에 설치된 후 합동상륙기동부대의 해체와 함께 종료되었다.


3. 서울탈환작전 (Ibid., pp. 178-247)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탈환의 발판을 마련한 제 10군단은 김포공항을 점령후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4개의 주요 공격방향을 선정하였다. 미 해병대 제 5연대는 행주방향으로 공격하며, 미 해병대 제 1연대는 영등포와 여의도 방향으로, 미 제 7사단은 서빙고 방향으로 공격하여 서울 동측방을 포위할 태세를 갖춤과 동시에 안양, 수원방향의 남쪽으로도 공격하여 북괴군이 서울지역으로 증원되는 것을 방지하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퇴각하는 북괴군의 퇴로를 차단하며, 반격하는 미제 8군과 연결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행주방향으로 공격하는 미 해병대 제 5연대는 최초 19일 야간 은밀도하를 시도했으나 실패후 다음날 20일 날이 밝기와 동시에 급속도하를 감행하여 도하에 성공후 계속하여 은평구 대덕산일대까지 전진하였다. 북괴군은 미 해병대의 도하저지에 실패한 후 연희고지와 88고지 및 남․북․중앙의 3개의 105고지에 서울 서측방 방어선을 형성하여 완강히 저항하였는데 이 지역은 서울탈환의 중요한 발판이 되는 지역이다. 한국 해병대 제 1연대와 미 해병대 제 5연대는 21일 점령한 104고지를 발판으로  서울 서측방의 105고지를 22일 새벽에 공격하였으나 연희고지에서 적의 필사적인 저항에 부딪혀 고전을 면치못하다가 24일 함재기와 포병의 압도적인 화력지원을 받아 돌격을 감행 이날 오후에 연희고지를 점령하였으며, 이튼날까지는 일대의 고지군 전체를 장악하였다.  남쪽의 미 제 7사단 및 한국 제 17연대는 서빙고방향으로 도하하여 25일에 남산과 왕십리, 망우리 일대를 점령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북괴군 전쟁지도부는 서울의 남쪽에 대한 압박과 서측방 방어선의 붕괴, 그리고 동쪽의 퇴로마저 차단되자 주력의 포위를 우려하여 25일 야간을 기하여 실질적으로 서울을 포기하고 의정부 방향으로 주력을 급히 철수시키고 잔류부대로 하여금 시가전을 감행 유엔군의 공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도록 하였으나 26일 부터는 실질적인 적의 저항은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서측방 방어선을 돌파한 한․미 해병대는 계속하여 서울 시내로 공격하여 27일 한국 해병대에 의해 중앙청이 탈환되고 잔적이 소탕되므로 서 서울은 북괴군이 입성하지 3개월 만인 28일 수복되었다. 낙동강전선에서의 미 제 8군은 상륙작전 성공후 총 반격을 실시하여 신속한 추격을 통해 북괴군의 조직적인 철수를 와해시켰으며 상륙군과의 연결작전을 계획대로 오산부근에서 실시하므로 서 상륙작전을 통한 대포위 작전은 성공적으로 종료하게 되었다.


Ⅳ. 상륙작전의 결과 및 교훈


1. 상륙작전의 결과 및 의의


    인천상륙작전과 경인지구 작전을 통해 미 제 10군단이 입은 손실은 약 4000여명 정도였으며, 북괴군이 동 작전기간중 직접적으로 입은 피해는 약 2만 여명 정도였고, 동 작전과 관련하여 북괴군이 남한지역에서 입은 피해는 포로가 약 13만 5천명, 손실이 약 20만 명으로 동 작전이후 북한군의 전력은 실질적으로 격파되어 공격능력을 거의 소멸하였던 것이다. (Ibid., pp. 261-269.) 


