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명인·기인

전 후 - OB축구회장 역임한 박건섭 대령

머린코341(mc341) 2016. 8. 6. 07:16

전 후 - OB축구회장 역임한 박건섭 대령

 
 국가대표선수를 지낸 수많은 해병대 출신 축구인들 중 가장 먼저 국가대표선수가 된 사람은 박건섭(朴建燮)대령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때(1930년대) 중동(中東)중학교 ‘짱구’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그는 해병대1연대의 화천(華川)지구 전투 때 3대대 11중대장으로서 중공군과 백병전을 벌려 그 중공군을 쓰러뜨린 무용담을 남겼고, 휴전 후에 창단 된 해병대 축구부의 창단 멤버의 일원으로서 해병대 축구의 눈부신 발전에 기여했던 그는 또한, 후일 한국 OB축구회의 5,6,7,8대 회장을 역임한 한국축구계의 원로급 지도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1919년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태어났던 박건섭 대령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 그가 서울 중동 중학교로 진학했을 때는 ‘중동 짱구’라는 별명이 붙었을 만큼 축구선수로서의 두각을 나타내었고, 일본으로 원정한 중동 중학교 축구팀이 결승전에서 맞붙게 된 대판(大阪) 명성중학교 팀을 4:0으로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했을 때 샌터포드로서 활약했던 그는 그 4골 중의 2골을 넣게 됨으로써 그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중학생 때 축구만 하느라 학교 성적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는 부득이 진학을 포기하고 3종교사(초등학교)로 취직해 있다가 해방 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진학했으나 국대안(國大案) 관계로 연전(延專)에 진학, 신설된 연전축구단에 입단하여 활약했는데 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할 선수선발을 위해 개최된 예선전 때 연희전문학교 팀이 우승을 했는데도 연전선수들 대신 그 당시의 선배선수들이 출전하게 되자 박진섭씨는 그러한 처사에 불만을 품고 해군에 입대(해사특교대 3차)하고 말았다고 했다.

 
 한편 48년 3개월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해군소위로 임관했던 박건섭 소위는 보급장교로서 근무했던 그는, 중공군의 제1차 춘기공세가 취해졌던 51년 4월 하순경 3대대가 1대대의 철수를 엄호할 때(4.23) 어둠 속에 11중대 진지로 밀어닥친 중공군들과 백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밀짚모자를 쓴 비무장 중공군에 의해 등 뒤쪽에서 껴 안겨 생포가 될 위기에 처했으나 사생결단, 그 밀짚모자와 능선 아래로 굴러 떨어진 다음 표범 갈이 덤벼들어 반죽음이 될 때까지 그 자를 이마와 주먹파 발로 짓이겨 놓고 능선 위로 올라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후 도솔신 탈환작전에도 참가했던 그는, 924고지 탈환작전 때는 3대대 부대대장으로서 그 전투에 참가했었다.

 
 다음 이야기는 정확한 연도는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진해로 전속된 박건섭 대위가 의기(意氣) 투합(投合) 한 같은 축구선수 출신인 강영구 대위(해간1기)와 함께 해병대 장교들에게 경례를 하지 않는 해군장교들(소위, 중위급)에게 기합을 주었다는 미공개 비화이다.


 이들 두 사람이 특별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해사 출신의 초급장교들이 일선에서 돌아온 해병대 장교들에게 경의는 표하지 못할 망정 얕잡아 보는 듯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며, 그러한 느낌에 공감했던 그들은 통제부 동문 밖 양쪽에 진을 치고서는 한 사람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소위․중위 계급장을 단 해군장교들에게, 한 사람은 문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소위․중위급 장교들에게 “야 이새끼야 왜 경례를 안 해!”하고 일갈한 다음 억센 주먹으로 아구통 한 대씩을 갈긴 다음 엎드려 절받기식 거수경계를 받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런 일에 동참을 했던 강연구 대위는 그 후 해병대사령부가 부산 용두산 꼭대기의 천막촌에 자리잡고 있을 때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대회에 출전하여 동메달을 딴 한수안(韓水安) 선수(플라이급)권투선수와 서울의 명동격인 임시수도의 번화가인 광복동을 휘젓고 다니면서 불량기가 있는 자들과 마주치게 되면 닥치는 대로 일격을 가해 길바닥에 나뒹굴게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휴전 후에 창단된 해병대의 축구부는 해병대가 창설되기 전 해군 소속 축구팀 요원으로 있다가 해병대가 창설된 후 해병대로 전입한 민용식, 김용국, 박이직, 박진섭, 이학표씨 등과 해간1기로 입대한 배동혁, 이병문씨 등이 휴전 후 사령부 인사감으로 있던 민용식 소령의 제의와 적극적인 추진으로 발족된 데 이어 그 후 대부분이 국가대표 선수였던 정형식, 김동근, 최영근, 박상훈, 손수영, 심군택, 안경철, 이승만씨 등 쟁쟁한 현역선수들로 보강하게 됨으로써 제4회 대통령배 축구대회와 제4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비롯해서 여러 차례의 국내대회에서 무적의 강팀으로 군림했는데, 그 때 왕년의 ‘중동 짱구’박건섭 대령도 그 맴버의 일원으로 활약했었다.

 
 한편 63년 대령의 계급으로 예편할 때까지 대대장(휴전 후) 서해도서부대장(백령도) 국방부해군보좌관. 보급정비단 참모장 겸 부단장. 진해 막사장 정훈감 및 행정감 등의 요직을 역임했던 박건섭 대령은 예편 후 염천교 입구에서 창고(倉庫)업을 경영해 오다가 83년 초대에서 4대에 이르기까지 OB축구회의 회장을 역임해 왔던 축구계의 원로 김용식씨가 타계하자 그 후임(5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그로부터 5, 6, 7, 8대 회장을 역임하는 가운데 현역 선수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축구인들의 친목과 한국 축구계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일제 때의 행사를 답습한 4지역(서울 평양 함흥 청진) 친선 축구대회를 비롯, 춘계회장기, 추계회장배 쟁탈 친선 축구대회, 회원청백전, 국제대항 초등학교대항전, 어린이 축구학교 개설, 해외원정 차선경기, 축구인의 밤 행사 등 다채로운 행사계획을 추진했고, 88년에는 미국, 89년에는 동남아 지역으로 원정하여 친선경기를 가졌던 OB축구회에서는 90년 이태리 월드컵대회 때는 약 30명의 임원과 회장단이 대회를 참관한 뒤 이․영․불․스위스 등 여러 나라를 관광도 하고 친선경기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병대 장교로서 원로 축구지도자로서 보람있는 생을 영위했던 박건섭 대령은 지병으로 타계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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