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戰爭期 - 해병여단을 최초로 방문했던 황문식 해사생도
한국기독해병선교회(장, 이명복)의 총무를 맡고 있는 황문식(黃文植) 전 쌍용중공업 이사. 해군사관학교(9기) 3학년 겨울방학 때 금촌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휴전 후의 해병여단(제1전투단의 후신) 본부를 해사생도로서는 처음으로 방문하여 화제를 모았던 그는 현역시절 정평(定評)이 나있었듯이 명 부관 명 비서실장이라는 평을 받은 예(禮)와 신(信)과 성(誠)의 대명사와도 같은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경북 왜관 출신(1933년생)으로 대구사범학교를 거쳐 해사9기로 군문에 입대(51.9)했던 황문식 이사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3학년 겨울방학 때 해사생도로서는 처음으로 여단본부를 방문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 때 이미 졸업과 동시 해병대 장교가 되려고 했던 그는 경남 일대의 여러 초・중・고등학교 학생들로부터 수집한 위문품과 위문편지를 가지고 옴으로써 그 소식이 여단주보에 크게 보도된 바 있었다.
그리고 방학 후 황문식 생도는 자신이 체험한 해병여단 방문소감을 동기생들에게 적극 선전하며 동기생들의 해병대 전과를 적극 권장했다고 하는데, 그 결과 해군사관학교 1기에서 8기까지 해병대로 전과한 22명의 전체인원 수(1기-3, 2기-3, 3기-2, 4기-2, 5기-1, 6기-1, 7기-8, 8기-2명)와 동일한 인원이 9기에서 해병대로 전과하는 기록이 세워졌었다.
한편 해사 졸업과 함께 소위의 계급으로 해병학교 특수기초반(제1기)과정을 이수한 후 신병훈련소에서 중대장 실습근무를 했던 황 이사는 00년 1차 도미유학(미 해병학교의 기초반과정)에서 돌아와 LFTU(포항)에서 교관근무를 하던 중 진해기지사령관 최용남 장군(소장)의 전속부관으로 기용이 되었는데, 최 장군이 그를 부관으로 발탁하게 된 그 배경이 미 해병학교의 고등군사반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을 때 미 해병학교의 실무부서에서 근무하는 황문석 중위의 동기생들(미 해병대 장교들)로부터 전해 들은 황 중위에 대한 평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63년) 2차 도미유학(상륙전학교)을 마친 뒤 중대장, 해사 훈육관(18기~22기) 근무에 이어 상륙전고등군사반을 수료했던 황문식 이사는 여단 작전보좌관으로 근무 중에 있던 64년 사단 비서실장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해병제1독립공병중대(비둘기부대)의 편성과 청룡부대의 결단을 앞두고 있던, 그리고 청룡부대의 결단과 제1진의 출정으로 이어진 그 중요한 기간 중에 그 어느 때 보다도 폭주했던 비서실의 연락 통신업무와 행정 업무 뿐 아니라 취재차 방문한 수 많은 방문객들(언론사와 VIP 등)에 대한 영접문제 등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열과 성을 다해 훌륭하게 완수함으로써 역대 사단 비서실장 중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힘든 일을 가장 훌륭하게 해낸 명 비서실장이란 평을 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67년 육군대학(정규과정) 졸업 후 파월이 되어 2대대 부대대장으로 임명이 되었던 그는 특히 청룡부대가 추라이지구로부터 호이안지구로 이동하기 전 20여 대의 미군 헬기의 지원을 받은 특별기동부대를 편성하여 새로운 여단본부 주둔지역 선정을 위한 지형 답사를 통해 내륙지역이 아닌 해안가를 선택, 건의하게 됨으로써 그 후 작전지역 내에 홍수로 인한 피해가 막심했을 때 여단본부 지역만은 그다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월남에서 돌아온 후 사단 특수교육대장을 거쳐 3연대 3대대장으로 있을 때 황문식 중령은 여단규모의 한미해양 합동상륙전훈련에 참가한 것 외에 69년 5월 말경 사상 최초로 실시된 한・영합동 수직상륙훈련에 참가하는 경험을 샇았는데, 2일 간에 걸쳐 인천-진해간 해상과 교두보가 설치된 행암만(진해) 일대에서 실시된 그 합동수직상륙훈련에는 1척의 영국 극동함대소속 헬리곱타항공모함(알비니온호)과 2개 보병대대(한・영 각 1개대대) 및 2척의 구축함(한・영 해군 각 1척)이 동원되었었다.
그리고 황문식 중령이 지휘한 그 3대대는 그 해 해안선 방어 모범대대로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사단에서 개최된 대대 대항 체육대회에서 6마리의 사상용 돼지 중 5마리를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다.
대대장 근무를 마치고 약 2년 간 UNC 내에 설치되어 있던 한・미 참모 기획단에서 근무하다가 사령부 무관 연락실장으로 보직이 변경된 후 73년 10월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될 시 황문식 중령은 안타깝게도 대령 진급이 좌절되어 때마침 박 대통령의 간곡한 권유로 마사회를 맡고 있던 김동하 장군의 요청으로 마사회의 비서실장으로 기용이 되었는데 그의 대령 진급 탈락은 그를 아끼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매우 서운하게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마사회 비서실장으로 영입된 후 총무부장과 업무부장을 거치며 마사회의 경영쇄신을 위해 3년 간 열과 성을 다해 봉직했던 황문식씨는 76년도에 이르러 마사회 창설 이래 최고의 경영실적을 올렸을 뿐 아니라 특히 업무부장으로 있을 때는 사범학교 출신답게 조기단(操騎團) 내의 말을 관리하는 불우한 직원들을 위해 새마을 학교의 문을 열어(과업시간 후) 대학을 졸업한 직원들과 함께 인근에 있는 성수중학교에 부탁하여 확보한 교과서(국・영・수)로 6개월 간에 2개 기를 교육시켜 수료시킴으로써 마사회 내에 감명깊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사회에서 물러난 후 10여 년간(정년퇴직시까지) 쌍용중공업과 쌍용양회의 공장장, 업무부장, 또는 이사직을 역임했던 황문식 이사는 81년 서해구락부중앙회가 해체된 후(83년)에 발족된 해사출신 예비역 해병장교들의 친목단체인 삼수회(三水會)의 제3대 회장(초대 공정식 장군, 2대 유시종 장군)으로 선출되어 4년 간 삼수회의 발전을 위해 기여했다.
그리고 2001년 1월 이명복 장로(주식회사 코렉스 회장)가 한국해병기독선교회(초대 회장 김윤근 장군)의 회장을 맡을 때 이명복 회장과의 신앙적인 인연으로 동 선교회의 총무를 맡게 된 황 이사는 특히 이명복 회장이 구 해병대사령부(용산)에 건립되어 있던 모군의 초대교회를 중수(重修) 복원하는 과정(2001.5~2003.4)에서 총무로서의 역할을 정성을 다해 수행했고, 금년 1월 해병기독선교회에서는 이명복 회장의 남다른 정성의 점화(點火)로 해병전우회중앙회를 도와(성금지원) 쓰나미(지진해일)로 재해를 겪고 있는 인도네시아에 10명의 자원봉사자를 파견(10일간)시켰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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