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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戰爭期 - 펀치볼에서 은성훈장 수령한 김병호 중령

머린코341(mc341) 2016. 8. 3. 07:02

6.25戰爭期 - 펀치볼에서 은성훈장 수령한 김병호 중령


군산에서 검산령까지

 

1927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진주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함안농업전수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던 중 해군사관학교 1기로 입대 임관(1947. 2)했던 김병호(金秉鎬) 이사는 소위 임관과 동시에 손원일 참모총장의 전속부관 근무에 이은 함상근무를 거쳐 49년 12월 말경에 진해에서 제주도로 이동하여 재편성을 하게 된 해병대의 모슬포부대(장, 김동하 소령)의 제1대대장으로 임명된 후 6.25전쟁이 발발하여 사령부에서 군산으로 출동시킬 해병대 최초의 전투부대(고길훈 부대로 명명됨)를 편성할 때 그 부대의 부부대장으로 임명되어 군산 장항이리지구 전투(7. 15~22)에 참가한 것을 비롯, 군산에서 철수한 고길훈 부대가 여수항에서 김성은 부대로 증편된 후에 치른 운봉 함양 진주지구 전투와 마산으로 철수했다가 재출동하여 치른 1차 진동리지구 전투(이 전투에서 전 장병 1계급 특진)와 킨 특수임무부대(미 8군에서 북괴군 6사단의 마산 점령을 저지하기 위해 편성한 미 25사단을 주축으로 하는 혼성부대)에 배속이 되어 수행한 2차 진동리지구 전투에 이르기까지 김성은 부대의 부부대장으로서 모든 장병들과 악전고투를 하며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그리고 8월 17일 감행된 김성은 부대의 통영기습상륙전(8. 17)에도 참가했던 김병호 이사는 그 후 통영에서 인천을  거쳐 9월 26일 수색에 도착했던 김성은 부대가 5대대로 개편될 때 5대대(장, 김대식 중령)의 부대대장으로 임명되어 수도탈환작전과 북한지역에서 미10군단의 후방을 엄호하며 수행했던 해병대의 여러 지역 작전 중 고성 문천 검산령 및 함흥지구 작전에 참가한 후 미10군단의 흥남철수작전 기간 중(12월 하순경) 연포비행장에서 공로로 수영비행장으로 철수했는데 언젠가(현역시절) 김병호 이사는 필자에게 미군들의 철수 엄호를 위해 원행했던 검산령(△1,127, 평안남도와 함경남도의 경계지대)에서 이틀 동안 추위에 떨며 고생했던 잊을 수 없는 추억담 가운데 특히 근처에 있는 화전민들의 움막집 부엌 아궁이에서 약간의 쌀을 그 집 노인에게 주고 얻은 씨알강냉이 몇 자루를 구워 먹었던 일은 취사장에서 어렵게 지은 밥이 주걱(야전삽)으로 퍼내기가 무섭게 얼음 덩어리로 화했던 그 영상과 함께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펀치볼에서 수여된 미국 은성훈장

 
1950년 12월 북한지역으로부터 철수한 해병대의 전투 병력은 진해에 집결하여 재편성을 거쳐 육로와 해상으로 안동지구와 영덕지구로 출동했는데 그 때 사령부 작전국장으로 발령을 받았던 김병호 중령은 그 해(51년) 6월 도솔산지구 탈환작전이 끝난 후 제1연대 2대대장으로 임명되어 중동부전선으로 출동, 8월 31일부터 9월 3일까지 수행된 924고지(일명 김일성고지) 및 1026고지(일명 모택동고지) 탈환작전에 참가했는데, 3대대(주공)와 1대대(조공)에 의해 924고지가 점령된 직후 김병호 중령은 연대의 예비대인 제2대대를 지휘하여 924고지 서북방으로 뻗어 있는 그 1026고지를 단숨에 점령함으로써 9월 3일 펀치볼(해안분지)에 있는 제1연대의 고문관실에서 연대장 김동하 대령의 입회하에 미국 정부가 수여하는 은성무공훈장을 받는 영예를 누렸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하는 을지무공훈장도 아울러(추후에) 받았다.

