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戰爭期 - 해외유학사상 전무후무했던 일
해외 유학을 한 해병대 장교들 중에는 학교 당국에서 주최한 뜻 깊은 송년파티 석상에서 동석한 기간장교 부인에게 성희롱을 한 비신사적인 행위로 한국으로 강제 압송된 장교도 있었고, 모군의 창설기념일을 자축하고 기념하기 위해 학교 당국의 승인과 협조를 받아 학교 당국에서 차출한 상위계급(소령) 장교와 고공(高空)에서 동반 점프를 한 장교도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의 행동은 해외 유학사상 전무후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54년 9월 문희석 중령(5.16군사정변 직후 문교부장관으로 입각한)과 함께 미 해병학교 고등군사반에 입교했던 K모 중령, 6.25전쟁 초기 고길훈 부대와 김성은 부대의 부대대장을 차례로 역임한 데 이어 2대대장으로서 참가한 924고지와 1026고지 탈환 작전에서 을지훈장을 탔었고 휴전 후 사령부 정보국장, 신병훈련소 소장을 거쳐 제1연대 부연대장을 역임한 후 도미 유학의 길에 올랐던 장래가 촉망이 되던 그는, 그 해 12월 21일 밤 콴티코(버지니아주)에 있는 미 해병대 교육기지사령부에서 주최한 기지사령부의 고급장교들(부인을 동반한)과 각국의 유학생들을 포함한 고등군사반 장교들이 함께 참석한 성탄절을 앞둔 송년파티 석상에서 기분 좋게 취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자리를 같이하고 있던 미 해병대 장교 부인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성희롱을 하는 비신사적인 추대를 빚은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어 그 현장을 목격한 어느 장교의 신고로 즉각 헌병이 출동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출동한 헌병이 자신을 연행하려 하자 그 헌병에게 주먹질을 가하는 바람에 교육기지사령부에서는 FBI에 의뢰하여 그를 한국으로 압송하는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해병대의 고급장교로서 장래가 촉망되고 있던 대단한 프라이드를 지닌 그 K 중령이 그와 같은 비신사적인 행동(자신의 변명인지는 모르나 성희롱을 하지 않고 모 장교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설도 있지만)을 취한 그 이면에는 한국전에 참전한 흑인병사를 포함한 일부 장병들이 한국을 더러운 나라. 도둑이 들끓는 나라로 매도하는 바람에 그러한 자리에서 그러한 감정이 그러한 형태로 폭발을 한 것이라는 설도 있었다.
한편 그가 한국에 도착하자 용두산에 위치하고 있던 사령부에서는 그 이듬해(55년) 1월 초 국제적인 망신으로 해병대의 명예를 실추시킨 그를 고등군법회의에 회부하여 그의 동기생들이 대령 진급을 앞두고 있던 그 시기에 그를 소령으로 강등시키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결국 5.16(61년) 군사정변 때 중령의 계급으로 예편되고 말았지만 그 한 번의 실수로 자신의 인생을 망치다시피 했던 그는 85년 3월 지병으로 타계했다.
한편 그 이듬 해(55년) 4월 미 해병학교에서 기초반 과정을 이수하고 있던 이근식(李根植. 해간3기) 대위는 KMC 창설 15주년을 자축하고 혈맹의 전우인 한·미해병대의 우의를 돈독히 하려는 의도에서 학교 당국의 승인과 협조를 얻어 학교 당국의 기간장병들과 모든 피교육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학교 당국에서 차출한 장교 한 사람과 함께 1,250피트 상공에서 동반점프를 했던 것인데, 그 날 이근식 대위와 함께 동반점프를 했던 그 케리 소령은 후일 미 해병대의 사령관을 역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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