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명인·기인

6.25戰爭期 - 초대 전차중대장 오상규 대령

머린코341(mc341) 2016. 7. 31. 10:00

6.25戰爭期 - 초대 전차중대장 오상규 대령

 
46년 2월 5일 창군기의 해방병단에 해군1기 신병으로 입대한 후 해군사관학교 특교대(1차)를 거쳐 소위로 임관, 해군정보국의 정보요원으로서 특히 해군의 숙군기(肅軍期)에 정군(整軍)을 위해 맹활약했던 반공 전선의 맹장 오상규(吳尙圭. 1916년 서울에서 출생)씨.

 
6.25전쟁 발발 1년 후 해병대로 전입, 해병대 전차중대 편성책임자로 내정이 되었던 그는 장비(전차)의 도입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령부(부산)와 진해(해병학교와 교육단 등)를 번질나게 오가며 전차중대의 창설요원 확보를 위해 부단하게 노력을 했고, 그러한 노력 끝에 51년 8월 25일 마침내 제1연대에서 차출된 3명의 장교와 100여명의 사병을 발령받아 최초의 중대편성 작업을 마쳤다. 그 때 선임장교로 임명된 사람은 박효열 중위였고, 1소대장에는 육성환 소위, 2소대장에는 박용구 소위가 임명되었다.

 
그런데 장비의 도입도 없이 막상 발족을 보게 된 전차중대는 편성요원들에 대한 위탁교육의 길을 트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 공교롭게도 휴전협상 때 쟁점의 하나로 부각이 된 아군 점령도서에 대한 적군의 공격 임박설이 나돌게 됨으로써 해병대가 방어하고 있던 동·서해의 여러 섬에 긴급히 병력을 증파해야만 했던 사령부에서는 부득불 전차중대의 요원들까지 차출하기로 결정을 하게 됨에 따라 결국 상당수의 인원을 차출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가뜩이나 해병학교 연병장 한쪽 구석에 있는 창고용 건물 속에서 불편스럽게 거처하고 있던 전차중대로서는 설상가상의 시련을 겪게 된 셈이었으나 그 해(51년) 11월 초 해군자동차학교(진해)의 개교식이 거행되자 오상규 중대장은 직접 이 학교를 방문하여 사회에서 운전면허증을 취득한, 운전과 정비 기술에 능한 20명의 피교육자를 선발하여 전차중대의 핵심적인 요원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또한 그 해 12월 초순경 사령부로부터 수일 후 도입이 된 일부 장비(5대)가 부전역(부산. 동해남부선)에 도착할 것이란 소식과 미 해병사단 전차대대에서 현지 위탁교육과 실습훈련을 실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으니 즉시 대원들을 인솔하여 부산으로 출동할 준비를 갖추라는 고무적인 메시지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부산에 도착한 오상규 중대장은 장비를 인수해서 대기하고 있는 고문단실 요원과 함께 장비가 적재된 무개화차에 편승하여 원주역까지 온 다음 원주역에서 전차를 미 해병대의 롱보이에 건재하여 원통리를 거쳐 펀치볼의 미 해병사단 전차대대 주둔지역으로 향했으며, 그렇게 해서 현지에 당도하게 된 약 50명의 전차중대 창설요원들은 그 당시 만대리(萬垈里. 양주군 해안면)에 위치하고 있던 해병 제1연대(KMC)본부로부터 행정지원을 받는 가운데 위탁교육이 시작될 때까지 현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통역관들의 도움을 받는 가운데 미 해병사단 전차대대 교관요원들로부터 받은 12주 간으로 계획이 된 그 현지 위탁교육은 52년 3월 중순경 미 해병사단과 해병제1연대가 장단지구로 이동한 후까지(5월 3일에 수료) 계속되었고, 탑승요원(Crew man. 약 30명)과 통신(10명) 및 정비요원(10명) 등 3개 반으로 구성된 그 위탁교육이 끝나자 중대장 오상규 대위는 명령에 따라 교육을 받은 그 요원들로 1개 소대를 특별히 편성하여 고려대학 재학 중 해간3기로 입대한 영어회화 능력이 있는 박용구 소위를 소대장으로 임명하여 그 때까지 해병제1연대를 직접지원하고 있던 미 해병제1사단 전차대대의 에이블(Able)중대의 제1소대와 임무를 교대시켜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했다.

