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戰爭期 - 전시하의 섹스스토리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의 하나인 섹스 문제는 전시하라고 해서 금기시 되거나 단절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전시 하의 전후방 어디서든 이와 관련된 화제는 있기 마련이었다.
51년 7월 중순경 도솔산지구 탈환작전을 마친 해병1연대가 홍천(洪川) 강변으로 이동하여 약 40일 간 휴식과 재정비를 취하고 있을 때였다.
1대대 3중대 3소대장 K 모 소위는 기혼자인 소대 선임하사관으로부터 전쟁터에 나온 대원들이 처녀 손 한 번 잡아 보고 죽는 것이 원이라는 말을 듣고 언제 죽게 될지 모를 저 젊디젊은 장정들에게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인 섹스를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 준다면 사기 진작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한탄 하에 바로 그 무렵 10일에 한 번 정도 무 배추 등 부식물을 조달하기 위해 인천(仁川) 지구로 내왕하고 있던 대대 보급관에게 필요한 경비를 쥐어 주며 트럭에 부식물을 싣고 돌아올 때 2명의 윤락녀를 주선하여 은밀히 데려와 달라는 부탁을 했고, 부탁을 받은 보급관 K 모 소위는 동행하게 된 보급반 하사관을 시켜 다음과 같은 요령으로 그 부탁을 들어 주었다.
즉 인천에서 부식물을 조달한 보급관은 지천이란 말이 적절한 표현이 되겠지만 돈만 주면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2명의 윤락녀를 물색한 다음 군속으로 위장시키기 위해 너절한 군복을 입혀 그들을 탈 없이 전방지역에 있는 한미합동 헌병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도록 뚜껑을 도려내고 둘레에 여러 개의 숨통 구멍을 뚫은 2개의 빈 드럼통을 덮어 씌워 부식물과 함께 홍천 강변의 부대 집결지까지 싣고 와 날이 저문 뒤 1중대 3소대의 집결지에서 인계를 했고, 인수를 한 소대장 K 소위는 그날 밤 소대 선임하사관에게 지시하여 개인 천막이 가설되어 있는 집결지 내의 은밀한 장소에서 소대원들로 하여금 몽달귀신을 면할 수 있게 하는 섹스파티를 열게 했고, 그러한 체험을 한 소대원들은 그 후 924고지 탈환작전 때 더욱 용감하게 잘 싸웠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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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년 3월 13일 밤 김포 대안(對岸)의 강변마을(개풍군)을 정찰하기 위해 중형 어선을 타고 조강리(照江里)의 도선장을 출발했던 5대대 21중대의 정찰대(15명)가 강을 건너갔던 바로 그 날 밤 개성(開城)지구로부터 김포지구로 남하하기 위해 피란길에 올랐던 피난민들과 원주민들의 일부가 머물고 있는 그 강변마을에서 정찰대의 핵심 간부들인 5명의 분대장급 하사관들이 5명의 여자를 집단적으로 강간한 것이 적지를 넘나들고 있는 우군의 첩자들에 의해 대대본부에 제보가 됨으로써 해이된 군기를 일벌백계로 다스리려고 한 대대장의 엄명으로 헌병대에서는 현장 검증과 피해자 심문 조서까지 꾸며 군법회의에 회부한 끝에 그 5명의 하사관들 중 현장 검증을 하던 날 그 현장에 없어 피해자 심문을 받지 못한 그 피해자를 강간한 가해자를 제외한 4명의 하사관들이 공개 처형(총살형)을 당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는데, 전시 하의 적지에서 발생한 이와 같은 집단적인 강간사건은 해병대로서는 전무후무한 일로 치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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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1연대의 924고지 방어기간(51. 9. 4~52. 3. 15) 중 모 대대 S-2보좌관의 전령으로 근무했던 J 모 이등병은 그해(51년) 늦가을 어느 날 여자 생각이 간절해진 보좌관 L 모 소위의 지시에 따라 어느 날 자신이 보좌관을 수행하여 지형정찰을 할 때 발견한 산골짜기의 외진 움막집에 숨어 살고 있는 30대의 꾀재재한 과부를 보좌관의 벙커 근처까지 몰래 데리고 가서 은밀한 곳에 가설한 개인천막 속에서 보좌관과 관계를 맺도록 하고 정사가 끝날 때까지 자신은 바깥에서 보초를 섰다고 했고 또 정사가 끝난 뒤에는 그 여자를 움막집까지 데려다 주고 왔다고 했는데, 이와 같은 비화를 직접 나에게 발설했던 그 왕년의 대대 S-2보좌관의 전령 J 모씨는 입대 전 기혼자로서 법원의 서기로 재직하던 중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부득불 징집연령에 해당되지 않는데도 나이를 속여 입대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필자로 하여금 폭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다음과 같은 비화도 덧붙여 실토했다.
