越南戰 - 해병제1독립공병중대장 역임한 박동규 중령
월남전에 참가했던 해병대 출신 장교들 중에서 전투부대(청룡부대)의 파월에 앞서 파월된 비둘기부대 소속 해병제1독립공병중대장 박동규(朴東圭) 소령만큼 월남 파병 때 국내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현란한 매스컴의 각광을 받은 장교는 없었을 것이며, 또한 비둘기부대로 명명(命名)된 주월한국군사원조단의 실체는 17개 건설공병중대로 편성된 건설공병단인데 그 17개 공병중대(육군 16, 해병대 1.) 가운데 박동규 소령이 지휘한 해병제일독립공병중대 만큼 월남에서 자랑스러운 화제를 남긴 공병중대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그처럼 명성을 떨친 박동규 소령은 세상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기 망정이지 만약에 그 사실이 보도가 되었더라면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을 ‘현리 난동사건’의 주역으로 간주되고 있는 화제의 인물이기도 하다.
전남 목포 출신(1931년)으로 목포고등학교를 거쳐 해간12기로 임관(53.5)했던 박동규 소위는 임관과 동시에 연천지구에서 휴식과 재정비를 취하고 있는 제1전투단 소속 5대대 2중대 2소대장으로 임명되어 근무를 하던 중(7.12) 전투단이 장단지구 전선으로 복귀함에 따라 장단지구에서 휴전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휴전을 맡기 전 그는 7.27 오전 10시를 기해서 일선 소대에 배포된 요약된 휴전협정문을 소대원들에게 낭독하여 알려 준 다음 그 날 밤 10시(휴전발효 시작)를 기해 M1소총에 예광탄을 장진하여 역사적인 사격 정지신호탄을 발사했는데, 그 당시 장단지구 전선에는 40명의 해간 12기 신임 소대장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휴전 후 육군공병학교와 미 육군공병학교 고등군사반 과정을 차례로 거쳐 해안대대의 작전참모를 역임했던 박 소령은 65년 2월 초 합참에서 비둘기부대를 편성할 때 해병제1독립공병중대장으로 임명되었었는데, 바로 그 보직이 그로 하여금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창설이 된 비둘기부대(장, 조문환 준장. 육군)는 각 부대(해병제1독립공병중대는 해병제1사단)에서 실시한 기본교육 외에 경기도 가평군 현리에서 현지(월남)작전을 가상한 약 2주 간의 종합야외훈련을 실시했다.
그리고 그 훈련기간 중인 2월(65년) 9일 비둘기부대 장병들은 서울운동장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군부요인 및 수많은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거행된 국민환송대회에 참가했었는데, 그 행사장에서 비둘기 부대의 17개 건설공병중대 중 유일한 공병중대인 해병제1독립공병중대의 지휘관인 박동규 소령은 비둘기부대의 그 어느 누구 보다고 돋보이는 존재로 부각되고 있었다.
한편 2주 간의 종합야외훈련이 끝나던 날 비둘기부대 본부에서는 부대장 조문환 준장의 각별한 배려로 부대장의 임석 하에 소대장급 이상의 전 장교가 참석한 가운데 불고기 파티가 열렸는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고 있던 그 파티장에서 일어난, 하마터면 중대한 문제가 될 뻔했던 그 나동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는 본서의 12대사건스토리 제7화 ‘해병제1독립공병중대의 현리난동사건’에 수록되어 있다.
천만다행으로 아슬아슬하게 수습이 된 그 현리난동사건이 발생한 후 해병제1독립공병중대 장병들은 명령에 의해 일단 모군기지(해병제1사단)로 돌아와 출국준비를 한 후 3월 8일 경 인천에서 비둘기부대 본진에 합류하여 3월 10일 월남으로 떠났는데, 그들은 특히 모군기지를 떠나던 날 그들의 가족과 모군기지 장병들로부터 뜨거운 환송을 받았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중대장 박동규 소령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눈부신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었다.
