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戰爭期 - 전시에 웅변학원에 다닌 이판개 통신감
해병대에서 일찍이 통신장교로 복무했던 많은 장교들 중에서 통신감을 역임한 이판개(李判凱) 중령만큼 많은 화제를 남겼고 또 전시 하의 어려운 여건 하에서 통신병 양성을 위해 공헌했던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해방 후 일본해군 경력자(경비병과, 상등병)로서 46년 12월 해안경비대대 입대하여 소정의 교육과정을 거쳐 상사의 계급으로 통제부 통신대에 발령을 받았던 이판개씨는 그 후(48년) 해사 특교대(2차) 수료와 동시 소위로 임관, 해병대사령부가 창설될 때 통신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통신대장 부임 초기 그는 신현준 사령관으로부터 이런 꾸중을 들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즉 창설 초기 이판개 소위가 덕산 비행장에 있는 전선주에 전선을 가설하기 위해 군복을 입고 올라가 있는 것을 목격한 신 사령은 “작업복을 입지 않고 왜 군복을 입고 작업을 하는 거야!”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즉시 내려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재차 올라갔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을 기억하고 있는 창설기 때의 노병들은 지지리도 가난했던 그 창설기에 이판개 소위가 장교가 되었다고 보란 듯이 으스대다가 그와 같은 꾸중을 당한 것이라고 했다.
한편 해병대가 제주도로 이동하기 전 포항기지사령부 작전참모로 전속이 되었던 이판개 중위는 그곳에서 6.25를 맞게 되었는데 특히 그 포항기지 작전참모로 근무하는 동안 이판개 중위는 이러한 일을 겪었었다고 필자에게 직접 증언한 적이 있었다.
즉 7월 중순경 해군육전대장으로 임명이 된 강기천 소령(해군신병교육대장)이 잠정적인 전투부대(대대규모)로 개편한 병력을 이끌고 포항기지사령부(사령관 남상휘 중령)에 도착함에 따라 묵호경비부로부터 철수한 병력을 차출하여 꼬박 밤을 새우며 부대(육전대) 편성을 도왔고, 그 중의 1개 소대병력은 영덕으로 파견하여 육군3사단을 지원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자 포항기지에서는 반공청년들을 규합하여 유사시에 대비한 횃불에 의한 신호조직체계를 갖추기 위해 여러 차례 훈련을 실시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비상 신호체계를 당시의 국방장관(이기붕)에게 보여 드리기 위해 남상휘 사령관은 이화여대 출신인 자기 부인을 내세워 이대 동문인 장관 부인(박마리아 여사)에게 청을 넣어 장관을 초청하려고 했으나 대통령을 측근에서 모시고 있는 장관이 자리를 뜰 수가 없어 부득불 박마리아 여사가 장관을 대신하여 포항기지사령부를 방문하여 밤중에 구룡포로 부터 포항 시내의 축항에 이르는 길목 요소요소에서 방공청년들이 릴레이식으로 횃불을 점화하여 쳐든 그 장관을 관망토록 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말과 함께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였었다. 즉 9.28 후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을 개시했을 때 남상휘 중령이 해군의 원산 전진기지사령관으로 임명이 된 것은 바로 그러한 공작이 주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제1연대 통신주임장교 시절
이판개 중위가 이두찬 중위의 후임으로 제1연대 통신대장으로 전속이 된 것은 화천지구의 전투 전후인 51년 4월경 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라서 이판개 중위는 그 후에 치르게 된 도솔산지구 전투와 924고지 전투 때 임시대위의 계급장을 단 연대 통신주임장교로서 각 대대간의 유선통신망 가설을 지휘하느라 많은 고생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특히 도솔산지구 탈환작전 때 연대본부 통신대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유선을 가설하고 있던 김선호 상사를 비롯한 수명의 대원이 잠시 세차게 내리는 비를 피해 산모퉁이에 있는 빈 초가집에 들어갔다가 그 근처에 숨어 있던 적 패잔병들의 따발총 공격을 받아 경상을 입고 극적으로 피신한 남세우 일병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이 전원 사살을 당하는 참변이 일어나 큰 슬픔을 자아내게 했었다.
