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명인·기인

6.25戰爭期 - 고아원의 아버지로 불리 운 박갑철 소령

머린코341(mc341) 2016. 8. 3. 07:04

6.25戰爭期 - 고아원의 아버지로 불리 운 박갑철 소령


51년 연평도 미군 레이더기지 경비대장을 역임할 때 양식이 떨어져 끼니를 잇지 못하게 된 80명의 전쟁고아들(청육원 원생들)을 구하기 위해 작은 어선을 구해 타고 어화도로 건너가 어렵게 먹거리를 조달해 옴으로써 주민들로부터 ‘고아들의 아버지’란 칭송의 말을 들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박갑철(朴甲喆) 중위, 인천제철 경비실장으로 있을 때 부정퇴치를 위해 용명을 떨쳤던 그는 예편 후 해병대 불교 신도 중 조계종 감찰위원을 역임하며 불교계의 정화를 위해 앞장섬으로써 조계종 불교신도 등으로부터 호법신장(護法神長)과도 같은 인물이란 칭송을 받은 유일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연평도 시절에 겪었던 일들

 

전북 정읍출신(1922년생)으로 과거 일본군에서 복무한 경력(최종계급 조장. 曹長)의 뒷받침 하에 51년 4월 해간 6기로 임관했던 그는 63년 4월 소령의 계급으로 예편할 때까지 독립22중대 1소대장, 서해부대 중대장, 제주도 막사장, 상남훈련대 시범중대장, 진해기지 본부대대장 등의 직책을 수행했는데 특히 연평도 미군 레이더기지 경비대장으로 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일들을 겪었다.

 

즉 경비대장으로 부임한 직후 북괴의 대남방송을 통해서는 연평도의 미군 레이더기지를 경비하는 미제의 앞잡이 박갑철 대장을 사살하는 동무에겐 5,000만원의 상금을 준다는 소름끼치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원주민들로 부터서는 미8군 직할 민간인 유격대인 동키부대의 횡포가 심하다는 진정을 받게 되어 그들을 철저히 다스림으로써 후일 원주민들로부터 송덕비를 세워드려야 할 분이란 칭송의 말을 들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모두에서 언급한 전쟁고아들과 관련된 얘긴데 어화도로 갈 때 박갑철 중위는 배 밑바닥의 한 부분이 암초에 부딪쳐 침수가 되는 바람에 한편으론 물을 퍼내고 한편으론 배 안에 있는 이불로 구멍이 난 곳을 틀어막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하며, 어화도에 상륙하여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성육원(聖育園)의 고아들이 처해 있는 딱한 사정을 설명하고 도와 달라고 호소하자 상당수의 원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잡곡이나 해산물 등을 꺼내 박 중위가 가지고 간 자루 속에 넣어 주었고, 또한 피난민들 중에서도 선뜻 등에 지고 있던 짐 보따리를 풀어 약간의 먹거리를 내놓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그 당시 성육원의 총무로 있었던 인천에서 거주하고 있는 이원팔씨의 증언에 따르면 만약에 그때 박갑철 대장이 어화도로 가서 먹거리를 조달해 오지 않았더라면 그 직전까지 인천의 구호단체로부터 도움을 받아 오다가 차질을 빚게 된 성육원으로서는 처지가 매우 난감하게 되었을 것이며 사정이 그러하였기에 박 대장을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칭송했던 것이라고 했다.

 

평택경찰서에서 부린 난동

 

