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戰爭期 - 해병속보를 발간한 김득주 정훈감
해병제1연대의 진중신문
도솔산지구 탈환작전(51. 6)을 마친 해병제1연대가 7월 중순경 홍천강변의 철정리로 이동하여 휴식과 재정비를 취하고 있을 때 제1연대 정훈관 김득주 대위(해사특공대 6차, 1921년 평양에서 출생)는 애당초 해군본부로부터 배속 받은 윤광선 김경로(카메라맨)씨를 비롯한 3~4명의 공보문관으로 각자(刻字)와 등사기에 의한 속보의 발간을 시도했으나 전문 인력의 부족으로 속간해 나갈 수가 없어 인천경비부 정훈관 장세관 중위로부터 소개받은 송남규 김송섭 임태진 신기철씨 등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거나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임시문관으로 채용함으로써 가까스로 각 대대에 1명씩의 취재기자를 상주시키는 등 팀을 구성하여 4절지(시험지) 앞뒷면으로 된 속보(速報)를 속간해 나갈 수가 있었다.
해병속보라는 진중신문에 게재 되는 주요 내용물은 국방부 보도과에서 발표하는 전황 보도와 각 대대의 전과, 진중문예, 만화 및 소화(우스운 이야기) 등이었는데, 특히 오전 오후(심야) 두 차례 방송하는 국방부 보도과의 전황 방송을 청취하기 위해 해병속보 편집실(분대천막)에서는 정훈관 김득주 대위가 인천에서 구입해온 낡은 제시스 라디오의 리시버로 모기소리 같이 들리는 그 전황보도를 청취하며 속기해야만 했던 취재 담당자들의 고충은 필자도 직접 그 현장을 목격한 적이 있었지만 여간이 아니었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 8시에 개최되는 연대본부의 지휘관 및 참모회의 석상에 배포해야만 했던 이 속보의 발간을 위해 앞뒷면 한 명씩을 맡았던 2명의 각자 담당자들(철필로 등사원지에 글씨를 쓰는 사람)은 편집요원에 의한 편집이 끝나는 즉시 찜통 같은 여름철의 분대천막 안에서 상의를 벗고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글자를 긁어야만 했고, 각자가 끝나게 되면 기온이 떨어지는 새벽녘에 일어나 등사를 해야만 했으니(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등사 잉크가 녹아 등사를 망치기 때문에) 고생들이 말이 아니었고, 겨울철에는 천막 안이 추워서 고생들을 했다. 그리고 각 대대의 지휘관들은 그 속보를 통해 경쟁심을 유발하기 일쑤여서 때로는 편집실에 항의 전화를 걸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고, 어떤 대대의 부대대장은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랬겠지만 편집실 밖에서 칼빈M2소총을 허공에 난사하여 “김득주 이새끼 이리나왓”하고 소리 지르는 바람에 김득주 정훈관은 사색이 되어 책상 밑에 숨고, 편집실 요원들도 겁에 질려 안절부절한 적이 있었다.
한편 그 당시로서는 부대 내에 배포되고 있던 유일무이한 간행물이었던 이 해병속보는 52년 3월 중순경 해병제1연대가 중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장단지구)으로 이동, 53년 7월 27일 그 곳에서 휴전을 맞이할 때까지 약 2년간 어렵게 속간이 되어 왔으나 휴전 후 제1전투단(52. 10. 1 제 1연대가 제1전투단으로 승격됨)이 여단으로 승격한 뒤로는 8면으로 된 여단주보에 게재되고 인쇄도 활판으로 하게 되었는데, 그 때까지 발간된 그 해병주보의 마지막 호수가 몇 호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 후의 김득주 정훈감
제1연대 정훈관시절 해병속보를 창간했던 김득주 정훈관은 그 후 여단 정훈참모 시절에는 55년에 이한을 하게 된 미 해병제1사단의 이한을 기념하기 위한 한․미해병 군악대의 합동 군악연주회를 시공관에서 개최하는 행사를 주관한 바 있었고, 정훈감 시절인 58년에는 정부에서 KBS 교향악단을 주축으로 편성한 친선사절단의 동남아 순회공연 시 그 사절단의 단장으로 선임되어 해병대사령부 군악대와 의장대를 인솔하여 그 순회공년 행사를 더욱 빛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4.19혁명이 일어난 그 해(60년) 6월 제3대 해병사령관 김대식 중장이 연임 중인 임기를 못다 채우고 사퇴한 뒤를 이어 마치 동반사퇴를 하듯 그 해 9월 대령의 계급으로 예편을 했던 김득주씨는 현역 때 인천에서 성악가인 모 미망인과 결혼을 했으나 전역 후 가정불화로 파경이 되어 무질서한 생활을 일삼다가 십 여 년 전에 비명횡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3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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