 
그리고 그 1026고지 탈환작전에서 김병호 대대장은 2대대에서 노획한 북괴군 군관의 소련제 떼떼권총(장난감 같은 소형권총) 한정을 노획물 리스트에 올리지 않고 전역한 후에 이르기까지 사물처럼 보관해 왔었는데 그 떼떼권총(쏘제 38구경)과 관련된 뒷얘기는 별도로 언급이 된다.


감동적인 우중 일화


한편 924 및 1026고지 전투가 끝난 직후 중령 계급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사령부 정보국장으로 임명되었던 김병호 이사는 그 이듬해(52년)에는 진해 신병훈련소 소장으로, 53년 11월에는 재차 사령부 작전교육국장으로 발령이 난 데 이어 그 이듬해(54년) 5월에는 제1연대 부연대장으로 발령이 나는 등 승승장구 하듯 요직을 역임했는데, 특히 그 제1연대(연대장 김두찬 대령) 부연대장 재임기간 중 김병호 이사는 다음과 같은 우중의 인정미담을 남겼다고 한다.


즉 무더위가 한창이었던 7월 중순경 어느 주말을 이용, 전령을 대동하고 서울 시내에 있는 자택으로 외출하고 있던 김병호 중령은 가는 도중 억수 같이 내리기 시작한 소낙비를 맞으며 전방(서울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육군 사병이 눈에 띄자마자 운전병으로 하여금 차를 세우게 한 다음 그 사병에게 어디로 가는 중이냐고 물어보곤 그 사병의 입에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가기 위해 버스 정거장이 있는 곳까지 가는 중이라고 하자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차에서 내려 그 사병을 지이프타의 뒷좌석에 올라타게 했고, 버스 정거장에서 어디로 가는 차를 타는지를 물어본 다음 서울역 방면으로 가는 차를 탄다고 하자 “잘됐군”하며 그 사병을 서울역까지 데려다 준 연후에 돈암동에 있는 자택(셋집)으로 향했다고 하는데, 그 날(주말) 김 부연대장을 수행했던 당시의 전령 오산근씨(소련 전차병 1기 출신)의 말에 따르면 빗물에 흠뻑 젖은 그 사병을 뒷좌석에 태우다 보니 빳빳하게 대려 입고 갔던 자신의 외출복이 모양 같잖게 되고 말았다고 한다(그 당시 해병제1연대의 소재지는 파주군 문산읍 한양2리 였고 여단본부가 위치했던 곳은 파주읍 금촌면 아동리 였다).

 

제주, 충북 농협지점장

 
그 후 사령부 정보국장 신병훈련소장을 역임했던 김병호 이사는 그 이상의 관운을 타고나지 못했던지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그 해(61년) 7월 31일 부로 중령의 계급으로 전역하는 아쉬움을 남겼으며, 전역 후(62년 경) 제주도 농협 지회장으로 발령이나(당시의 제주도지사는 김영관 제독이었고, 내무부장관은 박경원 중장이었음) 만 2년 간 경제개발기의 제주도 농협의 발전을 위해 성념을 다해 봉직한 데 이어 64년 9월에는 농협 충북지회장으로 취임, 불철주야로 근녕했으나 다음과 같은 설화(舌禍)사건, 즉 65년 봄 보은군 농민대회에서 한 강연을 통해 ‘고급공무원들의 부정 운운...’하며 “농민들이 협동정신을 발휘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 육군 출신의 모 기관장이 집요하게 고위층에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결국 그 관재수로 인해 억울하게 67년 연말까지 농업중앙회 평이사로 있다가 의원 사직서를 제출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와 같은 행적을 남긴 김병호 이사는 자신이 앓고 있던 지병으로 84년 향년 5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이 지면에 게재된 사진들은 김 이사가 농협 모 지회장 재임 시에도 측근 직원으로 근무했던 오산근씨로부터 제공받은 것이며, 김 이사가 전역한 후에도 계속 당국에 신고를 하며 보관해 왔던 그 쏘제 떼떼권총(연발 38구경)은 김 이사가 제주도에서 충북도지부로 전근했을 때 미신고로 청주경찰서에 영치된 것으로 안다고 오산근씨는 말하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3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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