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명인·기인

6.25戰爭期 - 연천에서 육군 1사단을 지원한 전차중대 장병들

머린코341(mc341) 2016. 7. 31. 10:03

6.25戰爭期 - 연천에서 육군 1사단을 지원한 전차중대 장병들

 
휴전이 목전에 다가오고 있던 53년 5월 5일 미 육군25사단 27연대에 진지를 인계하고 장단지구로부터 미 1군단의 예비진지가 있는 연천지구의 캠프 인디언힐로 이동하여 약 2개월 간 휴식과 재정비를 취했던 해병제1전투단은 그 기간 중 미 해병제1사단의 작명에 따라 6월 28일부터 7월 8일 정오경까지 육군 1사단 11연대 진지를 인수하여 방어했는데, 이 지면에는 그 기간 중에 있었던 일 가운데 지금까지 전혀 조명된 적이 없는 전차중대의 활약과 관련된 소중한 증언을 정리해서 남기고자 한다.

 
7월 12일 장단지구로 복귀하게 돼 있던 해병제1전투단이 연천지구에 배치되어 있던 육군1사단 11연대 진지를 인수, 방어하게 된 연유는 6월 25일을 기해 감행한 중공군의 대공세로 피탈을 당한 1사단 15연대 지역 내에 있는 박고지(△199)와 퀸고지(△250) 등 2개의 전초진지를 탈환하기 위해 미 1군단에서 1사단의 예비연대인 12연대로 하여금 15연대의 좌일선 대대 정면에 있는 박고지를 공격하게 하고 1사단의 좌일선 연대인 11연대로 하여금 15연대의 우일선 대대 정면에 있는 퀸고지를 공격하게 할 계획을 추진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 1사단 15연대의 우일선 대대(3대대)에 배속이 된 전차소대는 박태식 소위가 지휘한 제1소대였고, 1사단 11연대로 배속이 되었다가 1사단 수색중대로 배속이 변경된 소대는 박선규 소위가 지휘한 제3소대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당시의 3소대장 박선규씨(예비역 대령)의 증언에 따르면 배속명령을 받고 중대본부에서 제공해준 지프를 타고 11연대의 전방 관측소에 들렀다가 내려오던 중 바로 그 날 임무를 교대한 전임중대장(박호열 대위)과 신임중대장(조의정 대위)을 도로상에서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전임중대장이 1사단 작전회의에서 결정을 보게 된 사항이라고 말하면서 해병대의 전차소대에 대한 육군 측의 기대가 크니 최대한 전방으로 나가 지원을 하라고 하자 박선규 소대장은 위험한 작전지역임을 인지하고 “만약에 전방으로 나갔다가 돌아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면 그 책임을 지겠습니까?”하고 반문하니 지프에 동승하여 11연대 OP로 향하고 있던 전임 중대장과 신임중대장은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라고 격려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날 오후 11연대에 배속이 되었다가 다시 1사단 수색중대로 배속이 변경된 3소대는 11연대와 15연대의 제한점 부근으로 이동하여 12연대의 박고지 탈환작전을 측방에서 지원했다고 하는데, 그 날 전차소대가 공격대기 지점에 도착했을 때 바로 그 근처를 지나가던 육군의 지프 한 대가 적 포탄에 명중이 되어 그 차를 몰고 가던 승차자의 박살이 난 지체가 가까이에 있는 소나무 가지에 대롱거리고 있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던 일을 박선규씨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탑승한 1호차가 공격개시선에 도착했을 때 약 1000미터 거리의 동굴진지에서 발사된 적군의 직사포탄(빠츄카포)이 1호차의 오른편에 이어 왼쪽으로 비켜가는 아찔한 순간 급히 좌표를 불러 주며 3호차의 장학석 전차장에게 사격명령을 내렸더니 즉시 그 명령이 이행되어 3호차에서 발사한 포탄이 그 동굴진지를 명중시켜 자신과 1호차의 위기를 구해 준 그 일을 박선규씨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의 생명의 은인인 그 장학석씨(제주출신, 해병3기)는 이미 고인이 되고 말았다.

 
다음은 그 당시 3소대의 1호차 운전병이었던 정상주씨의 증언이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육군 역습부대의 공격을 지원할 때 아군 전차포의 표적이 된 것은 오직 머리에 띠를 두르고 양 손에 방망이 수류탄을 들고 한 사람씩 나타난 중공군이었다고 하며, 그 중공군이 투척하는 수류탄이 아군진지로 굴러 내리는 바람에 역습부대의 공격은 좌절이 되고 말았고, 결국 해병대의 전차는 마치 도깨비처럼 한 명씩 나타나는 그 표적물을 박살내느라 싣고 간 포탄을 죄다 소모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편 그 당시 1사단으로부터 공급받은 76밀리 포탄의 일(日) 규정량이 50발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당시의 전차중대장 조의정씨(예비역 대령)의 말에 따르면 작전 초기 2대대장 서정남 소령이 무전기를 통해 2대대에서 75밀리 직사포탄(무반동총)을 좀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76밀리 전차포탄 보다 사이즈가 작으니 쓰고 싶거든 가져가 쓰라며 농을 하기에 어이가 없어 껄껄 웃어 넘겼다고 하는데, 그 당시 전투단의 좌일선에 배치되어 있던 2대대에서 75밀리 포탄을 다소 넉넉하게 보유하게 된 것은 2대대 탄약작업소대장 유동욱 소위가 1사단 탄약고를 습격했을 때 가져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의 전차중대 3소대장이었던 박선규씨의 또 다른 증언에 따르면 1사단 수색중대에 배속되어 있는 동안 사단장 김동빈 준장이 세 차례나 3소대를 방문하여 격려를 해 주었고, 또 장단으로 복귀한 후 자신은 훈장을 타지 못했지만 15연대에 배속이 되었던 1소대장(해간 10기 동기생)은 훈장을 탔다고 했으나 당사자가 고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기억력을 상실한 노병들로부터 확실한 증언을 청취할 수가 없어 15연대 3대대 지역에 3대의 해병대 전차가 진출하여 믿음직스럽게 화력지원을 했었다고 말하는 당시의 15연대 3대대장 조주태 장군(81세, 예.소장)의 증언과 육군의 작전지역에 들어섰을 때 뜻밖에도 전방에서 한 무리의 육군 병사들과 함께 빠져나오고 있던 고향(인천) 친구가 “야 영철아!”하며 반가워하던 그 일 외에는 전혀 생각나는 일이 없다고 말하는 당시의 1소대 전차장 신영철씨(75세)의 증언만을 여기에 남겨 둔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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