즉 그의 말에 따르면 난리통에 헤어진 아내 생각도 났지만 왈칵 치미는 욕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 그 여자를 찾아내기가 무섭게 겁탈을 한 다음 보좌관에게로 데려 간 것이라고 했고, 또한 그 여자를 움막집에 데려다 주고서도 또 한 차례 욕정을 채웠다고 하면서 그날 밤 보좌관도 그런 느낌을 처음부터 가졌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짐작까지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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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5월 초순경 서부전선(장단지구)에 배치되어 있던 해병제1전투단이 미 25사단 27연대에 진지를 인계하고 미 1군단의 예비진지가 있는 연천지구의 ‘캠프인디언 힐’로 이동하여 약 2개월 간 휴식과 재정비를 취했는데, 그 기간 중 전투단 본부에서는 처음으로 장병들의 사기앙양을 도모하기 위한 단체(중대 단위) 외출 계획을 세워 추진한 바 있었다.
매일 아침 인솔 책임장교의 휴가장병들은 오전 10시 서울 역전 양동에 설치된 집결지를 겸한 임시연락소에서 하차하여 오후 2시경 개인별로 용무를 마치고 그 곳에 집결하여 당일로 귀대했는데, 여기에 소개할 특별한 화제는 사병위안소에 출입하지 않고 장교위안소에 들러 말썽을 빚은 해병대 하사관들에 관한 것이다.
그 당시 서울 시내에는 여러 곳에 휴가장병들을 위해 설치해 놓은 장교위안소와 사병위안소가 있었는데 어느 날 오후 해병대의 모 하사관이 장교위안소에 출입하자 완장을 두른 위안소의 당번이 “이 곳은 사병위안소가 아니고 장교위안소에요”라고 하자 체구가 크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그 고급하사관의 입에서는 대뜸 “네년은 X에도 금텟줄을 둘렀느냐?!”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고, 그 일갈에 기가 꺾인 당번이 “지금은 위안부도 없으니 돌아가 주세요”라고 했다.
