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戰爭期 - 2006년 2월 2일에 작고한 불운의 장애인 권병주 소령
2중대 2소대장
1928년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 서중학교를 거쳐 월남(8.15후) 미 군정청을 거쳐 미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중 6.25전쟁의 발발로 해병대 간부후보생 2기로 입대 임관함과 동시에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의 모슬포부대의 26중대(그 후 23중대로 개칭된 특별중대) 제2소대장으로 임명되었던 그는 9월 1일 해병대의 전 병력이 제주항을 떠나 부산으로 이동할 때 다음과 같은 임무를 부여받았다.
즉 진해항에 도착하는 즉시 1소대장 이동용, 3소대장 유국태 소위와 함께 진해에서 통영으로 이송할 22중대를 통영부두까지 인솔해 가는 임무를 수행하는 즉시 진해로 돌아와 9월 10일까지 경화동에 있는 옛 일본군 건물(3층 벽돌건물)에 수용된 특별25중대(해병4기 학도병들)와 경화초등학교에 수용된 해병 4기 여군들에 대한 단기 기초훈련을 실시했는데, 여군 교관을 담당하기 전 1소대장 이동용 소위는 한 마디로 “난 안 해”라고 했고, 3소대장 유국태 소위도 “내가 어떻게…”하며 난색을 표명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권 소위 자신이 맡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9월 10일 권 소위는 자신이 맡았던 교관 임무를 여군 인솔 장교인 배소재 소위(해군 간호장교 1기)에게 인계했다고 한다(해병제4기 여군과 관련된 총체적인 이야기는 본서의 부록에 수록된 ‘해병4기 여군전우회’편을 참고하시기 바람).
한편 9월 11일 선편으로 통영으로 이동한 특별25중대 김성은 부대에 편입되면서 23중대로 호칭이 변경되고 통영기습상륙전을 수행했던 김성은 부대는 역전의 중대인 2․3중대를 명령에 따라 부산(1대대)으로 보내는 대신 제주도에서 신편한 22․23․25중대로 부대를 정비하여 9월 21일 통영지구에 대한 방어임무를 통제부 방위대(1대대)에 인계하고 인천으로 출항하게 되었는데, 김성은 부대가 통제부 방위대와 진지를 교대하기 하루 전날 뜻밖에도 통영으로 가 권병주 소위를 찾아왔던 여군 교관 배소재 소위는 권 소위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던지 여관에 가서 동침을 하자고 했고 그 요구를 권 소위가 불응하자 배 소위는 호주머니 속의 금반지를 꺼내 권 소위의 휠자켓 주머니 속에 넣어 주며 권 소위를 와락 껴안았다고 한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배 소위와 헤어진 권 소위는 왠지 배 소위와의 만남이 불길하게 여겨져 그 금반지를 꺼내 돌팔매를 치듯 바다 쪽으로 던져 버렸다고 한다.
불운의 금곡전투
9월 23일 통영항을 출항했던 김성은 부대는 25일 인천에 상륙, 26일 수색에서 독립5대대로 개편되어 수도탈환작전에 투입이 되었고, 서울이 수복(9.28)되자 독립5대대는 북한강지구 차단작전에 투입이 되었는데, 그 작전기간 중 10월 1일 금곡지구 전투에 참가했던 23중대 2소대장 권병주 소위는 불운하게도 척추에 중상을 입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급히 을지로 2가에 위치하고 있는 백인제병원으로 후송이 되었던 권 소위는 54년 청량리 해군병원에서 퇴원을 할 때까지 진해 해군병원과 부산에 있는 해군병원 및 청량리 해군병원을 전전하며 사지를 마비시킨 무서운 병마와 싸워야만 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수술에 대한 기대감이 무산되자 그는 절망감에 빠졌던 나머지 여러 차례 자살을 하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으나 결국은 자신의 신앙심에 의지하여 불굴의 투지로 자활의 길을 걷게 된 것이라고 한다.
즉 59년 오랜 병원생활을 끝내고 소령의 계급으로 퇴역했던 그는 약 5년간 마장동에서 고철사업으로 기반을 닦은 뒤 68년 정부의 지원으로 반월공단에 입주하여 아연 생산 공장을 운영하다가 공해 문제로 그 공장을 기흥(용인시)으로 옮겨 상호를 중앙금속으로 변경하여 약 10년 간 국제상사와 연합철강에 납품하는 큰 회사로 발전시킴으로써 기적적인 장애인이라는 말을 듣기까지 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후 기술자들의 배신행위와 경영난 악화 등으로 도산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라고 한다.
62년에 맞은 배우자
안산에서 아연공장을 가동 중에 있던 62년 권병주 소령은 서대문 냉천동 천주교회에서 유 도밍고 신부의 주례로 자신보다 12세 연상인 최복순 여사와 혼배성사를 치르게 됨으로써 한없이 소중한 여생의 동반자를 얻게 되었는데. 정만수, 강복구씨 등 중매를 추진했던 동기생들이 1.4후퇴 때 수원 도립병원 간호부장의 신분으로 해군 간호장교(3기)로 입대, 중위의 계급으로 임관하여 권병주 소위가 입원 중인 진해 해군병원 10병동 간호장교로 임명된 후 56년 대위의 계급으로 예편한 그 12세 연상의 최복순씨(1916년생. 세례명 루시아)를 적합한 대상자로 물색하게 되었던 것은 나이차가 그렇듯이 이모나 큰 누이와 같은 따뜻한 마음으로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는 사지가 마비된 권 소령을 돌봐 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필자에게 이러한 증언을 한 강복구씨(퇴역 대령, 전 해병전우회 중앙회 총재)의 말에 따르면 그 중매를 성사시키려는 일념으로 그 두 사람(권소령과 최복순씨)가 해군병원에 있을 때 통제부 군종신부로 있었던 김동환 신부(김수환 추기경의 친형)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안근식 목사와 옛 전우들
2006년 2월 2일 천호동 보훈병원에서 78세의 나이로 운명한 권병주씨, 50여 년간을 휠체어에 의지하여 무서운 병고에 시달려 왔던 그에게는 이러한 후배 전우들이 있었다고 한다.
즉 진해병원 10병동에 입원해 있는 동안 그는 그 병동(장교환자 수용병동)을 찾아와 인사를 하는 부상 환자들에게 동병상린의 정으로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기도 했고 그들의 청에 따라 상당기간 동안 영어 회화 공부를 지도해 주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 때 장단지구 전투에서 입은 중상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당해 목발을 짚고 있던 안근식 해병(후일 목사가 됨)은 그로부터 40여 년 후(99년 4월) 권 소령이 병세가 악화되어 천호동 보훈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7년 후 그 병원에 운명할 때까지 매주 한 차례 만사를 제쳐놓고 병문안을 했고, 또 장단지구에서 흉부 관통상을 입고 진해병원에 입원했던 한진순 해병(해병5기)은 권 소령이 철제 휠체어를 장만하게 될때까지 상당기간 동안 권 소령을 죽제(대나무)휠체어에 태워 서울 시가지의 비포장도로에 누런 먼지를 덮어쓴 채 한쪽 발을 절며 동분서주 했고, 또 그 후 오랫동안 권 선배를 위해 온갖 잡심부름을 마다않고 다 했다고 하니 이런 후배들을 고인은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언젠가 필자가 천호동 보훈병원을 방문했을 때 고인은 진해병원과 보훈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뜻밖에 병상을 찾아 와준 반가운 옛 전우들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들은 문창해 최형곤씨를 비롯한 옛 23중대 대원들과 여 해병 문인순씨 등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3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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