    인천상륙작전의 전쟁사적 의의는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전쟁의 주도권 전환으로서 대 우회기동을 통한 기습으로 적의 병참선을 차단, 적에게 물리적․심리적 교란효과를 달성하여 적의 전투의지를 파쇄시킴으로 서 공세이전의 계기가 되었다. 둘째, 유엔군의 인적, 물적, 시간적 손실을 최소화 한 점을 들 수 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지상반격작전을 감행하였을 시 북괴군은 금강선, 천안-장호원선, 한강선, 38도선의 최소한 5개 지연진지상에서 축차적으로 조직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있게 되어 약 10만명 이상의 유엔군 손실과 수많은 민간인의 학살을 예상할 수 있었다. 셋째, 전략적 대 포위기동의 대표적 전례가 되었다는 것과 이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지휘관의 전략적 식견과 미 해군 및 해병대의 전문화된 상륙전 능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는 점이다.


표 2.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시 예상 피해(가정) (육군대학, 교참 2-1, 1996, p. 253.)


2. 상륙작전의 교훈


    인천상륙과 서울탈환 작전의 교훈은 여러 가지 형태로 분석이 가능하나 본고에서는 주로 전쟁지도와 작전전략 위주로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전쟁의 원칙을 적용한 군사적인 승리를 들 수 있다. 목표의 원칙면에서 맥아더는 적의 군대를 격멸하고 적의 전투의지를 파쇄하기 위한 전쟁에서의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군산을 선호하는 미합참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적의 포위와 병참선 차단이 가능하고 수도 서울을 조기에 탈환하여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킬 수 있는 인천을 상륙지역으로 선정하였다. 공세의 원칙면에서는 아군의 의지를 적에게 강요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작전행동을 위해 적의 약점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행동을 통하여 국지적 우세를 전체로 확대하여 전장의 주도권을 장악하므로 서 조기에 유엔군의 공세이전을 가능하게 했던 점이다. 집중의 원칙면에서는 결정적인 승리를 달성하기 위하여 결정적인 시간과 장소에 상대적으로 압도적인 전투력을 집중하므로 서 달성 가능하다. 맥아더는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위급성에도 불구하고 적의 측․후방에 전투력을 집중하기 위해 전략적․작전적 차원에서의 적절한 절약을 통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이는 피․아 대치된 지상전투에서 1개 사단이 부족한 것과 이를 적의 측․후방에 투사하는 것과는 효과의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기습의 원칙면에서는 당시의 낙동강 방어선 상태와 인천의 지리적 환경은 적에게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으로 작용케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적의 약점에 대해 예기치 못한 시간과 장소 및 방법으로 적을 강타하므로 서 적의 심리적․물리적 교란을 가져와 결국 적의 전투의지 파쇄효과를 달성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동의 원칙면에서 적의 병참선과 후방경계의 취약점을 이용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적보다 유리한 위치로 이동하여 기습과 집중으로 인천과 수도서울을 탈환, 결국 행동의 자유를 보장하여 주도권을 확보하므로 서 작전의 성공을 달성하였다.


    둘째, 우수한 인력과 부대의 양성이다. 클라우제비츠가 지적한 전장은 우연성과 개연성이 존재하므로 군사적인 천재가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안개와도 같은 전장상황을 정확히 판단․예측하여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지휘자의 능력과 불확실하고 극한적인 전장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훈련된 우수한 부대는 승리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평시의 고급인력에 대한 양성과 강인한 훈련 및 실전경험에 의한 수준 높은 전투력의 배양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셋째, 상륙작전 측면에서의 제해권과 제공권의 중요성을 들 수 있다. 북괴군의 제해권의 부족은 인천이 상륙지역으로 고려될 수밖에 없는 중요한 동기를 제공하였으며, 상륙작전 실시의 초기단계간 중요한 위협요인으로 작용될 수 있는 해안두보 내로의 적 기갑 및 기계화 부대의 증원에 대해 제공권의 보유는 이를 적절히 차단시킬 수 있게 되어 중무장한 후속부대의 상륙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 상륙작전계획 자체에 대한 재검토 필요성이다. 작전동기와 배경은 지휘관의 우수한 혜안이 돋보이는 특징을 갖고 있지만 계획자체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성공은 했지만 희박한 성공 가능성과 불충분한 준비는 전쟁전체의 판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일종의 도박에 가까운 모험인 것이다. 만약, 북괴군이 유엔군의 상륙지역을 정확히 판단했거나 또는 상륙작전이 부분적인 성공에만 거쳤을 경우는 한국전쟁의 전쟁사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다섯째, 상륙작전의 수단과 방법의 문제로서 파괴력이 크고, 정밀공격이 가능한 시대에 상륙부대와 함정의 집결은 좋은 표적이되어 해상제대(sea echelon)개념의 필요와, 헬기를 이용한 수직포위 개념의 필요성을 대두시켰으며, 암벽 및 부적합한 해안에 대한 접안 및 하역이 가능하도록 하는 수단의 모색, 그리고 장차 상륙작전 가능지역에 대한 전술정보 확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해군본부, 미해군한국전참전사, 1985, p. 488.)