그러자 그 하사관은 “네년은 여자가 아니고 절구통이란 말인가?”고 했고 그 말에 당번이 “월경이 있어서 완장을 차고 당직 근무를 서고 있는 중”이라고 하자 하사관은 “도솔산 전투 때 우리는 핏물을 마셔가며 싸웠는데 그 따위 월경이 문젠가?”하며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바람에 그 당번은 골방으로 끌려가 녹초가 되도록 곤욕을 치렀고, 그런 변을 당한 그 당번은 얼마나 분통이 터졌던지 욕을 보이고 밖으로 나가는 그 하사관의 뒷통수에 대고“저런 자식이 어찌 해병대야 개병대지”라는 말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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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42중대(동해부대의 전신)의 초대 부대장 S 모 중위는 역대 부대장들 가운데 유일하게 해구신을 먹어본 행운의 부대장으로 기억되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획득한 그 해구신은 51년 여름철 50대의 늙수그레한 어부가 여도(麗島) 북방 3~4키로 지점에 있는 웅도(熊島) 근처의 해상에 쳐놓은 그물에 걸려 잡힌 물개의 신이었는데, 뜻밖에 횡재를 한 그 어부가 한 말에 따르면 자기가 알고 있는 한 물개의 수컷은 그물에 걸려 잡힌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어부에게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 그 신을 취득하게 된 S 부대장은 천하의 영약으로 알려진 그 신에 대한 기대감이 얼마나 크고 조급증이 났던지 면도날로 끄트머리 부위를 살짝 베어 양주를 마시며 질근질근 씹어 먹고 나머지 부분은 말리기 위해 실을 매어 천막 기둥에 매달아 놓았는데 2~3일 후 누군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절취해 가는 바람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나 그런 일로 수사요원을 동원할 수도 없고 해서 속을 태우고 있던 중 뜻밖에도 그 신의 효능에 은근히 발동하는 바람에 객고(客苦)를 치르기 위해 그 전에 세워 놓았던 자신의 휴가 일정을 앞당겨 부산으로 내려가 수일 간 엔조이를 하는 것으로 만족을 했다고 하는 데 덧붙여 둘 화제는 S 부대장이 속으로 해구신의 절취병으로 의심을 했던 사람에 관한 것이다.
그 피의자는 부대장의 벙커를 무상출입하며 부대장의 영어 회화공부를 도와주고 있던 전직 모 여고의 영어교사(윤선생)였다고 하는데 S 부대장이 그를 의심하게 된 것은 자신이 휴가를 다녀오는 사이에 평소에는 그런 적이 없던 그가 피난민촌에 있는 어느 과부집을 번질나게 드나드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의 제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런 제보가 있었지만 결국 S 부대장은 그런 일로 그를 멀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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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전 해병대의 도서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어느 섬에서는 휴전 전 사령부에서 파견한 일선장병 위문단(쇼단)이 계획된 공연을 마치고 선편관계로 약 10일 간 그 섬에 머물고 있는 동안 다음과 같은 사고가 발생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그 쇼단에 소속된 야한 의상을 걸친 여자 가수들과 댄서(무희)들은 윤락생활을 일삼는 여자들이었는데, 어느 날 밤 한 댄서와 관계를 맺은 소대장이 그 여자를 껴안고 곤히 잠들어 있던 중 같은 벙커 속에 있는 전령의 침대로 빠져 나간 댄서가 소대장의 전령과 한 덩어리가 되어 한창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을 소대장이 감지하고 벌떡 일어나자마자 “이 새끼기가!”하며 여자를 끌어안고 있는 전령의 뒷통수를 주먹으로 가격하자 분노를 참지 못하게 된 전령이 총기를 난사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끔찍한 변이 일어날 뻔 했다고 하는데, 만약에 그러한 일로 살인사건이라도 벌어졌다고 한다면 일선지구에서 섹스 문제로 오점을 남긴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치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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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장교들 중에는 이런 인간성을 지닌 사람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즉 출장용무로 전방부대에서 후방부대(부산사령부)로 내려가게 된 어느 대대의 인사장교 P 중위는 피난민이 들끓는 전시 하의 임시수도 부산에서 어렵게 여인숙 방 하나를 구해 함께 동행한 전령과 동침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여인숙에 진을 치고 있던 윤략녀들의 극성스런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어 여자 하나를 구해 욕정을 채우기로 작심을 하고 결국 전령의 처지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그는 관계를 맺게 된 여자에게 약간의 돈을 더 쥐어 주며 자기가 먼저 일을 치른 다음 전령도 한 번 재미를 보게 해 달라고 당부를 함으로써 자기가 일을 치르는 동안에는 전령이 밖에서 기다리고 전령이 일을 치를 때는 자기가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며 기다렸다고 하는데, 필자에게 이러한 얘기를 발설한 그 장본인(왕년의 그 P 모 중위의 전령) M 씨의 말처럼 6.25전쟁 때 직속상관으로부터 그와 같은 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사람은 달리 없었을지도 모를 만큼 드물 것이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3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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