휴전 직후인 53년 9월 해병대에서는 미 해병대의 비행장(K-6)이 개설된 평택에 막사를 설치하여 경찰에서 맡고 있던 비행기지 경비업무를 관장하게 했는데, 그때 막사장 보좌관으로 임명이 된 박갑철 중위는 부임하자마자 자신에게 경례를 하지 않는 미군 위병을 미군 헌병사령관에게 보고하여 영창에 입창케 하는 한편 평택경찰서 박양수 경감을 방문하여 막사 대원들이나 경찰서원들 중에서 혹 잘못을 저지르는 자가 있더라도 서로 협력해서 수습하도록 하자고 제의하면서 특히 민족적인 수치심을 생각해서 미군 당국에 보고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당부했었는데, 문제는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 경찰서장이 미군 헌병사령관을 방문하여 해병대 대원들(대부분이 해군병원에서 갓 퇴원한 전상자들) 때문에 평택 시민들이 안심을 하고 살 수가 없으니 해병대를 철수시켜 달라고 요청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박 중위는 그 길로 칼빈 소총으로 무장한 선임하사관을 대동하여 경찰서로 진입, “경찰서장 이리 나왓”하며 총기를 난사하는 바람에 서원들이 혼비백산하는 사태가 빚어지고 말았고, 그 이튿날 아침 도경국장이 막사를 방문하자 박갑철 보좌관은 “부하 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민족적인 수치심을 느끼게 하느냐”하고 호통을 치자 도경국장은 무조건 사과를 했다고 한다.

 

부정을 용납지 않는 기질

 

예편을 후(68년) 박갑철씨는 해병대사령관 강기천 장군과 공화당 원내총무 김용태 의원의 각별한 배려로 이동준씨가 대표이사 회장으로 있는 인천제철의 부장급 간부사원으로 보직을 받게 되었는데 약 한 달 전에 이 회사를 인수하게 된 이동준 회장은 박갑철씨를 처음으로 접견한 자리에서 7,000명의 사원들 모두가 도둑놈들이니 경비실을 맡아 부정 척결에 앞장서 달라고 간곡히 당부했다고 하며 그러한 말을 들은 박 실장은 부임 첫날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 ‘오라잇’하면 차떼기로 싣고 나갔다는 그 시절 경비실 직원들을 철저히 감독하는 가운데 직접 정문에 버티고 서서 단속에 임한 결과 퇴근할 때 점퍼나 코드 속에 각종 물품을 숨겨서 나가는 자들이 비일비재하여 일일이 적발을 했고, 가방 속에 넣어온 돈뭉치를 슬며시 건네며 “눈 좀 감아 주시지요”하는 자가 있기에 “이 새끼 쥐약을 먹여 나를 잡겠다는 건가?!”하고 호통을 치며 그 돈뭉치로 그 자의 얼굴을 가격했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박갑철씨는 자신의 임기 중(약 2년간) 철저한 단속으로 부사장을 포함한 7명의 간부급 사원을 형사처벌을 받게 하는 등 부정 척결을 위해 큰 공을 세웠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경비실장으로 있을 때 박갑철씨는 인천제철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따뜻한 위로의 인사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박 대통령이 박갑철씨를 알게 된 것은 해방 직후 북경에서 광복군 평진대대(대대장은 신현준, 중대장은 박정희)를 편성할 때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며, 박갑철씨가 행정자치부로부터 발급받은 일본군 복무기록(총독부 시절에 작성한 전시 명부)을 보니 하남(북지나) 작전에서 목과 어깨부위에 관통상을 입고 여러 지역의 병참병원을 전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본서에 수록된 허귀송씨의 미망인 김희정씨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북경에 소재하는 여고(일본인학교) 4학년 졸업반 학생으로서 간호정신대 요원이 되어 의료봉사 활동을 할 때 그 북경 병참병원에 입원해 있는 일본군의 고급하사관인 박갑철씨를 만나게 되었고, 해방 후 진해에서 재회를 했었다고 한다.

 

한편 박갑철씨가 불교신도들로부터 호법신장과도 같은 사람이란 칭송의 말을 듣게 된 것은 그가 인천제철에서 물러난 뒤(70년대) 조계종 내의 사찰들인 조계사와 개운사 간에 세상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분쟁이 벌어졌을 때 그 현장에 뛰어들어 “야 이 새끼들아 중생을 제도해야할 불도(佛徒)들이 세속적인 물욕과 권력에 눈이 어두워 이런 추태를 빚어서야 되겠느냐”고 호통을 치며 정화에 앞장섰기 때문이었다고 하며, 박갑철씨의 불명(佛名)은 성엄(惺俺)이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3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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