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명인·기인

6.25戰爭期 - 대도부대의 산 주인공 백남덕 사장

머린코341(mc341) 2016. 8. 1. 22:11

6.25戰爭期 - 대도부대의 산 주인공 백남덕 사장
 

58년 소령의 계급으로 예편하여 사회로 진출했던 백남덕(白南德) 사장 그는 1.4(51.1.4)후퇴 후 독립42중대의 1개 소대병력이 상륙했던 원산만(元山灣) 내에 있는 여러 도서 중의 하나인 신도(薪島)와 대도(大島)의 파견대장을 차례로 역임하며 대도에 존재하고 있던 나환자 수용소와 깊은 인연을 맺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간직한 신도와 대도부대의 유일한 산 주인공이다.

 
원산만의 여러 섬 가운데 신도의 바로 남쪽에 소도(小島)와 나란히 위치하고 있는 대도에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있어 왔던 나환자 수용소가 있었는데, 51년 2월 14일 김성은 소위(해간3기)가 지휘하는 독립42중대의 신도파견대(신도부대. 1개소대병력)가 신도에 상륙하자 그곳 수용소의 간부 일행(4~5명)이 거룻배를 타고 신도로 건너와 “국군 만세”하고 환영의 뜻을 표하며 담배와 먹을 것을 달라고 했고, 또 남한의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니 그 소망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기에 김성은 부대장은 그들에게 약간의 화랑담배와 건빵을 건네주며 최대한 협조를 하겠으니 만약에 대도와 소도에 인민군의 배가 나타날 경우 지체 없이 신도를 향해 봉화(烽火)를 올려 달라고 당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신도 파견대장과 대도 파견대장을 역임한 배남덕씨의 말에 따르면 처음에는 김성은, 백남덕, 이성길 소대장 순으로 15일 간씩 신도 파견대장 근무를 한 후 몇 개월씩 상주 했다고 한다).

 
그 당시 대도의 나환자 수용소에는 약 200명 가량의 나환자들이 살고 있었고, 이상하게도 짝을 짓듯 남녀가 반반인 그 나환자들 중에는 상당수의 미감아들이 격리되어 수용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용소의 대표자인 사이상(일본어·최씨)이라는 사람은 일본 명치대학을 졸업한 지성인으로 발병(發病)이 되기 전까지는 관계(官界)에서 녹을 먹고 있던 사람이었으므로 그 수용소로 봐선 둘도 없는 지도급 인물이었다고 한다.

 
한편 대도파견대의 선임하사관을 역임한 변인철씨가 생전에 남긴 증언에 따르면 그 날(51.2.25) 여도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해병대(1개소대)도 함께 상륙했다가 그 날로 돌아갔다고 하는데(백남덕 파견대장 시절에는 대도에 상주했다고 함) 그날 국군이 대도에 상륙한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대도의 나환자들은 그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올 때 소중히 챙겨가지고 왔던 흰 옷이며 흰 고무신과 검정 고무신 등을 꺼내 입고 신었을 뿐 아니라 민둥한 눈두덩에 숯검정으로 없는 눈썹을 시커멓게 그려 화장을 하는 등 그야말로 거도적(擧島的)인 마중을 나와 ‘국군 만세’를 외쳤고, 또 “국군 아즈바이 동무들 담배 좀 주오다. 양식 좀 주오다”하며 애원을 하는 바람에 미처 상륙을 하기도 전에 그러한 징그러운 군상(群像)을 목격하게 된 장병들은 도무지 기가 질려 상륙하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가 않았으나 대표자 사이상이 앞으로 나와 “여러분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병균은 3초만에 외기(外氣)에 노출되면 죽습니다. 이 수용소에는 마감아도 많습니다. 절대로 전염이 되지 않으니 안심하고 상륙하십시오”하며 정중하고 친절하게 설득을 함으로써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던 장병들의 마음을 조금은 놓이게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그로부터 수 일 후 대도에는 미7함대에서 파견한 3~4명의 군의관이 수 일 간 머물면서 우물을 소독하여 장병들과 나환자들이 함께 마실 수 있도록 해 주고 징그러운 나환자들의 환부를 만지며 치료해 주는 등 환자들을 극진히 돌봐주자 그들은 그 벽안(碧眼)의 양의사들이 마치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천사들로 착각되었을 만큼 감동을 받은 표정들이었다고 한다.

 
수 일 간 대도에 머물며 그와 같은 의료 활동을 했던 그 미군 군의관들은 상륙한 당일 여도로 돌아갔던 영국해병대 지휘관이 작전통제를 받고 있던 미 7함대에 보고함으로써 그와 같은 조치가 취해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대도의 나환자들은 주둔군 부대에서 그들이 원하던 담배와 식량을 지원해 주며 극진히 대해주는 해병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해방 후부터 그들의 숙소로 사용해 왔던 목조건물(일본군의 병참시설물)을 깨끗이 청소하여 군인들의 병사로 제공하려고 했으나 그 호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군인들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했던 수용소 측에서는 어느 날 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한 환영회를 개최했는데, 그 날도 그들은 예의 그 흰 옷이며 고무신들을 입고 신고 눈썹들을 시커멓게 그리고들 나와 그들의 고향 민요나 소학교 시절에 불렀던 창가 등을, 더러는 흥겨운 어깨춤을 곁들여 가며, 또 더러는 손가락이 죄다 문드러진 조막손으로 박장을 치며 신나게들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해병대 장병들의 각별한 보살핌 속에 비교적 안전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대도의 나환자들은 51년 10월 말경 그들이 그처럼 소망했던 소록도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그 때 수용소에서는 대도 파견대장 백남덕 소위에게 흰 천에 먹 글씨로 쓴 감사장을 수여했다고 한다.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국립 소록도병원 직원 강성권씨에게 전화를 걸어 대도의 나환자들이 소록도에 도착한 날짜와 도착시의 인원이 몇 명 이었는가를 물어보았더니 도착한 날짜는 51년 11월 18일로 기록되어 있고, 인원은 99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권성권씨의 협조로 현재 소록도 신생리(고흥군 고흥읍)에 거주하고 있는 진남포가 고향이고 12세 때 대도의 수용소에 입소했었다는 박정자씨(66세)에게 전화를 걸어 특히 6.25전쟁 때 겪었던 일들에 관해 질문을 해 보았더니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수용되어 있던 인원은 350명 이었으나 폭격과 포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또 전쟁이 일어난 그 해 겨울철에는 전염병(열병)에 걸려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감시하는 사람이 없어져 젊은 사람들이 계속 섬을 떠나는 바람에 51년 11월 중순경 대도 앞바다에서 10명씩 조를 지어 큰 군함에 올라탈 때는 대부분이 노약자였지만 전체 인원이 100명밖에 되지 않았고, 그 중 1명은 배를 타고 가는 도중 사망하여 99명이 소록도에 도착했었다고 말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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