 
당시 에이블중대의 제1소대와 임무를 교대했던 박용구씨(예비역 대령)의 증언에 따르면 그 제1소대가 위치하고 있던 곳(진지)은 자유의 다리(임진강 건너) 좌측방향 약 500미터 지점이었고, 인수한 그 진지에서 에이블중대로부터 탄약(포탄과 실탄)과 연료를 공급받아 에이블중대의 작명에 따라 1주일에 3일간 주저항선 전방으로 기동하여 소대장의 지휘 하에 공격목표물에 대한 공격을 하는 실전훈련을 쌓았다고 하며, 당시 그 소대의 13호 전차를 운전했던 손정언씨의 증언에 따르면 아침 안개가 걷힐 무렵 점호를 하고 있는 적진(사천강 건너편 쪽)을 향해 포격을 가하기만하면 포성과 함께 적병들이 확 흩어지는 바람에 두 번째부터의 포탄은 교통호 등 다른 목표물을 공격했고 싣고 간 포탄이 다 떨어지게 되면 돌아왔다고 한다.

 
한편 위탁교육을 받는 동안 추가로 확보하게 될 인원에 대한 자체교육 준비를 꾸준하게 갖추어 왔던 오상규 중대장은 위탁교육과정에서 반별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장병들을 교관으로 임명하여 5월 11일부터 6월 21일까지 전차중대의 편성기지인 파주군 월룡면 영태리에서 6주 간의 교육을 실시했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 추가로 도입이 된 장비(12대의 전차)로 2개 소대를 추가로 편성하여 에이블중대와 완전히 임무를 교대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해병제1연대(10월 1일부터 전투단으로 승격)를 직접 지원하는 막강한 화력 지원부대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 최종편성 때 오상규 중대장은 박효열 중위를 선임장교. 육성환 소위를 제1소대장. 박용구 소위를 제2소대장. 김세환 소위를 제3소대장. 박경래 소위를 정비반장으로 임명했다.

 
당시의 중대 선임하사관은 자체교육 때 포술교관으로 임명된 유혜수 중사(해군11기. 해병대 하사관교육대1기)였고, 41호차(중대장 지휘차)의 전차장은 신영철 하사 였다.

 
당시 해병대에서 보유한 전차는 M4-A3 E형 전차로 그 후 육군에서 보유하게 된 헷지가 없는 전차보다 월등하게 성능이 우수한 전차였다.

 
전차중대에서는 1개 중대의 전차가 전개 가능한 지역에서 3개 소대의 전차(1개 소대 5대)를 교대로 투입하여 주로 전초진지에 대한 화력지원과 역습전 때의 보전협동 작전을 수행했으며, 때로는 축성자재를 운반하다가 적이 매설한 대전차 지뢰를 터뜨려 현수장치를 망가뜨린 적도 있었다.

 
해병제1전투단이 중공군과 정면으로 대치한 사천강을 전방에 두고, 임진강을 배후와 좌측방에 둔, 그리고 개성에서 문산에 이르는 평화도로를 우측방에 끼고 있는 그 장단지구의 사천강 전초지대에서 방어전을 치르는 동안 특히 전차 중대는 36고지와 67고지 역습전 때 맹활약을 했고, 중공군의 1차 추기공세(52.10.2) 때 빼앗긴 67고지에 대한 6차 역습전 때는 중대장 오상규 대위의 진두지휘 하에 3개소대의 전차가 총출동하여 맹위를 떨쳤다.

 
그리고 해병제1전투단이 중공군의 2차 추기공세(52.10.31)를 격파하여 대첩을 거두었을 때는 화력지원부대로써 쌍벽을 이룬 해포대(포병대대)와 함께 가장 큰 공훈을 남겼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전차중대의 초대 중대장에 이어 휴전 후에 창설된 해병제1사단 전차대대의 초대 대대장을 역임했던 오상규씨. 62년 대령의 계급으로 예편할 때까지 도서부대장과 사령부 정보국장 등의 요직을 역임했던 그는, 예편 후 백령도에서 규석(도자기원료) 채취허가권을 취득하여 상당기간 발굴사업을 추진하던 중 노년기에 이르러 건강이 악화되어 90년 초 경북 경산에 있는 누이동생 집으로 내려가 어렵게 의지하고 있다가 92년 6월 소식을 전해 듣고 현지로 내려간 옛 부하들의 주선으로 몇 일간 경산 시내에 있는 모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그 후 다시 둔촌동 보훈병원으로 옮겨져 가료를 받던 중 92년 7월 향년 76세로 타계했다.

 
연천지구에서 육군1사단을 지원한 전차중대의 실적과 관련된 얘기는 “연천에서 육군1사단을 지원한 전차중대 장병들”이란 제목으로 별도로 언급이 된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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