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戰爭期 -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
도솔산지구 탈환작전(51. 6. 4~20) 때 발생했던 수백 명에 달하는 사상자들 중에는 이런 중상자도 있었다. 즉 3대대 9중대가 3대대의 주 공격목표인 13목표를 공격하기 하루 전 날 아침 각 소대가 공격대기지점으로 진입하고 개인호를 파고 있을 때 적진으로부터 날아든 82번지 박격포 탄이 큰 나무에 떨어지며 폭발한 파편에 4명의 소대장들 중 제일 먼저 소대원들 이 야전삽으로 파서 개인천막(판초)까지 쳐놓은 호 속에 들어가 누워있던 3소대장 김학렬 소위의 복부에 꽂혀 중상을 입게 되자 위생병과 소대원들이 1소대장 석태진 소위(해간 3기)를 비롯한 다른 소대장들이 염려를 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손바닥만한 그 파편조각을 뽑아내고 응급조치를 취한 연후에 의식불명 상태에 있는 그를 들것(단가)에 뉘어 중대본부를 거쳐 대대 구호소로 후송하게 되었고, 사상자들의 속출로 지칠대로 지쳐 있던 때에 구호소에서는 운반되어 오는 도중 피를 많이 흘려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한 그가 이미 숨을 거둔 시체로 착각했던 나머지 진맥도 제대로 해 보지도 않고 거적때기를 구해 혼수상태에 있는 김학렬 소위의 누워있는 들것 위에 덮어 씌워 놓고 말았으니 비록 실날같은 명줄이 붙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죽은 시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인명재천, 그 날 오후 3시경 3대대 작전장교 박동열 중위가 구호소에 들러 거적에 덮여 있는 그의 시체를 슬쩍 훑어보며 “이 친구 죽었군”하고 돌아설 때 비록 말도 할 수 없고 몸도 꼼짝할 수 없는 상태였으나 의식만은 또렷해져 박 중위가 내뱉고 간 그 말이 야속하게 느껴졌던 나머지 저 새끼가 저런 말을 하다니… 내 반드시 살아나 저 새끼 앞에 나타나야지…하고 작심을 했고, 또한 그 시체를 거두어 염을 하려고 했던 위생하사관이 시체에 묻은 피를 닦으려고 했을 때 뜻밖에도 시신인 줄 알고 있던 김 소위가 눈을 뜨게 됨으로써 그 길로 원주에 있는 육군 야전병원을 거쳐 진해 해군병원으로 후송되어 몇 달 동안 입원 가료한 끝에 퇴원을 하게 된 그는 후일 대령의 계급으로 예편했으나 그 중상의 후유증 때문에 장수하지 못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해병제1연대가 펀치볼(해안분지) 서북방으로 뻗어 있는 924고지 및 1026고지 일대를 점령, 방어하고 있던 기간(51. 9~52. 3) 중 주저항선에 배치되어 있던 3대대 11중대 3소대의 선임하사관 박 모 상사는 전선에 배치된 바로 그 이튼 날 정오경 소대장 조덕제 소위가 대원들을 이끌고 정찰을 나간 틈을 타서 진지 전방에 대한 적정이나 전쟁터의 생리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악성 피부병으로 인해 몹시 가렵고 더러워진 곳(사타구니)을 씻고 팬티도 빨아서 갈아입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철조망을 타 넘고 진지 전방에 있는 옹달샘 샘터를 찾아 나섰다가 용케도 옹달샘을 발견하여 볼일을 보던 중 다음과 같은 변을 당했다.
즉 그가 허겁지겁 아랫도리를 죄다 벗은 채 비누질을 하며 가려운 곳을 정신없이 씻고 있을 때였었다. 아무런 인기척도 아무런 말도 없이 옆에서 그의 다리를 툭 차는 발이 있었다.
그래서 누가 이런 무례한 짓을 하는가 싶어 고개를 돌려 슬쩍 옆을 쳐다 본 그는 미 해병대 전투복 차림에다 칼빈 소총을 어깨에 멘 아군 정찰대원들인가 싶은 두 사람이 서있자 “야 임마 나 선임하사관이야!”하곤 하던 일을 계속하려고 했으나 다음 순간 그 두 사람 중의 하나가 거치른 북녘말씨로 “야 이 썅 간나아새끼 손들고 일어나지 못하간!”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라 사색이 되고 말았다.
박상사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 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지와 팬티를 홀랑 벗은 반신 알몸으로 벌벌 떨며 팔을 쳐들고 일어나 그들로부터 검색을 당한 연후에 앞뒤에선 그들에 의해 연행을 당하게 되었으니 기가 찬 노릇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하늘이 박 상사를 도우려고 했던지 그들의 길목에서는 끔찍한 변이 일어났다.
