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명인·기인

6.25戰爭期 - 독립 42중대장 역임한 심희택 대령

머린코341(mc341) 2016. 7. 31. 10:04

6.25戰爭期 - 독립 42중대장 역임한 심희택 대령

 
1.4후퇴 후 해병대의 도서부대 병력이 상륙했던 원산만 앞 여도(麗島)에 주둔한 독립42중대(여도부대)의 초대 부대장으로서 미국 정부로부터 지휘훈장(리전오브메리트)을 받았던 심희택(沈熙澤) 대령, 그는 일찍이 도서부대에서 제일 먼저 해구신(海狗腎)을 맛본 행운의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한 그 영험한 해구신의 약효 때문에 자신의 휴가 일정을 앞당긴 전설적인 화제를 남긴 지휘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경북 월성 출신(1919년생)으로 8.15 후 대한청년단에 입단하여 활약하던 중 49년 12월 해군에 입대, 해사특교대(9차)를 수료하고 소위로 임관했던 그는 해군본부 정보국으로 발령받아 마산·창원지구 파견대장을 거쳐 6.25 직전 해병대로 전입, 사령부 정보참모실 정보장교(2과장)로 임명되어 경인지구 작전과 원산 함흥지구 작전에 참가한 데 이어 1.4후퇴 직후에 편성된 독립42중대장으로 임명되어 미 7함대의 작전 통제 하에 동해 도서에 대한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그 당시 여도부대는 원산만 내에 산재하는 신도 대도 모도 사도 황토도 등 여러 섬에 소규모의 병력을 분산 배치하여 부여된 임무를 수행했는데, 언젠가 자신의 여도부대장 시절을 회상하며 심희택 대령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추억담을 피력한 적이 있었다.

 
즉 여도에 상륙하기 전 북괴군이 섬에 있는 등대를 파괴해 버리는 바람에 해상에 있는 함정과 연락을 취할 때 어쩔 수 없이 수신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고, 또 그 섬에 영국해병대(1개소대)를 비롯한 타군 정보파견대가 주둔하게 되어 간혹 정보교류를 위한 브리핑도 주관했었다고 말한 그는 주둔 초기 미 육군정보대 파견대장 부츠 중령의 끈질긴 청을 물리칠 수가 없어 어느 날 밤 수 명의 대원을 데리고 목선을 타고 해안(갈마반도)에 상륙, 은밀한 수소문 끝에 어느 마을의 인민위원회 위원장과 마을 이장을 납치하여 철수하는 도중 적군의 추격으로 하마터면 몰살을 당할 번한 일도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여도부대에서는 신도에 파견병력을 상륙시킨 후 칠흑 같은 밤중에 목선을 타고 귀순한 북괴군 총좌 1명과 군의관 2명을 여도로 후송시켜 심문한 다음 총좌는 미 7함대의 정보기관으로 보냈는데, 심희택 중대장이 미국 정부로부터 지휘훈장을 받게 된 것은 바로 그 귀순자들을 흭득한 공적 때문이란 설도 있었다.

 
51년 11월 29일 밤 여도부대에서는 갈마반도의 바로 코앞에 있는 황토도(黃土島)에 배치되어 있던 1개 소대의 병력이 120밀리 포와 75밀리 포의 지원사격 하에 기습공격을 감행한 약 1개 중대의 적 병력에 의해 전멸을 당했다. 적이 상륙을 했을 때 소대장 이장원 소위는 무전기로 중대본부(여도)에 상황을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했고, 보고에 접한 중대장은 즉각 고문단을 통해 봉쇄함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함대 측의 사정으로 함포사격이 가해지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변을 당했던 것이며, 그 이튿날 심희택 중대장이 미국 구축함의 지원을 받아 그 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난 뒤였고, 이 곳 저 곳에 쓰러져 있는 아군 장병들의 시체는 총검에 의해 난자를 당해 차마 뜬눈으로는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한편 심희택 중대장이 남긴 해구신과 관련된 이야기는 대충 다음과 같다. 즉 51년 여름철 어느 날 여도부대에서는 방어고기가 잘 잡히던 여도와 웅도 사이에 50대의 어부가 쳐놓은 그물에 걸려 있는 물개(수컷) 한 마리를 사살하여 부대본부(여도)로 운반해 왔는데, 그 물개가 수컷이란 사실을 확인한 심희택 중대장은 필시 하늘이 준 영약이려니 생각하고 우선 그 물개의 신(생식기)을 조심스럽게 잘라내게 한 다음 신의 윗 부위(3분의 1가량)를 면도날로 베어 엄숙한 마음으로 씹어 먹고 그 나머지 부분은 말려서 먹을 작정으로 자신의 개인 천막 안에 매달아 놓았으나 결국 누군가가 그것을 훔쳐 가는 바람에 짐작이 가는 범인을 쫓을 생각을 접어두고 은근히 일어나는 성욕을 참을 수가 없어 자신의 휴가 계획을 앞당겨 후방으로 가서 객고(客苦)를 풀었다고 하는데, 부대장이 범인으로 추측했던 사람은 그 어떤 인연으로 여도까지 종군을 해서 부대장 천막에 무상출입을 하고 있던 윤씨 성을 지닌 모 고등학교의 영어선생으로,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는 갑작스럽게 피난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에 드나드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1년 2개월 간에 걸친 여도부대장 근무를 마치고 사령부로 전보되어 본부사령과 정보국장을 차례로 역임했던 심희택 대령은 그 후 3년 간 헌병총사령부에서 근무하다가 60년 7월 대령의 계급으로 예편했고, 예편 후 정계 진출의 꿈을 지니고 한독당 재정부장직을 역임하다가 4.19 후에 시행된 총선거 때 경북 영일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리하여 남은 여생을 육영사업에 바치기로 결심했던 그는   년 작고할 때까지 신광여중고(서울)와 태광중고등학교의 재단이사장을 역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투철한 해병정신의 소유자였던 그는 말년에 종군작가 김중휘씨와 손잡고 해병비사(인천상륙작전) 발간을 추진하여 결실을 맺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본 내용의 저작권은 정채호 대선배님께 있습니다. 저작권관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