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글/해간35기 구문굉

내가 만난 미 해병대 전우들(5) 끝

머린코341(mc341) 2015. 11. 10. 18:46

내가 만난 미 해병대 전우들(5) 끝

 
6. 미 해병대 앵그리코 맨들과의 정담


1968년 6월과 7월, 5대대는 용궁 작전과 말굽 작전에서 크게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27중대는 6월 용궁 작전이 끝나자 바로 적이 주둔했던 큰 고목나무 아래를 포함 해 새로운 중대 기지를 만들어 이동을 했고 전에 쓰던 5대대 본부와 청룡부대 본부와 가까운 5고지의 방석(기지)은 25중대에게 인계를 했다.


27중대의 새 방석은 그 넓이와 근무 중대 앞으로 빠지는 도로하며 또 고목나무 아래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포함하면 2개 중대의 병력이 충분히 주둔할 수가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 면적이 넓어 방어를 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도 같았으나 사실은 다낭을 겨냥하는 적의 로켓을 사정거리 밖으로 쫓아내기 밀어 위해 엄청난 주위의 면적을 불도저로 밀어 내 사계 청소를 했고 또 미 해병대 공병들이 철조망을 쳐 놓았기 때문에 방어를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또 미 해병대에서는 미리 제작한 약 10미터가 넘는 관망대를 헬리콥터로 운반 해 주었고 또 중대장과 부중대장인 내가 쓸 통나무집을 다소 안전한 장소에 두 채나 지어 주었다.


내 통나무집은 나 혼자 쓰기에는 넓은 편이라 중대원에게 줄 C-레이션을 항상 보관하고 있었고 또 외부에서 방문하는 손님이 있을 경우에는 야전의 이동 침대를 펴 잠을 자도록 했다.


이때 함께 있었던 두 명의 앵그리코 맨은 모두가 약 4개월 전 그러니까 구정공세 직 후부터 계속 함께 있는 앵그리코 맨들이었다.

 
두터운 안경을 끼고 틈만 나면 소설을 읽는 대원과 용궁 작전에서 손을 다쳐 병원에 실려 갔다 다시 돌아 온 Pete Plummer가 바로 그들이었다.


나는 마른 생선포를 좋아했다. 집에서는 내 편지를 받고 대구포와 새우 양념포를 부쳐 주었다. 나는 평소에도 저녁이 되면 맥주와 C-레이션의 과일을 끄집어내 Pete를 곧잘 불러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수가 잦았다.


집에서 부친 대구포가 왔을 때는 너무 짜서 그러지 않았지만 새우포가 왔을 때는 두 사람을 불러 함께 즐기기도 했다.

 
한 날은 안경 낀 대원이 자기 집에서 어머니가 부쳤다고 조그만 나무 상자를 하나 들고 들어 왔다.


뚜껑을 여니 얇은 종이로 덮여 있는 것이 한 눈에 보아도 매우 고급의 음식 같이 보였다. 알고보니 꽤 넓적하고 긴 저키를 열을 지어 담아 놓은 것이었다.


그때 나는 저키라는 말은 들어 보아도 먹어보기는 처음이었다. 흔히 지금 우리가 사서 먹는 저키 보다는 짜지 않고 오히려 싱거운 맛이었는데도 후추로 양념을 해서 그런지 나중의 맛은 약간은 매운 맛이 감돌았다.


나는 한 두 개만 먹고 만다는 것이 자꾸 손이 가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2008년부터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Pete의 사진으로 그를 찾기 시작했다.


뒤 늦게 찾기 시작한 것은 마침 월남전과 한국 vietvet.co.kr이라는 월남전 참전 육군들이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불꽃처럼”(나의 해병대 일기)의 내 논픽션 스토리를 연재하게 되었을 때 그곳에 영문으로 된 사이트가 있고 주로 월남전에 참전을 해 우리 청룡부대에서 활약했던 앵그리코 대원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 27중대에 있었던 앵그리코 맨 Pete의 이름은 알았어도 성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사진과 미국의 매인 주 출신이라는 것으로만 찾기 시작했는데 어느날 어떤 앵그리코 맨 출신이 아마 자기가 알고 있는 전우가 맞을 것이라고 얘기를 하면서 Pete는 미 CIA의 에이전트였고 휴가를 가도 군용기가 아니라 아메리칸 에어라인으로 다녔고 결국은 알아보니 약 2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너무 실망이 컸다. 마치 동생처럼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나름대로 마음 속에 담고 있었는데....

 
2010년 1월에 한 통의 이메일이 당시 자신의 사진과 함께 나에게 왔다.


도대체 누구신데 내 사진이 여러 군데 돌아다니고 나를 찾느냐는 것이었다.


벌써 세월이 40년이 더 흘러서일까?


나는 다시 그가 나에게 준 그의 독사진과 해변에서 27증대 장교들과 같이 찍은 두 장의 사진과 또 말굽 작전에서 전과를 거두고 나와 단 둘이서 찍은 사진을 이메일로 부쳐주며 옛 얘기를 써 주었다.


그는 이메일의 내용 중 자기는 2대대 25.26.27 중대에서 돌아가며 근무를 했다는 말에 나는 역시 옛 추억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25.26.27 중대들은 2대대가 아니라 모두 5대대였다는 사실도 상기시켜 주면서 내가 살아 온 얘기들을 써 보냈더니 그도 28년 간 매인 주에 있는 제지 공장의 관리 엔지니어로 재직을 했고 지금은 퇴직 전 잠시 교도소의 관리 엔지니어로 근무를 하고 있는데 곧 정년퇴직을 할 것이라는 내용과 벌써 손자가 10명이나 된다는 말까지 써 보냈다.

 
내가 나이가 너무 들어서 그럴까? 노인이 되면 과거에 집착한다는 말처럼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아마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기억력이 더 뛰어나서 그런 것일 테지...


나는 죽을 때까지 그런 자부심으로만 앞으로도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 끝 ***


3.3.2010 운몽 /구문굉


출처 : 서울대동문카페, 구문굉 선배님  http://cafe.daum.net/snua10/6ITb/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