즉 앞서 가던 자가 자기네 부대에서 부설해 놓은 부비트랩(수류탄)의 거미줄 같이 가느다란 인계철선을 발끝으로 건드리는 바람에 그 인계철선을 따라 나뭇가지 사이에 매달려 있던 여러 개의 수류탄이 일제히 폭발함으로써 세 사람의 몸뚱이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상처투성이의 참담한 몰골이 되어 지면에 떨어졌다.
앗차 하는 찰나에 빚어진 너무나도 끔찍한 변이 아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11시간이 지난 밤 9시경이었다. 초소에서 야간 경계근무를 하고 있던 보초병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소대장님… 소대장님…”하는 소리였는데 워낙 가냘프고 맥이 없는 소리였는지라 언뜻 듣기에는 죽음에 임한 짐승들의 신음소리나 구렁이의 울음소리 같이 들렸다.
그래서 초소 근무병들은 이 사실을 소대본부에 보고하게 되었고, 보고에 접하게 된 소대장은 인원파악 과정에서 선임하사관이 부재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끝에 즉시 초소로 내려가 그 수상쩍은 소리가 선임하사관의 목소리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임하사관이 변을 당한 것은 분명했으나 그렇다고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적이 변을 당한 선임하사관을 미끼로 하여 그 어떤 함정을 파놓고 있을지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대장 조덕제 소위는 1개 분대의 병력을 직접 지휘하여 엄호 및 경계태세를 철저히 갖추는 가운데 구출조를 철조망 바깥으로 내 보내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박 상사를 운반해 오도록 했는데 다행히도 염려했던 적의 함정은 없었다.
한편 진내로 운반된 박 상사의 몸둥아리는 목숨만 붙어 있다 뿐이지 시체나 다를 바가 없었으며, 날이 밝은 후 소대의 정찰조가 박 상사가 변을 당한 그 현장을 수색했더니 그 곳에는 박 상사를 앞뒤에서 에워싸고 연행했던 두 명의 적군이 참담한 시체가 되어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난 후 후방지구에서 수사기관원으로 근무하던 중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을 받는 대신 일선지구로 추방을 당하듯이 전출이 되었다가 그 악성 피부질환 때문에 그와 같은 변을 당했으나 명이 끊이지 않고 극적으로 목숨을 부지하게 된 그 박 상사는 후일 경찰계에 투신하여 서장의 직위에까지 올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공군의 1차 추기공세 때(52. 10 초)
해병제1연대가 중동부전선으로부터 장단지구 전선(사천강 전초지대)으로 이동(52. 3. 17)한 직후(4월 중순경)의 일이었다.
우일선 대대인 제1대대의 인사부관 겸 본부중대장 정 모 중위는 부대대장 함 모 대위로부터 연대본부의 지휘관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이라고 언급하면서 2명의 수사기관원이 포승줄로 묶어 대대 후방CP로 끌고 온 2명의 도망병을 임진강 철교 건너편의 적당한 장소에서 총살한 다음 그 장소에 매장하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마음 속에 내키지 않는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얼굴이 백지장 같은 그 2명의 도망병과 탄약작업소대로부터 차출 받은 엠원소총과 야전삽과 곡괭이 등의 도구를 갖춘 5~6명의 대원을 의무실 엠블런스에 싣고 미 해병대 헌병이 검문하고 있는 임진강 다리를 검문 없이 통과한 다음 후방으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한참 동안을 서행을 하다가 마침 눈에 뛴 도로변의 야산이 있기에 명당 같이 여겨지기도 한 그 야산 기슭에 엠블런스를 세워놓고 일부 대원들로 하여금 야전삽과 곡괭이로 2명의 도망병을 총살하여 매장할 웅덩이를 파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작업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을 때 지이프를 타고 그곳을 지나치던 포병대대 부대대장 고상하 대위가 차를 세우더니만 “여보 당신 누군데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소”하고 정 중위에게 물어본 다음 정 중위의 입에서 도망자 총살 운운하는 말이 나오자 “이곳은 포병진지 앞이라 안 되니 다른 곳으로 가보시오”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작업을 중단하고 계속 가던 길을 살피며 가다가 이러다가 해가 기울기라도 하면 어떻게나 하는 생각이 들어 왼편 야산 쪽으로 나 있는 좋은 길로 들어섰다가 나즈막한 응달진 산기슭이 눈에 띄기에 시간에 쫓기는 마음으로 서둘러 구덩이를 파도록 지시를 했으나 응달진 곳이어서 땅이 얼어 구덩이를 파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하여 정 중위는 해가 서산으로 기운 것을 의식했던 나머지 중동부전선에서 목격했던 (도망병들을 구덩이 앞에 세워 놓은 십자가형 기둥에 묶어 놓고 집행관이 할 말이 없는가를 물어본 다음 입술에 물려 준 화랑담배 한 가치를 한 숨을 몰아쉬며 뻐끔뻐끔 다 피웠을 때를 기다려 두 눈을 수건으로 가려놓고 구덩이 앞 7~8미터 전방에 정열해 있는 4~5명의 저격수들에게 ‘겨누어 총’‘발사!’