Ⅳ. 상륙작전 및 서울탈환이 전쟁에 미친 영향 


    인천상륙작전 및 서울탈환작전은 그 이후의 공산군 및 유엔군의 작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과 중공군에 미친 영향과, 유엔군 측에서는 한국군과 미군에 미친 영향을 각각의 4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1. 한국군에 미친 영향


    한국군에게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반면에 부정적인 영향도 끼쳤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먼저, 한국군은 북괴군의 기습남침과 T-34전차에 의한 충격으로 초기작전에 대패한 후 계속적으로 지연전을 실시하면서 미군의 증원시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악전고투를 거듭하여 전투력의 손실과 전투피로등으로 조직적인 전투력 발휘가 불가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해병대 제 1연대와 육군 제 17연대가 상륙작전에 참가하여 한국 해병대에 의해 중앙청이 탈환됨으로서 반격작전간 고무적인 요소로 작용하였으며, 또한 상륙작전과 서울수복을 계기로 유엔군의 최초의 전쟁목적인 실지회복과 원상복구에서 북진통일로 변경되므로 서 한국군 및 국민들에게 조국통일에 대한 열망과 전투사기의 고양을 가져왔다. (Merrill L. Bartlett, Assault From the Sea,(Annapolis: Naval Institute Press, 1983), p. 353.)
 
    반면 부정적인 영향은 서울탈환이 북괴군 패퇴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인식이  평양이라는 지역목표에 집착하게 하여 북진시 동해안으로 공격하는 제 1군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들이 평양으로 경쟁적으로 진격하므로 서 상호 연계된 작전의 곤란을 가져와 북괴군의 잔여병력을 효과적으로 포위 격멸하는데 실패한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또 하나의 부정적인 영향으로 고려될 수 있는 것은 한국군의 독자적인 38도선 돌파와 관련된 점이다. 맥아더는 10월 2일에 38도선 돌파 일정만을 미정인 채로 북진을 위한 작전을 준비토록 하였다. 그러나 한국군은 10월 1일에 육군 제 1군단이 38도선을 통과하였고 2군단 예하의 6사단은 10월 6일에 춘천정면에서 38도선을 통과하였으며, 제 8사단은 10월 7일에 38도선을 돌파하여 철원을 점령하였다. (육군사관학교, 한국전쟁사, (서울: 일신사, 1987), p. 412.) 유엔군은 10월 9일에야 38도선을 돌파하였는데, 물론 유엔군의 이같은 북진결정은 전쟁목적의 변경을 둘러싼 워싱턴에서의 의사결정과정에 의해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고려되었지만 한국군의 독자적인 사전 북진은 미국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었슴을 간과할 수 없다. 아무튼 이러한 8군내의 각 부대간의 상이한 북진은 작전의 연계와 협조를 무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으로 북괴군이 지리멸렬하여 패주하게 되자 지금이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고, 유엔군의 북진에 대한 불분명한 태도가 이를 더욱 가속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한국군의 독자적인 38도선 돌파는 한국군의 역할을 스스로 격하시키는 격이 되었다. 이는 38도선 돌파시 중공과 소련의 반응을 탐지하고, 북괴군의 방어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전위부대 역할을 한국군 스스로 그 임무를 자청하여 실행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2. 미군에 미친 영향