소년통신병 양성
한편 해병제1연대가 장단지구로 이동(52. 3.)한 후 용두산 사령부로 전속되자마자 소년통신병교육대장으로 임명되어(당시의 통신감은 최덕조 대위) 영도 태종대 뒤편 야산 중턱에 가설한 6동의 대형 야전천막에 피교육자들을 수용하여 사령부 통신감실에서 확보해 놓은 교관요원으로 교육을 실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때 그 교육대에서 1차적으로(5월 입대) 교육을 받은 피교육자들은 사령부에서 공모를 통해 확보한 3개 구대로 편성된 약 50명의 신병훈련을 받지 않은 청소년(17~18세)들이었고, 12월 8일에 추가로 입대한 피교육자들은 신병훈련을 마친 소년전차병들 중의 일부(절반가량, 약50명)였다. 한편 이들 피교육자들은 사령부의 방침에 따라 53년 2월 통신교육대와 함께 진해(경화동 3층 벽돌집)로 이동, 그곳에서 통신교육대가 통신학교로 승격된 후인 4월 18일 영도의 통신교육대에서 교육을 받은 후 진해에서 신병훈련을 받고 대기 중에 있던 약 60명의 소년통신병 및 통신학교에서 민간인 통신기술자들을 모집하여 통신하사관으로 양성한 피교육자들의 합동수료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렀는데, 여기에서 특별히 남겨 두고자 하는 첫 번째 얘기는 영도에서 발족시킨 그 통신교육대 교관들 중에는 특히 삼각함수를 가르친 이진영 중위와 같은 유능한 인재도 있었고, 구대장으로서 무선통신을 가르친 북조선 중앙통신사 출신의 B모 하사관(후일 장교로 임관)과 같은 뛰어난 기술자도 있었다는 사실이며, 두 번째 화제는 영도에 소년통신병 교육대를 개설할 즈음에 틈을 내어 웅변학원에 다니고 있던 이판개 대위가 교육대장 훈시시간에 의젓한 모습으로 강단에 등단하여 굵직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에~”하고 말문을 열어 피교육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으나 그 다음 순간 그만 말문이 막혀 ‘그야말로’라는 말을 연발하는 바람에 첫 강론을 그르치고 말았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념이 강했던 그는 칠전팔기를 하듯 ‘그야말로’를 연발하면서도 강론에 열중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포로교환 때의 일화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으나 53년 4월 18일 통신학교에서 합동수료식이 거행되기 전(후임교장 최덕조 대위) 제1전투단 통신중대장으로 전속이 되었던 이판개 대위는 휴전(53. 7. 27) 후 포로교환이 실시될 때(53년 8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남겼다.
즉 포로교환 때 해병제1전투단 본부가 위치하고 있던 지점(파주군 문산읍 운천리) 근처의 경의선 철로 변에 하차하여 엠블란스에 분승하여 판문점(경유 북송)으로 출발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포로수용소를 떠날 때 입고 왔던 미제 신품 군복(유엔군 측에서 제공한)과 신발(미제 농구화) 등을 죄다 벗어 던져버리고 그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입었던 옷과 신발을 착용하고서는 반미 구호를 외치며 소란을 피우자(특히 광목천에 ‘양키 고우 홈’이란 글자를 멘스의 피로 써서 플레카드처럼 쳐든 여군포로들의 극성이 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음) 전투단 부단장 오명복 중령이 통신중대장 이판개 대위에게 욕설은 퍼붓지 말고 좋은 말로 타일러 보라고 지시함에 따라 특별히 확성기장치를 해놓고서 “여러분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셔야 되겠습니까…”하고 굵직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문을 열자 소란을 피우고 있던 포로들이 비록 일시적인 현상이긴 했지만 마치 그 어떤 마력에 걸리듯 조용해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또 그가 한 짤막한 연설조의 말 가운데는 ‘그야말로’라는 말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진해에서 출마했으나 낙선
그 후 중령의 계급으로 통신감을 역임했던 이판개씨는 자신의 웅변실력과 두둑한 배짱을 주무기로 하여 정계에 진출할 뜻을 품고 4.19혁명이 일어난 그 해(60년)에 시행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그 해 9월 1일 중령의 계급으로 예편하여 입후보자들이 난립한 그 선거판에 뛰어들었으나 고배를 마시고 말았었다.
그 후 해우인력개발공사를 운영하기도 했고, 조그마한 오퍼상을 경영하기도 했던 그는 7~8년 전 지병으로 타계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3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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