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글/해간35기 구문굉

나의 해병대 인연

머린코341(mc341) 2015. 11. 11. 20:35

나의 해병대 인연


6.25사변이 나기 한해 전 그러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1949년 내가 국민학교 3학년이었을 때의 얘기다.


우리는 부산의 용두산공원 부근에 사는 친구가 있어 여러명이 곧잘 어울려 용두산 정상 부근의 벗꽃나무를  타고 올라가 놀곤했었다.


그러나 막상 코앞의 정상에는 어떤 군부대가 철조망을 쳐놓고 주둔을 했기 때문에 그 안으로 들어 가 볼 수가 없었고 크게 써붙인 표말에는 전에는 출입을 엄금한다고 썼더니 이번에는 총살을 한다고 써놓아 너무 무서운 마음이 들어 다음부터는 그 부근에서 노는것초차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당시는 부산에 인구가 그렇게 많지 않을 때라 용두산 위로 올라 오는 사람조차 별로 없었고  정상에 주둔하던 부대가 육군인지 해병대인지도 모를때였다.(당시 마악 해병대가 창설 된 후 일부 파견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때였다)


우리는 어렸지만  육군의 5연대와 26연대만은 아는편이었다. 내가 어릴때 살기를 부산 공설운동장이 있는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군부대의 사열이나 훈련을 가끔 볼 기회가 있었고 동네 꼬마들은  5연대는 훈련이 잘 되어 개들까지 "차렷"하는 구령에 고개를 돌리는 개가 없다고들 떠들었다.

곧 5연대는 어디론가 떠나게 되었고 대신 26연대가 부산에 왔다.  우리 꼬마들은 5연대가 그리운 나머지 매우 실망을 했고 떠나간 5연대를 늘상 그리워했다.


그리고 군인들의 사격장도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었다.


사격장은 동네 꼬마들이 봄에 칡을 케러 곧잘 가는 지금의 경남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우리보다 큰 형들이 탄피를 주어 가지고 있는 것이 어떻게나 부러웠던지 딱지나 구슬 같은 것은 비교 할 바가 못되었다.


6.25 사변이 터지자 공설 운동장과 모든 학교는 한국군이나 미군들의 부대로 바뀌었다.


바로 우리 동네와 가까운 동신국민학교에는 육군헌병학교가 들어섰다.


"굳세거라 용사들아 .." 하고는 아침 저녁으로 구보하는 행열이 우리집 앞으로 지나갔다.


이때만해도 내가 커서 비록 육군은 아니지만 해병대 장교가 되어 육군헌병학교의 피교육자가 되리라고는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는 부산의 해병대 헌병대가 일본 사람들이 지었던 중앙동의 튼튼하고 붉은 벽돌집에 있었다.


그때는 우리집이 이사를 가 부산 본역(1952년경 대화재로 소실과 함께 이전. 러시아인들이 지은 역사적 건물)과 가까운 곳에 살았기 때문에 곧잘 그 앞을 지나면서 매일이다싶이 그 안을 들려다 보고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나다녔다.


한번은 바로 정문 앞에서 사병 한명이 누구에게 맞았다고 헌병대의 하사관에게 부동 자세를 취해 보고를하자 보고를 받은 하사관은 눈을 마치 독기 품은 뱀처럼 뜨고는 "누구에게 맞았어!"라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 더 구경조차 민망스러운 나머지 슬그머니 지나치고 말았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열차의 옆자리에 해병대 군악대의 아저씨를 만나 서울에서 부산까지 서로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어가며 동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어떤 분인지는 몰라도 당시 해병대 준위 계급장을 단 매우 단단하게 생겼던 분에게는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고있는 얘기가 있다.

4.19 당시의 학생들은 매우 거칠었다. 특히 야간열차를 이용해 서울에서 시골로 가는 대학생들은 흔히 술에 만취 된채 열차 속에서 고성방가를 하며 안하무인격이 되는 수가  많았던 시절이었다.


4.19가 있었던 해. 겨울방학이 되자 내가 탄 야간 열차안에는 매우 어지러운 분위기가 결국은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는 사건이 있었다.


내용은 대구 대학생들이 내 친구인 부산 대학생을 칼로 찔렀던 것이다.  


후배 한명이 다른 칸에 있는 나를 급히 찾아와 자초지종을 얘기해 나와 후배 몇명이 칼로 찔렀던 패거리 쪽으로 갔는데 잘못을 저질렀던 녀석들의 태도들이 마냥 건방지다고 여겼던 후배들이 순간적으로 소주병을 쥐고 상대의 머리로 날렸던 것이었다.


그만 큰 패싸움이 되었던 것은 물론, 열차 속 일부가 피로 낭자하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나중에는 열차까지 잠시 멈추게 되고 말았는데 바로 그 뒷좌석에 앉았다 결사적으로 야단을 치며 말리던 해병대 준위 아저씨는 보람도 없이 자신의 옷에 남의 피만 잔뜩 묻히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2차대전의 실화를 다룬 "유황도의 모래"며 "이오지마의 영웅"등 전쟁 영화 중에서도 특히 미 해병대가 나오는 영화를 많이 보았다.  


존 웨인이 전투 중에도 잠시 담배를 피워 물고  여유있는 대화를 하는 모습은 내가 나도 모르게 월남전에서 잠시 고립이 되었을 때 담배를 피워 물고 생각을 하게하는 여유를 가지게 했다.


그리고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는 우연히 해병대를 갓 제대를 했다는 내 또래의 젊은 사람과 같은 열차의 좌석에서 마주보고 잠시 목적지로 향하게 되었던 적이 있었다.


농사를 짓고 있다는 그는 매우 점잖으면서도 무게가 있는 말로 장교 중에는 해병대 장교가 제일 실력이 있다는 말을 해 나도 모르게 그 말 한마디가 가슴에 와 꽂혔던 것이다.


물론 당시 이미 해병대 장교가 되어 있던 이동철형도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께서 터프한 해병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차마 해병대로 간다는 말은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더구나 대학 졸업자로 징집 연기를 받았던 사람들은 보충력으로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당국의 방침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군대를 가야할 필요도 없었던 입장이었다.(실은 당시 논산의 신병훈련소로는 많은 징집자들을 소화 시킬 수 없어 징집 연기를 했던 사람들에게 특전을 주려고 했던 당국의 방침이 있었다)

 

그러나 운명이라고 해야할지? 인연이라고 해야할지?


40년 41년생 중 대학 졸업 때까지 징집 연기를 했던 사람들은 보충력으로 모두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된다고 선전을 거듭했던 정부 당국이  1965년경 창원에 신병훈련소를 하나 더 만들어 놓고는 방침을 바꾸어 1966년부터 이미 사회생활을 하고 있던 해당자들에게 영장을 발부하기 시작했고 나는 이 틈을 타 시험 날짜도 얼주 맞고 사병으로는 가기가 힘든 나이라고 어머니께 우기고는 결국 지각생으로나마 해병대의 장교가 되었던 것이다.

나의 해병대와의 인연은 이렇게해서 생기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그 옛날 옛적부터 이미 정해진 운명은 아니었던가 싶은 생각이 잠시 잠시 날 때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