    미군의 전쟁목적은 최초에 전쟁전의 상태로 복귀하는 실지회복이라고 상술했는데,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이 전쟁의 목적을 북진통일로 변화시킬 정도로 강하게 미군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기타 부수적인 작전에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첫째, 전쟁목적의 변경에 대해서는 상륙작전의 성공이 미국으로 하여금 추가적인 조치를 어떻게 취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딜레마에 직면하게끔 하였다. 미국의 한국전 개입은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봉쇄정책의 일환으로서 제한전의 형태였다. 미국의 주 관심사는 소련의 공격으로부터 유럽을 방호하는 것으로 너무 깊이 한국전에 말려 들어가는 것을 자제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전쟁목적을 달성한 후의 상황은 정치적 줄다리기였다. 소련이 다시 유엔안전보장 이사회에 복귀하였고, 중공은 유엔군이 만일 38선을 너머 북진한다면 개입하겠다는 의사표시를 주중 인도대사관을 통해서 전달해 왔으며, 미국 내에서도 북진에 대한 찬반의견으로 구분되었고, 인도를 비롯한 일부 중립국들은 유엔의 북진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맥아더와 미국의 공화당은 38선 이북의 공산군을 섬멸하도록 재촉하였다. 그러나, 트루만은 유엔군의 38선 돌파에 대한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최초의 미군개입 목적과 자신의 정치적 반대세력으로 부터의 압력의 중간에서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이 문제는 유엔안전보장 이사회 대신 유엔총회에 상정시켰으며, 유엔총회는 10월 7일부로 유엔군의 계속북진을 허용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김수남, 인천상륙작전이 미행정부의 의사결정에 미친 영향: 국방연구 제 32권 제 2호, p. 106.)


    유엔총회에서 북진이 통과된 배경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일거에 역전되어 유엔군의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었고, 북괴군을 완전 격멸하지 않으면 전쟁이 재발될 위험성이 있는데다가 현재의 38도선은 정치적으로 획정된 경계선일 뿐이며 전쟁기간중에도 유엔군의 해군과 공군이 계속해서 38도선 이북에 대하여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지상군 작전만 38도선 이남으로 국한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Ibid., pp. 104-105) 따라서 만약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지 못하고 유엔군의 피해가 극심했을 경우는 마땅히 전쟁을 38도선까지로 만 한정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2개의 추가적인 상륙작전계획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성공후 원산에 대한 상륙작전계획을 수립했는데 그 이유는 한반도의 지형적 여건이 태백산맥으로 인하여 동․서간의 협조된 작전이 곤란하여 적의 우회공격을 방지하고 효과적인 지휘통일을 위해서는 산맥의 양쪽을 모두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추가적인 이유는 보급지원의 문제를 들 수 있는데, 당시의 철도와 도로망의 파괴는 육상으로의 효과적인 보급지원을 제한시켰으며 아울러 인천항은 조수관계로 제 8군과 제 10군단을 지원할 충분한 양의 보급품을 양륙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동해안의 원산항을 이용하여 일본으로부터 직접적인 보급지원을 고려하였던 것이다.


