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戰爭期 - 전차정비의 달인 정용섭 해병
전차중대가 창설되었을 때 동 중대의 정비반에 배치된 10명의 정비요원들 중에는 정영섭, 곽성만, 최광훈 해병 등 정비소대의 3총사로 불리우고 있던 3인의 척척박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군자동차학교 1기로 입대(51.11)하여 개교 수일 후 19명의 동료대원들과 함께 전차중대 창설요원으로 차출이 된 이들은 그 후(51.12) 5대의 전차가 먼저 도입이 되어 그 당시 강원도 인제지구에서 작전 중에 있던 미 해병제1사단 전차대대에서 한국해병대 전차중대 창설요원들(제1기)에 대한 실습을 겸한 위탁교육(12주간)을 실시할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특히 8기통 전차엔진을 자신 있게 분해·결합을 할 줄 아는 이들의 실력을 지켜보고 있던 미 해병대 교관들을 놀라게 했다고 하는데 이들 중 신의주 출신으로 일제 때 만주에서 자동차 정비기술을 배웠다고 하는 정영섭씨(1930년생)는 그 위탁교육이 끝난 뒤(52.5) 장단지구에서 제2기생들에 대한 자체교육(6주간)을 실시할 때 뿐 아니라 그 해 연말에 소위로 임관하여 해병제1연대 전차중대로 발령이 난 해간10기 기갑병과 장교들에 대한 자체교육을 실시할 때도 정비교관으로 활약했던 전차 정비교육의 공로자이다.
그런데 자신의 현역시절을 돌이켜보며 정용섭씨는 전차중대가 편성이 되어 실전에 투입된 후 정비반에서 겪었던 허다한 일 중에서 특히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즉 어느 날 좌일선 대대의 전초진지인 87고지 쪽에서 화력지원을 하고 있던 3소대의 전차 1대가 지면이 경사가 져서 벗겨지게 된 궤도(채인)에 자승자박을 하듯 자기 몸이 감겨 꼼짝을 할 수 없는 사고가 발생하자 소대본부에서는 전차의 몸을 휘감고 있는 그 체인을 폭파한 다음 ㄱ자형 도르레로 견인해 오라는 임무를 ‘파랑새’라는 암호명을 부여받고 있던 정용섭 해병에게 부여함에 따라 정 해병은 그 이튿날 새벽 2시경 자기를 안내한 대원(보병)과 함께 약 500미터를 우회하여 그 현장으로 접근, 자신이 휴대해 간 TNT와 뇌관, 전기도화선 등 자재로 체인을 폭파시켜 절단할 준비를 한 연후에 탑승자들이 학수고대하고 있는 포탑 안으로 들어가 전기 스위치를 이용해서 폭파를 시켰고, 체인이 끊어지자 밖으로 나와 ㄱ자형 도르레로 어렵게 전차를 견인했다고 하는데, 전기스위치로 폭파를 시키기 전 전차중대에서는 주저항선에 나가 있는 여러 대의 전차들로 하여금 기동을 하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게 했다고 한다.
다음 얘기는 백주에 로포고지(△39) 전방에서 사고를 당해 주저앉은 전차를 중기·경기관총 1문씩을 장비하고 있는 렉카차를 타고 견인하기 위해 견인코치를 해 주게 돼 있는 미 해병대의 고문관(하사관)과 함께 현장으로 출동했더니 로포고지 주위에 겹겹이 가설해 놓은 원형 철조망 근처의 진로상에 뒹글고 있는 3구의 중공군 시체를 차마 깔아뭉갤 수도 없었고, 또 매설된 지뢰를 의식하지도 않을 수가 없어 부득불 위험을 무릅쓰고 렉카차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그 시체들을 길옆으로 치운 다음 사고를 당한 전차를 어렵게 견인해 왔던 일, 그리고 정차 중대가 연천으로 이동했을 때 강물에 빠진 전차(42호)를 건져 내느라 죽을 고생을 했던 일들이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연천에서 그러한 사고가 발생하게 된 것은 임진강에 부교(浮橋)를 가설한 미 육군공병대대에서 KMC의 전차를 통과시키지 않으려고 하자 화가 난 박효열 중대장이 강물의 깊이나 유속을 재 보지도 않고 부지휘권 전차인 42호차를 강바닥으로 건너가게 한 결과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러한 사고가 발생하자 미 육군공병대에서는 KMC전차를 부교로 건너가게 했으나 급류 속에 빠져 있는 그 전차를 구출해 내기 위해 정영섭 해병 등 정비반의 3총사는 급류 속에 뛰어 들어 렉카차와 전선줄을 이용해서 많은 시간이 걸려 어렵게 견인해 왔다고 하는데, 그 전차를 끌어낼 때까지 그 전차에 타고 있던 5인의 탑승자들은 해병이란 이름이 부끄럽게 모두가 수영을 할 줄 몰라 전차 위에서 수난을 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전차중대가 편성될 때부터 휴전에 이르기까지 교육과 정비 및 사고전차의 견인을 위해 맹활약을 했던 정영섭씨는 휴전 후 사령부 수송중대와 보급창, 전차대대 등 여러 부서에서 근무를 했고, 또 상당기간 동안 그의 뛰어난 정비기술을 높이 평가한 미 해병대 고문단 관계자들의 각별한 배려로 부산 서면에 있는 미 해병대고문단의 BOQ에 파견근무를 하는 특혜를 받기도 했으나, 문제는 그러한 인사조치가 진급을 누락시키는 요인이 되어 고과성적에 반영될 훈장과 표창 등이 있었는데도 동기생들의 계급이 하사였던 56년 7월 일등해병의 계급으로 전역하는 불운을 겪었다고 한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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