비둘기부대가 월남에 도착한 날짜는 3월 16일이었으며, 명령에 따라 사이공 북방 22키로 지점에 있는 ‘디안’에 주둔하게 된 해병제1독립공병중대는 그로부터 약 1년 간 약 3키로에 달하는 밀림지 제거작전과 도로개설 작업을 추진하는 동안 다음과 같은 화제를 남겼다.
즉 주둔기지를 건설할 때 중대장은 외곽진지는 빈 맥주깡통과 대인지뢰. 유자철조망 및 깊이가 한 길이 넘는 수로와 죽창 등으로 구축하고 유개물로 된 내부진지(사격진지)는 81밀리 포탄에도 끄떡없을 만큼 견고하게, 그리고 사격진지로부터 숙영지까지의 기동로는 땅굴로 연결시켜 베트콩의 기습을 번번이 격퇴시킴으로써 육군공병부대는 물론 그 부근의 월남군과 여러 기관에까지 소문이 나 매일같이 견학자들이 쇄도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또한 그 기간 중(65.4.15) 박 소령은 명령에 따라 1개 분대의 대원을 주월한국대사관에 파견하여 경비임무를 수행하게 했는데, 그 대원들을 얼마나 철저히 훈련시켜 파견했던지 그들의 동작을 지켜본 신상철 대사로 하여금 ‘진짜 군인을 보았다’는 찬사를 토하게 했고, 또한 대사관 앞을 지나가던 월남인과 사이공시에서 거주하는 외국인들로부터서도 찬사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해병공병중대에서 그러한 임무를 부여받게 된 것은 4월 1일 비둘기부대의 기공식에 참석했던 김성은 국방장관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란 설이 있었다.
한편 밀림지 제거작전 때 공병중대에서는 길이가 2미터 30센티나 되고 지름이 16센티나 되는 비단 구렁이(콩나)를 잡아 해군LST 편으로 후송하여 창경원으로 보냈으나 창경원에 둥지를 튼 그 첫날밤에 그 구렁이가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서울 시내를 발칵 뒤집히게 했었다.
그러나 항간에선 그 어떤 권력자가 그 구렁이로 정력을 보(補)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월남에서 실종소식을 전해 들은 그 콩나의 고향사람들은 약 150년 간이나 밀림 속에서 군림했던 그 신화적인 동물이 언젠가는 대륙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파월 전후에 많은 화제를 남긴 해병제1독립공병중대는 66년 3월 28일 미군 수송기 편으로 대구공항에 도착, 강기천 사단장에게 귀국신고를 했고, 그로부터 10일 후 사단본부에서 거행된 제일독립공병중대의 해체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해체식이 끝난 후 박동규 소령은 67년 2월 그가 소령의 계급으로 예편할 때까지 약 1년 간 사단특수교육대(장, 이근식 중령)의 특수교장건설대장으로 발령받아 열과 성을 다해 소임을 완수했는데, 특히 산악교장 내의 산꼭대기에 세워놓은 여러개의 전신주 위에 목재로 만든 헬기를 올려놓고 그 헬기에서 뛰어 내리는 훈련을 시켰던 그 헬기 교장은 그의 정성과 땀이 가장 많이 배어 있는 교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한편 월남에서 귀국한 후 박동규 소령은 월남에 진출한 한진상사 조중훈 사장의 각별한 배려로 1차로 귀국 제대한 공병중대 대원들 중 희망자 전원을 주월 한진상사 계열업체에 취직시켜 화제를 모은 바 있었으며, 예편과 동시 조중훈 사장의 요청으로 월남으로 진출하여 약 2년 간 한진상사 노무자들에 대한 통솔과 현장관리업무를 관장했던 그는 귀국 후 한진상사의 해운관리과장, 대한항공 스튜디어스관리부장, 기내식사관리부장, 제동목장관리부장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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