    원산상륙작전은 중공군에게 유엔군의 상륙작전 위협에 대한 인식을 더욱 공고히 심어준 긍정적인 면은 있었으나 제 8군에서는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맥아더가 원산상륙작전을 계획할 무렵인 9월말은 아직 8군의 주력이 서울까지 도착하지 않은 상황으로서 북괴군에 대한 추격은 제 10군단이 현지에서 직접 추격하는 것이 보급지원이나 시간적으로 볼 때 유리하다고 판단했으며, 또한 만약 제 10군단이 또다시 상륙작전을 통해 인천항에서 승선한다면 약 2주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므로 그 기간 동안에는 제 8군이 효과적인 보급지원을 받을 수 없고, 현재의 한국군 제 1군단의 진격속도로 보아서 상륙군보다 오히려 원산에 먼저 진격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전쟁지도부는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누구도 쉽게 맥아더의 작전계획에 반대할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 하나의 상륙작전계획 (이원복 譯, 일본육전사 연구보급회, 한국전쟁 9권: 휴전과 작전 (서울: 명성출판사, 1991), pp. 277-281)은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결렬된 후 유엔군은 공산군을 회담장으로 다시 끌어들이기 위해 대규모의 하계공세를 실시했으나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자 미 8군내에서는 강력한 공세작전의 여론이 형성되었다. 당시의 8군 사령관이었던 벤프리트 장군은 교섭의 성공을 위한 승리를 달성하기 위하여 동해안 통천에 대한 상륙작전계획인 랑구라(Wranglar) 계획을 입안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리지웨이 장군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지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인한 상륙작전의 효과와 중요성을 인식한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상륙작전의 중요성에 대한 재 인식이다. 미국은 제 2차세계대전 기간중 태평양 전쟁에서의 수많은 상륙작전에 의한 전세의 역전과 유럽에서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통하여 독일군을 패배시키는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었지만 대전의 종료 후 핵무기의 위력에 도취되어 한국전쟁 발발 시까지도 상륙작전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있었다. 당시의 미국의 안보전략은 봉쇄전략이었으나 재래식 전투력에 의한 승리의 달성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어서 상륙작전에 대한 전력은 상당히 저하되어 있었다. (미 해병대는 1948년에 3만 5천에서 2만 3천으로 감축되었고, 1945년도에 610척의 상륙함이 취역중이었으나 4년후에는 91척만 남았으며, 1948년도에 해군은 510척의 상륙주정을 없애는 대신 단지 한 척만 새로 건조했다. 해병대 사령부, 상륙돌격작전: 상륙작전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해병대 사령부, 1993), p. 475. 대표적인 상륙작전의 무용론에 대한 주창자는 당시의 합참의장이었던 오마 브래들리 장군으로서, 그는 1949년 의회 청문회에서 미군이 원자탄을 적절히 사용하게 되면 대규모 상륙작전을 실시할 가능성은 앞으로 희박하다고 발언하였다. Ibid., p. 4.) 그러나, 맥아더가 유엔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자 상륙작전의 유용성에 대하여 재 인식하게 되었다.


2. 북괴군에 미친 영향


   북괴군에 미친 영향은 크게 다섯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의 성공은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의 공세를 실시 중이던 북괴군의 전투의지를 파쇄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상실하므로 서 조직적인 철수와 건제유지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둘째, 패주시 와해된 전투력으로 독자적인 작전능력을 상실하여 전쟁의 주체에서 이탈하였으며, 중공군 개입 후 중공군 작전의 지원형태의 작전위주로 실시하였다.


    셋째, 낙동강 전선에서 북괴군의 철수는 유엔군의 진격속도에 비해 효과적인 철수가 불가하여 남한 내에서의 제 2전선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이는 패주하던 북괴군들이 부대건제를 유지한 가운데 오대산, 태백산, 지리산 등지로 잠입하여 아군 병참선  차단과 습격 등의 후방교란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특히 중공군 개입후 활발하여 아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까지 지연되게 만들었다. 결국 워커중장은 이들의 교란활동에 대비하여 제 3군단까지 창설하여 후방작전을 실시케 하였다. 


    넷째,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한 중공군의 개입은 기존의 소련 군사고문단들에 의한 전쟁지원에서 전쟁수행주체가 중공으로 전환됨에 따라서 대 소련 의존에서 대 중공 의존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다섯째, 북괴군의 4대 군사노선에 영향을 주었다. 북괴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강계 부근인 별오리에서 1950년 12월 21일 작전실패를 분석하는 별오리 회의를 개최하게 되는데 여기서 김일성은 8가지의 전략적 반성을 하게 되었다. 이중 한가지가 제해권과 제공권의 중요성이었다. 이는 인천상륙작전이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고는 볼 수 없으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하여 그 인식의 강도를 더욱 강하게 하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괴군은 전쟁 후 그들의 공군력과 해군력 강화에 전력투구하게 된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3. 중공군에 미친 영향


