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명인·기인

전 후 - 미들급 최강의 권투선수 송방헌 소령

머린코341(mc341) 2016. 8. 4. 07:20

전 후 - 미들급 최강의 권투선수 송방헌 소령


 해병대에서는 제15회 헬싱키 올림픽대회에 출전했던 한수안(韓水安) 선수가 3위 입상을 한 것을 계기로 처음으로 권투부를 설치하여 미들급의 송방헌 페더급의 김우영, 채용석, 김준식 선수와 라이트급의 김재덕, 조성복, 이안사노 선수, 그리고 플라이급의 노충학 선수, 팬텀급의 강춘원, 김영배 선수 등을 길러내어 국내 무대에서 용맹을 떨치게 했는데, 그 중에서도 처음으로 배출시킨 미들급의 송방헌 선수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출생배경과 발굴 비화를 지니고 있고, 또한 챔피언 도전전과 패자의 리턴 매치전을 통쾌한 KO승으로 장식함으로써 해병대의 명예 선양을 위해 큰 공헌을 했었다.

 
 송방헌씨의 출생지는 황해도 봉산(鳳山)이며, 그 고향 땅에서 그는 일제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다산왕(多産王)상을 받은 양친(부 송만모씨․모 장옥선씨)이 생산한 16남매(남7. 여9) 중의 8번째 자녀(3남)로 태어났으며(1923년생), 자녀들에 대한 장학열이 대단했던 부친의 뜻에 따라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 동경 금성(錦省)중학교와 일본 국제전수대학을 졸업한 데 이어 해방 후 고려대학교(법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7형제가 다 그러했듯이 강건한 체격을 타고났던 그는 중학교 때부터 권투를 했고 38선이 남북을 완전히 가로막기 전까지는 방학 때 양친이 살고 있는 고향으로 가서 조성국씨 등 권투를 하는 7~8명의 고향 청년들과 어울려 평양과 사리원 등지에서 입장료를 받고 권투시합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고려대학 재학시절에는 단성사(団成社)를 무대로 날뛰고 있는 깡패들을 소탕하는 데 큰 몫을 했던 그는, 6.25전쟁 초기 한강을 건너지 못한 상태에서 원효로에서 폭격을 당해 부인은 사망하고 자기는 한쪽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종로 2가에서 외과의원을 개업하고 있던 고모부 내외의 극진한 치료와 간병으로 건강을 회복했다.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 역전에 있는 화랑체육관에 머물고 있던 그는 다음과 같은 스카웃 비화와 입대 비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즉 1.4후퇴 직전 함흥 연포 비행장에서 수염비행장으로 철수하여 부산항 제1부두에 위치하고 있던 해군본부에 들였던 해병대사령부 군사참모 김동하 소령은 용무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어깨가 딱 벌어진 건장한 한 청년이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나 40대로 보이는 한 민간인이 덩치가 큰 미국인으로부터 얻어맞아 길가에 쓰러지는 것을 보자마자 그 미국인 뿐 아니라 반격에 가세한 다른 한 명의 미국인까지 한 펀치로 나가떨어지게 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듬직하게 여겨졌던지 그 청년에게로 다가가 단도직입적으로 “당신 해병대에 입대하지 않겠소? 만약 입대를 한다면 장교로 임관시켜 주겠소”하고 제의를 했다는 것이 그 첫 번째 비화이다.

 
 두 번째 비화는 이러했다. 즉 51년 4월경 부족한 초급장교들의 확보를 위해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해간 5기생들을 모집하고 있던 고길훈 중령은 40계단 밑의 가설 권투도장을 연락처로 삼고 있던 그의 사촌형 고봉아씨(전 일본 팬텀급 챔피언)를 만나게 되었는데, 때마침 그 곳에 고봉아씨와 친분이 두터운 송방원씨가 자리를 같이 하게 되어 고봉아씨의 권유와 추천으로 전형시험에 응시하게 되었고, 전형시험을 볼 때 송방헌씨는 시험지에 성명만 기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해간5기로 동래에 있는 육군종합학교에 입교하게 되었던 그는 피 교육기간 중 배가 고파 잔반(殘飯)을 먹기 위해 식사당번을 자청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육군종합학교에서 소정의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견습사관으로 임관했던 그는 해병대사령부의 특별 배려로 일선 근무를 하지 않고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던 도천 초등학교에 샌드백을 걸어 놓고 미들급 타이틀전에 도전하기 위한 연습에 매진했었다. 당시의 미들급 챔피언은 동양의 철권(鐵拳) 3인방(정복수. 박형권. 송방헌) 중의 한 사람인 박형권(朴炯權) 선수였으며, 송방헌 선수와 박형권(육군 CID소속) 간의 논타이틀전이 거행된 것은 사령부가 용두산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던 51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고 장소는 부산 토성초등학교의 특설 링이었다.

 
 그날 용두산 꼭대기의 천막촌에 위치하고 있던 사령부에서는 상당수의 장병들이 입장하여 용호상박(龍虎相搏)인 그 양 선수의 시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송방헌 선수가 7라운드에서 통쾌한 KO펀치를 날려 상대방을 다운시키자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랐고, 그로부터 수개월 후 경남중학교 특설 링에서 거행된 박형권 선수의 리턴매치에서도 마지막 12라운드에서 KO펀치를 작렬시키자 해병대 장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반면 1차 전에서 패한 뒤 그 당시 제주도에 위치하고 있던 육군신병훈련소장 백인엽 장군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설욕을 위한 특별캠프를 차려 놓고 맹연습을 했던 박형권 선수는 재기 불능한 패자가 되어 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송방헌 선수는 패기만만한 신진선수인 미들급의 새로운 도전자인 강세철 선수와 3차에 걸친 불꽃 튀는 시합을 가졌었는데(판정패, 판정승, 무승부) 그 때는 금촌(金村)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여단본부에서 많은 장병들이 외출을 해서 그 시합을 관람했고, 여단본부 정훈참모실에서 발행하고 있던 여단주보(해병속보의 후신)에서 그 대전을 대서특필했었다.

 
 한편 강세철 선수와의 3차에 걸친 대전을 끝으로 체력과 연령의 한계를 느껴 링에서 은퇴했던 송방헌소령은 김광식 대령이 2연대장으로 있을 때 그를 연대본부 본부중대장으로 임명한 김 대령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해병대로서는 처음으로 4각의 링을 만들어 후배선수들을 길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때 송방헌 소령은 사범으로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도장(道場)을 관리했다고 한다.


 송방헌 선수가 소령의 계급으로 예편한 날짜는 년 월 일었다. 일찍이 재혼을 하여 슬하에 4녀를 두고 있던 그는 대식가인 자신의 식욕도 늘 부담이 되었지만 특히 예편한 뒤론 경제사정이 더욱 어려워져 가족을 부양하는데 많은 고통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으며, 설상가상 자신의 건강마저 악화되어 애석하게도 73년 12월 5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송방헌 선수와 관련된 귀한 자료는 그의 조카인 송진은씨(해간 23기)로부터 입수한 것임을 밝혀 둔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본 내용의 저작권은 정채호 대선배님께 있습니다. 저작권관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