하는 구령을 걸어 총살을 했던) 절차 따위는 무시하고 서둘러 2명의 엠원 소총수를 구덩이 전방 4~5미터 지점에 배치한 다음 엠블런스 옆에서 사색이 된 채 뒤늦게 후회하듯 “네가 고향으로 가자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따라가지 않았을 텐데…”하고 한탄하는 한 도망병과 그 말이 묵묵부답하고 있는 또 한 사람의 같은 이북출신 도망병을 그들의 무덤이 될 구덩이 앞에 세워 놓고 총살을 하려고 했으나 어떻게 그 정보를 입수하여 행방이 묘연해진 그 도망병들을 찾아 나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이프차를 몰고 그 현장으로 질주해 온 1대대 고문관 ‘랏살라’ 소위가 지이프차에서 뛰어 내리기가 무섭게 “스토옵”“스토옵”하고 소리치며 다가오는 바람에 정 중위는 어쩔 수 없이 총살형의 집행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포병대대 부대대장과 랏살라 고문관 덕분으로 총살이란 극형을 면하게 된 그 두 사람의 이북출신 도망병은 후방으로 이송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고 하는데 그들이 군법회의 법정에서 어떠한 형을 선고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죽다가 살아난 그들로부터 특히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 쏜살같이 차를 몰고 달려와 “스토옵”하고 소리침으로서 총살을 중지하게 했던 그 벽안의 미군 장교를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사천강 전초지대(장단지구)에서 감행한 중공군의 1차 추기공세(52. 10. 2)로 우일선대대(1대대)의 전초진지인 36고지(경의선 철로 좌측)와 67고지(철로 우측)가 적의 수중에 들어간 데 이어 좌일선 대대(2대대)의 유일한 전초진지인 87고지를 피탈당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는데, 그 87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2차 역습전(10월 7일)에 투입된 5대대 53중대장 박병호 중위는 역습전(공격개시시간 04시 30분)이 전개되는 와중에 선임장교 김대열 소위가 직격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자 공격소대(1소대)의 진로에 적의 탄막사격이 가해지고 있는 상황 속에 “선임장교가 전사를 했다. 돌격을 감행하라!” 소리쳤고, 돌격을 감행한 공격소대원들이 고지 위에서 백병전을 벌일 때 8부 능선에서 입게 된 중상으로 긴급 후송된 덴마크 병원선(인천)에서 70여 시간을 죽은 사람처럼 의식을 잃다 깨어나게 됨으로써 저승으로 갔다가 염라대왕의 선처로 되살아 온 사람이란 말을 들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박병호 중위의 부상과 후송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일화도 이 기회를 통해 공개해 두고자 한다. 즉 박병호 중대장의 부상을 입게 된 것은 8부 능선에 진출해 있을 때 16대 전령(이 모 일등해병, 5기생)의 철모에 떨어진 중공군의 방망이 수류탄이 박병호 중대장의 가슴에 굴러 떨어져 다리 밑에서 폭발함과 동시에 따발총에 의한 총격이 가해졌기 때문이었고, 전령들이 중상을 입고 쓰러진 중대장을 급히 후송시키려고 하자 그는 때마침 그 곳에 나타난 2명의 분대장들(장 하사와 정 하사)에게 “상황이 위급하니 나를 쏘고 속히 제1집결지로 철수해! 명령이야”하고 고통을 참아 가며 말하는 바람에 다급해진 장 하사가 그 명령에 따라 중대장을 사살하려고 총(엠원)을 겨누었으나 그 순간 정 하사가 “안돼! 죽어도 같이 죽어야해!”하고 소리치며 장 하사의 총대를 밀어 제친 다음 서둘러 말문을 닫고 쓰러져 있는 중대장을 제1집결지(87고지 후방의 50고지를 뜻함)를 거쳐 배속 부대인 2대대 본부 구호소로 후송한 끝에 급거 비래한 미 해병대의 환자수송용 헬기에 실려 인천항에 정박하고 있는 덴마크 병원선으로 이송, 그 곳에서 골절된 양쪽 하퇴부(발목 위)에 대한 접합수술을 받은 지 72시간 만에 의식을 회복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후 수년 간 진해 해군병원에 입원 가료 했던 박병호씨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부상으로 인해 불편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3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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