    중공군은 상륙작전 이후에 개입하였으나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이 그들에게 미친 영향은 중공의 公刊史인 항미원조전사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첫째,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결정에 끼친 영향이다. 중공은 인천상륙작전 성공후 유엔군이 북진여부를 결정 중에 있을 때 만약 유엔군이 38도선을 돌파 시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는데 그 배경에는 그들의 안보문제에 추가하여 국내문제와 소련과의 관련성이 있었다. 당시 소련의 의도는 미국에 비해 전력의 부족과 3차세계대전을 수행할 경제력 부족 등으로 가급적 미국과의 전쟁을 회피하고 전쟁을 38도선 일대에서 종결하고자 하였다. 반면, 중공의 상황은 건국 1년된 신생정권으로서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였으며, 장기간 내전으로 경제가 피폐되었고, 국부군 출신의 병력이 전체병력중 절반이 되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에 참전하므로 서 군대에 대한 감축과 불만세력에 대한 제거, 그리고 국내문제 해결을 위한 예산을 소련으로부터 참전의 대가로 지원 받아서 경제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김석관,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 재조명: 군사평론 제 310호 (육군대학, 1994), p. 56.) 또한 중공은 참전으로 인한 국제적 지위상승도 고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아시아에서 미국과 전쟁을 하므로 서 동남아에서의 소련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동북아에서의 정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여 중공의 국제적인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판단으로 볼 수 있다. (Ibid., pp. 57-58.)


    물론, 김일성이 전쟁을 도발하기 전 북경을 방문시 만약 미군이 참전하면 병력을 보내서 지원하겠다고 한 약속은 있었지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그 영향으로 미국이 전쟁목적을 변경시키지 않았을 경우는 중공의 참전여부가 불투명해졌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중공군의 참전간 유엔군의 추가적인 상륙작전에 대비하여 대상륙방어 대책을 강요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기간중 모택동이 맥아더의 과거 경력과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을 고려 유엔군이 인천-서울지역이나, 진남포-평양지역으로 상륙작전을 실시할 가능성에 대하여 미리 예견하였다는 자료들이 최근 밝혀지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시 러시아에서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중공군의 한국전에 대한 참전배경과 낙동강 전선에서 북괴군이 고전하고 있던 9월 초순에 북경에 온 북한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북괴군을 고착․견제한 후 인천이나 진남포지역으로 상륙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예상 상륙가능지역에 대한 경계를 강화할 것을 권고하였다. 조선일보, 1994. 7. 26. 또한 중국의 작가 엽우몽이 한국전쟁에 관한 비사를 소설화한 것을 오정윤이 옮긴 “서울로 간 모택동”의 제 1권에서 인천지역으로 상륙작전을 실시할 가능성을 예측하고 김일성에게 사전 경고해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이는 비록 소설이지만 그 주류는 중국의 公刊史를 기반으로 하여 작성된 것이므로 어느 정도의 신빙성은 있다고 볼 수 있다. 오정윤 譯, 엽우몽, 서울로 간 모택동 (서울: 독서당, 1993), pp. 11-25.) 따라서 모택동이 예견한 바와 같이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일거에 역전되자 중공군의 참전 이후에도 유엔군의 추가적인 상륙작전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중공군은 10월 19일 공식적으로 입북한 이후 유엔군이 박천-운산-온정리-희천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을 때, 방어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유동적인 상태로 1차 공세를 시작하였다. 이때 중공군은 제 13병단 예하 제 50군 150사단을 신의주에서 안주방향으로 진출시켜 유엔군의 상륙작전으로부터 신의주를 방어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중공군의 제 3차 공세는 유엔군이 임진강 하구-연천-춘천북방-양양을 연하는 선을 형성하였던 1950년 12월 31일에 개시된 일명 정월 공세였다. 이때에도중공군은 유엔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부대를 배치시켰는데, 북괴군 제 1군단의 일부를 해주지역에, 북괴군 해군 4개여단을 동해안 방어에, 북괴군 제 3군단은 원산지역에, 그리고 북괴군 제 4군단은 서해안 방어임무를 부여하였으며, 중공군 제 9병단은 동부전선에서 교대후 함흥으로 이동하여 재편성하도록 하였다.


