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戰爭期 - 박경렬씨가 남긴 다음과 같은 이야기
내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
6.25전쟁 전야인 1950년 6월 24일 밤 해군사관학교에서는 30만의 인민군이 38선을 돌파하여 남침을 개시했다는 가상시나리오에 의거한 스톰(STOM) 훈련을 실시했는데, 그 이튿날 새벽 뜻밖에도 그 가상시나리오가 실제 상황으로 적중되는 바람에 학교 당국자나 피교육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 당시 나는 해군사관학교의 병기관 겸 육전교관으로 파견근무를 하고 있었고, 그날 밤에 당직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날 밤 훈련 계획본부에서는 6월 10일에 입교한 7기 생도들을 방공호에 비상대기 시켜놓고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그들의 담력과 정신감정 테스트를 했다.
즉 4,5,6기 생도들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마치 공산당이 학교를 점령한 것처럼 떠들썩하게 적색구호를 외치게 했고, 인민군으로 가장한 3~4명의 기관원들이 당직실을 점령하여 근무자들의 총기를 빼앗고 손을 뒤로 묶어 꿇어 앉혀 놓음으로써(나는 물론 훈련인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처신했다) 사태 파악을 위해 당직실로 달려 온 신입생들로 하여금 실제상황으로 비치도록 했다.
그리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신입생들이 실탄이 없는 99식 소총을 거꾸로 거머쥐고 저항을 하기 위해 방공호 밖으로 뛰쳐나오자 그 길목을 차단하고 있던 요원들이 일제사격을 가할 태세를 갖추고 “해군사관하교는 우리 인민군이 접수했다”고 말하면서 항복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자 생도들 중에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바닷물에 뛰어드는 생도도 있었고, 망해봉으로 달아나는 생도들도 있었는데, 훈련 계획본부에서는 망해봉으로 달아난 생도들을 추격하는 단계에서 “지금까지의 상황은 스톰이다. 훈련 끝. 산에서 내려오라!”고 하는 메시지를 확성기를 통해 고지했다.
스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 당시 9차 특교대에 입교해 있던 해간 2기생들(강복구씨 등 24명)의 내무실을 4,5,6기 생도들이 취침시간에 습격하여 물벼락을 퍼부어 내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작대기로 두들겨 패는 등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자 습격을 당한 쪽에서 역습을 감행한 적도 있었다.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4개월간의 과정을 이수하고 2개월을 더 채우기 위해 특교대에 입교했던 그 해간 2기생들은 전쟁이 일어나자 해병대사령부(제주도)에 복귀하여 잔여기간(약 1개월)에 대한 보충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자 나는 사령부(제주도)로 복귀하여 모슬포부대의 2중대 1소대장으로 배치 받아 7월 중순경 군산으로 출동하여 장항전투에 참가했다. 장항전투 때 2중대장 김광식 중위는 적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겁도 없이 고지 위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따발총탄이 빗발치자 그 자리에 엎드려 꼼짝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날 이후 그는(내가 느끼기에는) 전쟁 공포증에 걸린 사람 같이 보였다.
장항 북방의 야산에 진출해 있던 2중대와 1중대(화기중대)가 서산 방면으로부터 장항 쪽으로 유유히 진격해 오는 적 부대에 맹렬한 저지사격을 가하고 군산으로 철수했던 그 장항전투는 결국 전투다운 전투를 해 보지 못한 전투였고, 만약에 적이 추격을 했더라면 군산으로의 철수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 후 나는 함양지구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진해병원으로 후송이 되었는데 그때 도로변에서 민간 트럭을 세워 전령과 함께 운전대 옆 좌석에 태워 준 김성은 부대장에 대한 고마움을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병원까지 따라와서 내 침대 밑에서 잠을 자며 시중을 들고 있다가 원대로 복귀했던 전령(안성출신의 안경희 해병)이 진동리 전투에서 전사를 했다는 소식을 병상에서 전해들은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예편 후 나는 거의 매년 현충일에 국립묘지로 가서 안 해병의 무덤을 참배 했다.
한편 그해(50년) 10월 퇴원을 하자마자 김성대 중위와 함께 사관후보생교육대(장, 김용국 대위)의 구대장으로 임명되었던 나는 바로 그 무렵부터 인사발령이 나서 동래에 있는 육군종합학교에 입교할 후보생들을 덕산비행장에 수용하여 기초훈련과 좌학을 실시하고 있다가 시험을 거쳐 매주 약 30명씩 GMC 1대로 육군종합학교까지 1․2구대장이 교대로 수송하여 입교시키는 조치를 취했는데, 해간 3기 중 제일 먼저(1회) 입교했던 사람들은 현역 하사관 출신들이었고, 그 후부터는 간부후보생 전형시험에 합격한 일반인들과 현역 하사관들 중에서 성적 순위로 30명씩 잘라서 입교시켰다. 그리고 해간 4․5․6기생들은 진해 도천초등학교에 수용하여 그와 같은 절차를 거쳐 위탁교육을 받게 했다(98. 12.).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3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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