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명인·기인

6.25戰爭期 - 924고지에서 8명의 적을 생포한 장용회 해병

머린코341(mc341) 2016. 7. 31. 09:49

6.25戰爭期 - 924고지에서 8명의 적을 생포한 장용회 해병

 
924고지 탈환작전 때 1명의 군관이 포함된 8명의 적군을 생포한 혁혁한 전공으로 미국 동성훈장과 을지훈장을 탄 3대대 11중대 화기소대 경기관총 사수 장용회(張龍會) 해병(당시 계급 1등수병), 그는 장단지구 전투에서도 2개의 충무훈장을 탄 한국전쟁의 살아 있는 영웅이다.

 
그런데 장용회씨(병3기)가 924고지 탈환작전 때 8명의 적군을 생포한 전투상보는 필자가 알고 있는 바로는 해병대의 전사에는 수록이 되어 있지 않고 당사자의 상훈기록과 증언 및 당시의 11중대 화기소대장 김진탁씨의 증언을 통해 발굴한 것이므로 필자로서는 이 값진 사료(史料)를 조명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장용회씨가 수공(樹功)을 한 날짜는 공격 이틀째인 9월 1일이었다. 이 날 미명을 기해 10중대와 11중대는 인접부대(미 해병7연대) 지역을 통과하여 목표고지(924) 전방 약 1키로 지점까지 진출한 다음 11중대는 오른쪽, 10중대는 왼쪽으로 전개하여 공격을 개시했으나 측방으로부터 가해진 적군의 강력한 저지사격과 지뢰로 인해 사상자가 속출하는 바람에 공격이 부진했고, 특히 좌일선의 10중대는 피해가 막심하여 명령에 따라 철수를 하게 되고 1중대가 그 방향에 투입되는 한편 3중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리하여 11중대와 1중대는 우군부대(미 해병사단)의 항공 및 야포의 지원 하에 공격을 개시한 끝에 목표고지 전방 약 100미터 지점까지 접근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1026고지로부터 갈겨대는 적 기관총 때문에 사상자가 속출하여 특히 11중대는 중대장(육동욱 중위)이 중상을 당해 후송이 되고 선임장교 강길영 소위는 전사를 하는 바람에 대대장(김윤근 소령)의 명령으로 1소대장 임경섭 소위가 중대장을 대리하여 작전을 지휘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11중대 보다는 공격력이 약화되지 않았던 1중대(장, 한정용 중위)는 일몰 직후에 공격을 재개하여 처절한 백병전 끝에 20시 30분경 기어코 목표고지를 점령하기에 이르렀으나 강력한 적 역습부대의 역습공격으로 어쩔 수 없이 약 50미터 후방으로 밀려난 지점에서 명령에 따라 3중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철수하고 말았는데, 바로 그러한 상황 속에 비록 공격력은 약화되어 있었지만 명령에 따라 8부능선까지 진출해 있던 우일선의 11중대 방어진지에서 다음과 같은 기상천외(奇想天外)의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즉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화기진지에 경기관총을 거치해 놓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복초(伏哨) 근무를 서고 있던 경기사수 장용회 해병은 새벽 1시경 칠흑같은 어둠과 짙은 안개 속에 불과 3미터 앞의 풀섶에서 어른거리는 수상한 물체를 의식하고 가까이에 있는 동기생 복초 근무자( )에게로 다가가 은밀히 물어보았더니 자기도 바짝 정신을 차리고 살피고 있는 중이라기에 조심 조심 물체가 어른거린 풀섶 쪽으로 접근하여 유심히 살펴본 결과 바로 그 곳에 지하 벙커의 출입구가 있는 것을 확인하곤 한참 동안 숨을 죽인 채 안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더니 잠시 후 그 굴속에서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기에 즉시 은밀하게 진내에 비상을 건 다음 대담하게도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한쪽 손에 움켜쥐고 복초 근무 중인 동기생을 뒤따르게 하는 가운데 허리를 굽힌 자세로 지하 벙커의 벽과 천정을 한쪽 손으로 더듬으며 약 3미터 가량 안으로 들어갔더니 그 지점에서 굴이 ㄱ자로 꺾여 있는 것 같아 그 이상의 위험을 무릅쓸 수가 없어 갑자기 “굴 안에 있는 놈들 모두 손들고 나와라! 안나오면 모조리 수류탄으로 처치해 버리겠다!!”하고 소리친 연후에 한참 동안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기에 결국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던 수류탄을 꺾어진 굴 안으로 집어던진 뒤에야 겁에 질린 듯 손을 들고 나오는 8명의 적을 몽땅 생포했을 뿐 아니라 그 벙커 안에 숨겨놓은 체코식 기관총 1정과 아식소총 8정 61밀리박격포 1문까지 노획하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고 하는데 당시의 11중대 화기소대장 김진탁씨(예.대령)의 증언에 따르면 그 날 새벽 그 벙커 입구에서 손을 들고 나오는 장교(소위) 1명을 포함한 7명의 적군을 전원 전선줄로 묶어 대대본부로 후송시켰던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고 했고, 또 그 924고지 전사면에 한쪽 입구만 있는 그와 같은 지하벙커가 구축되어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9.2) 아침에 투입된 3대대 9중대(주공)와 우일선쪽 8부 능선에 붙어 밤을 새우고 있던 1대대 3중대(조공)에 의해 924고지가 완전 탈환되었지만 그 전날 3대대는 10중대와 11중대가 막심한 피해를 입는 바람에 부득불 대대장에게 직접 보고를 한 다음 각 소대에 배속시켜 놓았던 9정의 경기관총을 소대장 자신이 직접 운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증언도 남겼다.

 
한편 전투가 끝난 후(9월 24일) 장용회 해병은 헬기를 타고 3대대 후방 CP에 비래한 미 해병사단장으로부터 다른 2명의 대원들(성명과 소속 미상)과 함께 미국 정부가 수여하는 동성훈장을 타는 영예를 누렸으나 신주(神主)를 모시듯이 소중하게 간직해왔던 그 훈장은 장단지구의 36고지 전투 때(52.9. 당시 직책은 경기분대장) 중공군에게 점령을 당한 11중대 1소대(장, 이춘몽소위) 본부 벙커에 매몰되어 있다가 그 이튿날 아침 증원부대에 의해 구출될 시에 구사일생 몸만 구출되고 흙더미 속에 묻힌 훈장을 넣어 둔 배낭을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깝게도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총무처 상훈과의 상훈기록에는 모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동성·을지 및 2개의 충무훈장 등 4개의 훈장을 탄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도 장용회씨는 제대를 할 때까지 잃어버린 동성훈장 외의 훈장은 받은 사실이 없어 알지 못하고 있다가 91년 보훈처에 잃어버린 동성훈장을 신고하기 위해 총무처에 신청해서 받아 본 관련 자료를 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됨으로써 슬하의 6남매(2남 4녀) 중 5남매는 시기를 놓쳐 을지훈장과 태극훈장을 탄 국가유공자(생활형편이 어려운)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대학까지의 학비면제 혜택을 받지 못하고 막내딸만 받게 되었다고 하니 조실부모하여 생계가 어려웠던 장용회씨로서는 너무나 억울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을 것이다.

 
휴전 후 하사관교육대를 거쳐 6개월 간 신병훈련소 구대장으로 근무했던 장용회씨는 54년 9월 3등병조(하사)의 계급으로 의가사제대를 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향인 북제주군 애월읍 곽지리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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