    그후 1.4 후퇴 간에는 비록 유엔군이 공산군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었다고는 하나 주력부대는 전투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과, 후퇴간 강력한 저항과 심한 피해 없이 신속하게 후퇴한 것을 유엔군이 재차 상륙작전을 실시하기 위해 공산군의 주력을 유인하는 것이라고 오판하여 주력부대는 한강선에서 추격을 멈추고 제 50군만 추격토록 하였으며, 북괴군 제 1군단 1개 사단을 서울에 잔류시키고 나머지 주력은 김포 비행장과 인천 항구를 점령케하였다. 이후 중공군은 4차공세로 동부지역에서의 부분적인 돌파에는 성공하였으나 곧이은 아군의 1차공세와 51년 3월말부터 4월초까지의 작전으로 전선은 점차 38도선 이북지역으로 북상하였다. 이시기에 나타난 중공군의 대상륙 방어부대 배치는 동해안에 9병단 예하의 2개군을 배치하여 해안방어를 강화하었다.


    1951년 4월말에 실시한 5차 공세 (본 내용은 팽덕회가 중앙군사위원회와 모택동 주석에게 보낸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보고서의 요지는 중공군 5차공세는 전선작전과 대상륙방어 작전을 피하기 위해서 예정보다 앞당겨 개시하였으나 제반준비의 부족과 강력한 유엔군의 방어로 큰 전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유엔군의 상륙기도를 완전히 타파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이때의 대상륙방어를 위한 부대배치로는 제 42군을 원산과 양덕에, 제 38군을 숙천에, 제 47군을 평양에, 북괴군 제 2군단을 회양과 화천에, 그리고 북괴군 제 6군단을 사리원과 재령에 배치하였으며 회천에서 양덕간의 도로를 보수하여 유엔군이 상륙후 서부전선의 수송로를 차단할 경우를 대비하였다.)는 유엔군의 상륙기도를 조기에 분쇄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획득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중공군은 유엔군의 진출상황을 분석후 유엔군이 그들의 측․후방에 상륙을 실시하고 정면공격과 배합하여 원산에서 평양을 연하는 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할 계획인 것으로 판단하고, 총 5개 군단을 대상륙 방어 부대로 운용하였다.


    휴전회담간에는 지구전과 적극방어전략을 수립한 후 정면의 전선과 측․후방의 해안선에 대하여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는 작업을 실시했으며, 부대배치를 보급사정과 유엔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하여 총 18개군 중 9개군은 전방에, 나머지 9개군은 후방에 배치하여 윤번제로 작전하도록 계획했다. 또한 동․서해안에 효과적인 대상륙방어작전 지휘를 위해서 북괴군과 중공군간에 연합지휘소를 설치하였으며, 동․서해안을 직접 지원할 수 있는 군수지원부대를 편성 운용하였다. 1953년도는 대상륙방어준비를 가장 활발히 한 기간이었는데 이 시기에 유엔군들의 작전계획은 청천강과 한강사이의 서해안에 상륙하여 개성을 포위할 것으로 판단하고 추가적인 병력의 증강과 지휘통일, 보급지원체제 등을 개선하는 등 대상륙방어 준비를 강화하였다.


Ⅴ. 結   論


    인천상륙작전은 작전 자체의 성과보다는 이후의 피․아 작전에 미친 영향에서 더욱더 전쟁사적인 의의를 갖는 작전이었다. 과거 세계의 수많은 상륙전사를 보더라도 인천상륙작전 만큼 전쟁의 행위자와 전쟁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친 작전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이유들은 기습효과 달성을 통한 적의 전투의지에 대한 파쇄와 상대국 전쟁지도부의 성향, 그리고 언제든지 상륙작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해․공군 세력의 불균형, 전장의 지리적 특성이 상호 결합되어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습의 효과는 여러 전사에서 입증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2차 세계대전시 독일군의 판져사단에 의한 경이적인 돌파작전에 의한 프랑스군의 붕괴, 제3차 중동전쟁시 이스라엘 군에 의한 시나이반도의 점령, 한국 전쟁시 T-34 전차를 앞세운 북괴군의 기습공격으로 조직적 저항 없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상황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기습이 심리적인 마비현상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심리적인 충격은 전투력 상승의 기하하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전투전의 병력손실 비율이 1:1에서 기습을 달성하고 난 이후에는 1:5의 비율로 공자에게 유리한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에서 이와 같은 심리적인 충격달성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인천이 서울과 근거리에 위치하여 서울을 통한 북괴군의 병참선과 퇴로를 차단할 수 있으며, 인천의 지리적 난관으로 북괴군이 예상하지 못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즉, 손자에 의한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사상을 기반으로 체계화한 리델하트의 간접접근전략 (강창구 譯, 리델하트, 전략론 (서울: 병학사, 1988), p. 445.)의 지향점이 되는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으로의 전투력 집중이었기 떄문에 북괴군에게 심리적․물리적 교란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전투의지 파쇄 효과는 상술한 심리적․물리적 교란을 통해서 달성된다. 물리적 교란은 아군의 기동에 의해서 적의 배비와 조직을 교란시키고, 보급을 위기에 빠뜨리며, 적의 퇴로를 위협하므로 서 적의 전투력 발휘에 혼란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며, 심리적 교란은 물리적 교란 효과를 적 지휘관에게 인상시켜 준 결과인데 아군의 행동에 대하여 대응할 의지를 상실함으로서 주도권을 박탈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심리적 교란은 물리적 교란을 당한 직후에 통상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 후 낙동강 전선에서의 적의 패주와 패주시 나타났던 조직의 와해는 기습적으로 실시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1차적인 심리적 충격의 효과와 수도탈환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 그리고 병참선과 퇴로를 차단 당함으로서 배가된 2차적인 심리적 충격이 기하학적으로 상승되었기 때문이며, 이후 중공군의 개입 시에도 나타났던 대상륙방어에 대한 강도는 또다시 유엔군으로 부터 기습적인 상륙작전을 당할 시 겪게될 전투의지 파쇄에 대한 우려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미군과 한국군에게도 전쟁목적의 변경과 긍정적․부정적 영향이 나타난 것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이 주는 심리적인 고무와 작전적인 잇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지휘관의 성향은 상대편으로 하여금 방책을 수립하는데 작용하는 한 요소가 된다. 맥아더가 태평양 전쟁시 상륙작전을 통하여 전세를 역전시키고, 개인적으로 풍부한 상륙작전 경험과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은 적 지휘관으로 하여금 상대편 지휘관의 성향에 대한 대비를 위해 대상륙 방어작전에 많은 노력과 자원을 투자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모택동이 맥아더의 성향을 분석하여 인천이나 진남포 지역에 상륙작전을 감행할 것을 예견하여 북괴군에게 권고하는 내용을 참작하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유엔군과 공산군의 해․공군 세력의 불균형은 항상 제공권과 제해권의 편중현상이 존재하여 공산군에게는 바다와 공중으로 부터의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으며, 반면에 유엔군은 압도적인 해․공군 세력을 이용 언제든지 바다와 하늘로 부터 전투력의 투사가 가능한 능력의 보유와, 전장의 지리적 특성이 종심은 길고 정면은 협소하여 주요 도시나 전략목표, 또는 도로망이 해안에 인접하여 바다로부터의 중무장한 전투력에 의한 차단위협을 상존시켜 대책을 강요케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이 전쟁의 각 행위자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결과를 보았듯이 이 작전은 한국전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실로 다대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38도선 이남 지역에서의 전투에서 공세이전의 계기를 조성하여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킨 점과 북괴군의 전투력 와해로 인한 전쟁 주체로부터의 이탈, 유엔군의 전쟁목적 변경, 한국군의 전투사기 고양과 지형목표의 집착, 중공군의 개입시 추가적인 상륙작전 위협에 대한 대비책으로 각 공세시마다 북한지역의 동․서해안에 대상륙 방어부대를 분산 배비하지 않을 수 없게 하므로 서 정면전선으로의 병력의 집중현상을 막을 수 있었던 것 등 여러 면에서 영향을 미친 사실들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최근에 공개되기 시작한 공산군측의 자료는 인천상륙작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의 전반에 걸친 재조명에 많은 보탬이 되고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본고에서는 주로 전략적․작전적 관점에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의 영향을 다루었다. 그 이하의 세부적인 전술작전 분야와 각 작전간 한국군 및 유엔군의 의사결정과정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활동이 필요할 것으로 보며, 아울러 본 작전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조명과 객관적이고 진실에 가까운 전장상황의 연구활동을 여러 제위들로부터 기대하면서, 이러한 연구활동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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